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호르몬이 그랬어 ㅣ 트리플 1
박서련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평점 :
이 책은 장편소설 [체공녀 강주룡] [마르타의 일] [더 셜리 클럽]을 통해 각기 다른 시대와 각기 다른 공간에 존재했던 여성 인물의 삶을 작가적 상상력으로 다채롭게 변주해온 박서련의 첫 번째 소설집이다. [호르몬이 그랬어]에 실린 세 편의 소설은 온난한 기후에서 궤를 이탈해버린, 한랭기단이 드리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 동세대 청년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 작가의 목소리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작품이다.
첫 문장은 남겨두자. 바뀌지 않는 것도 있어야지. 이건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니까. 이 소설을 마지막으로 고쳐 쓴 것은 9년 전 일이고 그때는 이렇게 썼다. 대학에 입학한 해 학교 기숙사에서 살았다. 10년 전인데도 그때 일들은 아주 먼 옛날의 풍문처럼 느껴진다. 술을 배웠고 이내 주정을 깨쳤다. 우리가 사는 곳은 5층짜리 허름한 건물에 73개 호실이 빽빽이 차 있는 구기숙사였다. 코인 세탁실 안에서 희고 말끔한 예의 얼굴은 온 힘을 다해 울음을 참고 있었다. 말을 건네는 대신 그 애를 안았다. 그 애는 놀랐고 나도 놀랐다. 시간이 지나 예는 사라졌다. 오로지 나의 세계에서만.(다시 바람은 그대 쪽으로)
패딩 점퍼를 입기엔 애매한 날씨다. 모친의 애인이 선물로 사준 고가의 패딩을 입고 문자로 이별 통보를 한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 호텔에 들어서기에 대낮부터 그런 생각을 하는데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비싼 밥을 먹다 말고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내가 할까? 미안했다는 말을 하려고 날 부른 걸까? 누군가는 두 달 뒤에 결혼한다고 했다. 역시 안 만나는 게 나았어. 충격을 받고 모친 애인에게 순대국 먹으러 가자고 전화를 한다.
모친의 애인이 옆 동 사람이고 단지 앞 상가에 가게를 가진 자영업자이며 열일곱살 먹은 아들과 단둘이 살고 있다는 등의 사실을 알아냈다. 모친은 아직도 한 달에 닷새씩 꼬박꼬박 행사를 치른다. 기간은 나보다 일주일쯤 앞선다. 모친의 생리가 끝나면 내가 시작되는 셈이다. 10여 년간 지금껏 모친과 나의 생리는 단 한 번도 겹친 적이 없었다. 모친과 나 사이에 어떤, 호르몬의 고리가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모친의 애인 집에서 잠을 잤던 것이다. 누웠던 자리에서 핏자국이 둥글게 번져 있다. 남자애 침대에다 이런 것을 남겨놨으니 보통 일이 아니다. 연습장을 한 장 뜯어 휘갈기곤 그 위에 얹어놓는다. 종잇장은 지금쯤 피를 조금 먹었을까. 내가 적어둔 문장을 떠 올린다. <내가 아니야, 호르몬이 그랬어.> 나오라는 토는 안 나오고 눈물이 울컥울컥 나온다.(호르몬이 그랬어)
[총塚]능은 왕 또는 비의 무덤을, 묘는 그 외 모든 무덤을 가리킨다. 총은 주인이 없는 빈 무덤이다.
동거 1년의 기억은 구획 지어지지 않은 슬라이드 필름 같았다. 몇 가지 장면들은 불어올 때마다 다른 느낌이었다. 순서도 뒤죽박죽이었고 내가 한 말과 네가 한 말을 구별하기가 어려웠으며 종종 실제로는 연출된 적 없는 장면들도 끼어들곤 했다. 너는 난초당 42호에 보관되어 있었다. 건물 안은 바람이 들지 않지만 온도는 오히려 바깥보다 낮은 듯했다. 도로까지 나오니 고갯길을 막 넘어오는 버스가 보였다. 가까스로 시간을 맞췄다.가방에 든 너를 바싹 끌어안았다. 돌아가지 말자. 차창 밖으로 운구용 버스 한 대가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이렇게 추운 날에도 누군가가 묻힌다는 사실에 나는 위로받았다.
무엇 때문인지 우리는 조금 다투었다. 내 탓이었을 공산이 크다. 하룻밤을 밖에서 보내고 네가 출근했을 새벽에야 방으로 들어갔다. 문 열기 전부터 방 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새어 나왔다. 연탄가스 냄새, 같으면서 아니었다. 소용없는 줄을 알면서도 너를 업고, 업는다기보다 둘러메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데 내 방에 살았던 누군가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 주인 여자는 소스라치며 뒤로 자빠졌다. 오로지 오늘을 위해 산, 너를 담아둔, 검정색 스포츠 색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내가 가방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기억해내려고 애썼다.(총塚)
처음으로 지은 이야기를 기억한다고 생각한다. 사촌 언니가 우리 집에서 지냈다. 열 살 때? 열한 살 때? 원고지에 쓴 이야기를 보고 언니가 서련이는 소설가가 되어야겠다. 조금 모호해도 아름다운 문장을 쓰고 싶었고 감히 아무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짓고 싶었다. 지금은 정확한 문장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며 누구에게나 공감의 여지가 있는 이야기를 찾아다닌다. 이 책의 세 작품을 쓴 나와, 그것들을 고친 나는 분명히 연속적이고 동일한 존재지만 또 이토록 다르다. 에세이 (……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