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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로 산다는 것 - 워킹푸어의 시대, 우리가 짓고 싶은 세계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1월
평점 :
러시아 태생으로, 2001년 한국으로 귀화한 ‘박노자’라는 이름의 한국인이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조선사를 전공하고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에서 한국학과 동아시아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자는 2020년의 한국을 다시 돌아본다.
노르웨이에 체류한 지 20년이 되어간다. 한글을 까먹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있어서 일주일에 한편씩 한글로 블로그에 글을 올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기도 한다. 노르웨이 신문을 매일같이 읽고, 이상하게 노르웨이에 동화됐다든가, 노르웨이인이 됐다든가, 이런 느낌은 전혀 없다. 언어적 편입되었다 해도 정서적 동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한국에 가끔 들어갈 때면 뭔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그런 느낌이 분명히 있다. 한국에 대한 동질감 노르웨이에 대한 괴리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가만히 생각해봤다. 역시 ‘정서 공유’, 각종 공포감이나 콤플렉스, 절망이나 체념 의식의 공유가 아주 큰 것 같다. ‘괜찮은 사회’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 정의는 덕후, 사회적 적응을 거부하는 기인들이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관용사회이다. 양육 노동이나 노후 돌봄 노동을 한국이라는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양성평등이 불가능한 이유를 지적한다.
노르웨이 젋은 세대들에 비해 대한민국의 ‘연애 포기 세대’는 ‘달콤함’ 보다는 ‘쓰라림’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의 많은 청년들이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모를 중소기업에 다니고, 고시원, 원룸,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 장시간 노동으로 연애 같은 장기적 관계를 유지할 에너지마저 갖지 못한다.
저자는 오늘날 한국에서 쓰이는 2인칭 대명사를 거칠게 분류하자면 님류, 지배자와 전문가는 물론 숙련노동자까지 포함하고, 노동자나 미취업자 등을 포함한다, 사람이 살아서도 급이 있는데 죽어서도 급이 있는 게 싫다. 수장, 추장, 국왕의 세계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노예들의 세계는 익명의 세계, 무기록의 세계이다. 시중에 팔리는 자기계발서는 성공신화의 이야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한국 정계나 학계에는 왜 이렇게 전향자들이 수두룩할까? 학벌, 출세로 지금도 ‘계급’과 같은 화두를 놓지 않는 사람들이 존경스럽기만 하다. 신분 세습 도구가 되어버린 명문대의 특권적 위치를 보며 대학들의 평준화가 너무나 시급하다.
가장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은 ‘우리가 제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해서 지금까지도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같은 표현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친일파, 식민지 시기의 토착 지배층은, 한국에서 계속 기득권을 키워나갔을 뿐, ‘청산’된 과거가 있기나 한가 싶다. 우리는 아무리 예방 대책에 온 사회가 온 정성을 다한다 해도 학폭과 왕따 현상을 완전히 근절할 수 없음을 자각해야 한다. 사회 자체가 위계 질서의 구조적 폭력에 의해 유지되는 만큼 아이들에게만 비폭력적으로 평등하게 살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어른들의 사회가 병든 만큼 아이들의 사회도 병들 수밖에 없다. 인천에서 일어난 일과 같은 비극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을 해야한다!
코로나19 사태는 자본주의 체제하의 세계에서 국가의 행정력과 준비력 그리고 의료 체제의 견고함을 ‘시험’한 셈이다. 동아시아와 북유럽은 비교적 무난하게 통과하고 있지만, 미국과 남유럽 일본은 사실상 낙제점을 받았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코로나가 드러낸 각국 내의 각종 ‘격차’였다. 공공 부문 종사자들은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재택 근무로의 전환 정도다. 항공업과 숙박업 등 가장 타격을 받았고 중소기업들의 자금 흐름은 많은 문제를 보였고 서비스 부문과 유통 부문의 영세 업체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코로나19의 ‘진실의 순간’이 보여준 것은 질병에 대처하는 각국의 행정력과 준비력 그리고 정치적 의지의 ‘차이’뿐만이 아니라 각국 내의 무서운 ‘사회적 격차’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미국과 일본, 중립국인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엄청나게 살찌우고 전 세계적 채권 국가로 만든 제1,2차 세계대전으로 갈 필요도 없다. 1950년대 미국과 일본 자본에 신의 도움이었던 한국전쟁이 끝나자 1954년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0.6퍼센트를 기록했다. 더 이상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이 미국 자본주의에는 엄청난 문제였다. 열전은 끝나도 냉전은 계속되었다. 저자는 이 디스토피아 같은 세계에서 혁명은 결국 나와 우리를 회복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라고 말한다. 스스로에게 ‘나의 생각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우리가 함께’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혁명적인 발상이다.
리딩투데이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