착해지는 기분이 들어 - 영화와 요리가 만드는 연결의 순간들
이은선 지음 / arte(아르테)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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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전문기자 이은선의 에세이 [착해지는 기분이 들어]는 라디오 MBC FM4U ‘FM영화음악의 한 코너 이은선의 필() 소 굿에서는 목소리로, 각종 영화 GV에서는 직접 관객과 영화인을 만나며 영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토대로 한 사려 깊은 질문과 태도로 좋은 인상을 남긴다. 이 책에 실은 글들은 영화 속에서 슥 지나쳐간, 혹은 인상적으로 기억되지만 어떤 이유 때문인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던 음식에 대한 이야기다.

 

<줄리&줄리아>는 두 여성의 실화를 다룬 영화로, 메릴 스트립과 에이미 애덤스가 그들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통틀어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전설의 요리사 줄리아 차일드, 그의 요리 책에 소개된 524가지 요리를 365일 동안 직접 만들어보고 후기를 올리기 위해 블로그 연재를 시작한 줄리가 그 주인공이다.

 

월간 <스크린>으로 시작해 월간지, 주간지, 일간지까지 다양한 마감 사이클을 겪어내며 영화 전문기자로 일하다 20169월에 회사를 그만뒀다. 제주에서 이듬해 2월까지 겨울을 났다. 시간이 많은 날은 밑반찬이나 육수를 만들어두는 데 열중했다. 양배추와 비트를 넣어 피클을 만들어두고, 언제든 국물 요리를 만들 수 있도록 다시마와 밴댕이 그리고 태우듯 구운 대파를 넣고 끓인 육수도 준비했다. 낮 시간은 혼자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거나, 친구들과 맛있는 것을 나눠 먹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흘려보냈다. 오름이나 숲, 좋아하는 해변에 가서 마음껏 좋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집에 돌아와선 따뜻한 차를 내려 마신 뒤 잠자리에 들었다.제주 동쪽 월정리와 세화 사이, 행원리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 그곳은 나와 친구들이 편히 숨쉬며 좋은 것들로 시간을 채운 리틀 포레스트였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가장 인상적인 음식은 혜원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꽁꽁 언 땅에서 뽑은 배추로 끓인 배춧국이다.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집에 그럴싸한 식재료가 있을리 없다.

 

 

 

언택트라는 기묘한 단어가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사이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행복, 그러니까 아끼는 사람들과 모여 따뜻한 식사를 함께 하고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건 최대의 사치로 느껴졌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 속 피자 장면에서도 주인공이 마르게리타를 먹는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리즈 얘기다. 주방에서는 피자를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중이다.

티라미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다. 아내와 사별한 뒤 시애틀 이사온 샘이 심야 라디오에 사연을 보낸 아들 조나 덕분에 애니라는 운명의 여성을 만나게 되는 내용이다.

 

혼자 살게 되면서 꼭 갖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달걀말이용 사각 팬이다. 애초에 둥글게 말린 것을 억지로 사각형으로 만드는 과정은 왠지 멋있지도 않았다. 지금 가진 사각 팬은 사촌 언니의 선물인데 이 팬으로 만든 달걀말이를 먹은 사람들 중에는 <소공녀>의 전고운 감독도 있다. 영화업계의 위기는 저자와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속절없이 미뤄지는 개봉일을 신호탄으로 영화관 GV를 포함한 오프라인 해설 프로그램은 모두 취소됐다. 광고 수익이 줄어든 매체들 역시 당분간 허리띠 졸라매기에 돌입했기 때문에 원고를 의뢰받는 일도 확 줄었다. 1년 내내 행복도 끝도 없이 유예하고 있다는 기분을 삼켜야 했다. 불안과 체념은 한 몸처럼 계속 붙어 다니며 마음을 어지럽혔다.

 

나에게 소중한 것, 혹은 상대가 기뻐할 만한 무언가를 주고 싶은 건 누군가를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의 본질이다. 이 마음은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는 일종의 불문율과 같다. 고 박지선과 절친이었던 저자는 만날 때마다 함께 밥도 먹었다. 누군가를 추억하는 일이 언제까지나 가슴 미어지는 고통만은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다. 실제로 그건 생각만으로도 벌써 고맙고 따뜻하다고 했다.

 

 

음식에 얽힌 누군가와의 추억은 이상하리만치 마음에 오래 머문다. 그것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 영화 속 인물의 것일지라도 마찬가지다. 가장 좋아하는 건 토마토소스다. 직접 조리할 때 실패의 부담이 적고, 초행인 음식점에 가더라도 웬만해선 평균의 맛을 보장하는 메뉴라고 했다.

 

평생 술과는 거리가 먼 알코올 쓰레기로 살아온 저자는 스페인에서는 몇 번인가 하우스 와인을 주문하고 말았다. 와인 몇 모금에 대체 왜 해장이 필요하냐고 묻지 말아달라고.

배우 주디 갈란드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IPTV 채널에서 인터뷰 코너를 진행하고 있을 때였는데 스칼렛 요한슨은 세 살때부터 주디를 보고 배우를 꿈꿨다고 이야기해왔다. 스칼렛 요한슨과 주디 갈란드의 삶을 단순 비교할 생각은 없다. 누군가의 인생은 그런 대상이 돼선 안 된다. 인터뷰를 마치고부터, 주디 갈란드가 동시대의 스타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해보게 됐다. 불행하게도 세상의 모든 배움이 온전히 내 것이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배움이 전혀 소화가 안 된 상태로 처음 혼자 진행했던 모 배우와의 인터뷰는 지금 떠올려도 아찔하다.

 

인터뷰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던 어느 날, <카모메 식당>을 보게 됐다. 때가 때여서 그랬는지 갑자기 영화가 좀 달리 보였다. 지금도 인터뷰를 하기 전, 마음 안에 향긋한 시나몬롤과 따뜻한 커피를 내려놓고 마주 않은 사람이 들려줄 영화와 인생 이야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코로나19로 영화관에 못 가본지 일년이 넘어간다. 몇 편은 다운 받아 보고 특선영화로 방영되어 봤지만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게 제맛인데 유일한 취미를 앗아가 버렸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영화와 음식에 대한 저마다의 기억을 풍성하게 떠올릴 수 있다면 무척 기쁠 것이라고 했는데, 영화가 당장 보고 싶어진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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