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장면 소설, 향
김엄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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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엄지 작가의 처음 접한 소설 [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는 무의미, 단절, 불안의 연속인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무력감을 잘 표현해 준 소설이다. 의식과 무의식,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포착됨을 거부하는 문체와 평면적이고 반복적인 서사로 특유의 작품 [겨울장면]은 기억을 잃었으나 어떤 기억을 잃었는지조차 모르는, ‘R’이라는 인물을 통해 진행된다. 역시 작가의 글들은 저자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굳건하다.

 

8개월 전 R5미터 밑의 바닥으로 추락했다. 일행은 없었다. 뒤틀린 자기 발목과 찢겨 벌어진 피부를 보았다. 아내가 어디에서 다친거예요? 물었을 때 거기가 어디였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에서 사라진 것이 사고 당일만은 아니었다. 연락처에 저장된 번호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직장 동료였던 L의 장례식장에서 마주친 상사의 성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며, 아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잊었다.

 

R, 모르는 R을 상상해야 했다

R은 생각보다 더 R을 모르고

 

R은 다시 천장을 본다. 모서리에서 모서리로 눈알을 굴린다. 굴리고 굴려도 더 멀리 가지는 못한다. 상사의 성을 기억해 낸다. 박씨도 정씨도 아니었다. 그냥 개같은 새끼. 콩국수 셋, 상사는 그렇게 주문했다. 창밖의 흔들리는, 휘어지는 신호등을 보았다. 신호등이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불다니. R의 감상이 끝나기 전에 콩국수가 테이블에 놓였다. 상사는 웃는 얼굴로 깍인 손톱 조각들을 그러모으며 R에게 내밀던 상사의 얼굴. 고명 삼아 얹어 먹어봐. 상사가 말했다.

 

R은 한순간, 단 한 번에, 여러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갑자기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지고. 생각해보면 당신은 좋은 사람은 아니었어. 이 메시지를 보낸 전화번호 뒷자리 1893이 아내의 5년 전 전화번호 뒷자리라는 것을, 기억해 낸다.

 

제인해변은 R의 아내의 고향이다. 겨울 휴가를 보내기 위해 제인을 찾았고 버스 안에서 R에게 보이는 것은 버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 아내의 뒤통수였다. 아내와 잘 어울리는 횟집에서 세꼬시를 주문했다. 두서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부서지는 파도가 보이고 아내가 옆에 없고, 소원도 없는데, 이 바닥에 왜 누워 있다. 빈 소주병이 나뒹굴었다. 반지를 가끔 쳐다보면서, 아내와 어디서 어떻게 헤어졌는지 떠올려보려 애를 써도 기억이 없었고 답답함이 치밀어 화가 나려 했다. 핸드폰은 어디에 있는지 횟집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둘 중 하나는 거기 있지 않을까. R이 아내를 버린 건지, 아내가 R을 버린 건지.

 

의사는 R에게 통증을 줄이는 방법 중 하나로 현실 직시를 제안하지만 R에게 현실이란 단어는 듣자마자 웃음이 나올 정도로 무의미하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일주일은 반복을 암시하는 속임수다. 아직 겨울인가. 크리스마스는 단 한 번이었다. 선물 상자를 아내에게 건넬 생각이었다. 내 아내가 되어줄래? 아내가 아닌 그저 아는 여자로 남을 수도 있는 그런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고, 공간은 충분히 따듯하지만 점점 건조해진다.

 

그는 알지 못했다. 얼음호수의 끝을, 겨울의 시작과 끝을. 제인해변에서 새로운 이름을 만들고 다음 날 아침 제인호수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 누구의 것, 자기의 것도 그는 알지 못했다.p75

 

에세이 [몇 하루]는 작품을 집필하며 일상에서 길어 올린 장면들을 작가 특유의 산문체로 써 내려간 것으로, 작가의 예리한 현실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직 소설의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소설이라고 불러야 할지, 이 글이라고 불러야 할지, 이 미친, 이라고 불러야 할지. 내가 옮겨줄게. 나는 이 프린트물을 들고 걷는다. 소설 제목을 정미시간으로 할까? 나는 쉬고 싶을 때 행갈이를 한다. 이건 내 글쓰기에 대한 비밀 아닌 비밀이지만, 비밀이 별게 아니니까 하는 말이다. 정말로 쓰고 싶은 말들은 단 한 글자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결심을 하면서 혼자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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