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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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신 소설향 시리즈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30년 동안 살아온 스무 평이 조금 넘는 집에 어른 넷과 아이 둘이 살고 있었다. 3년 전 동생은 남편의 폭력을 벗어나 세 살과 백일 지난 아이를 품에 안고 왔다. 쌍놈의 새끼 감옥에 처넣어야지 세 모녀는 울었다. 나는 베껴 쓰던 시의 마지막 문장을 마저 적어 내려가며 오늘은 쓸 수 있을까. 저 창문에 흔들리는 목련 가지에 대해서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누워버렸다.

 

동생은 낮에는 회계사 사무실에서, 퇴근 후에는 파트타임으로 두어 군데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엄마는 고시원 건물의 청소원이고, 아버지는 그 옆 재건축 아파트 공사장의 야간 경비원이었다. 아버지는 크게 하던 사업을 제대로 말아 먹은 뒤 목련빌라로 이사 온 직후에 엄마는 맞벌이를 시작했다.

 

두 아이를 씻기고 재우고, 빨래를 개고 집안 정리를 마쳐야 하루가 끝이 났다. 매일매일, 3년 동안 해온 일인데도 저녁 설거지를 할 때쯤 체력이 다 떨어진다. 그 깊은 어둠 속에서 노란 민들레가 대견하게 꽃을 피우며 새벽을 부르고 있다는 것에 대해 쓰고 싶었다. 쓰고 싶지만 써지지 않았다. 연필 잡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고, 벙어리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고 누구에게든 털어놓으면 이 갑갑증이 좀 나아 질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의 전공이, 마흔 살이라는 중압감이, 두 조카들에게 꼼짝없이 손발이 묶인 나의 현실이, 내가 자처한 족쇄에 엉켜 탈출 할 수도 없는 이 집이, 나에게는 육중한 관처럼 느껴졌다.

 

동생이 집으로 돌아온 이후, 3년 전부터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쓸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쓸 것들은 오히려 많아졌다. 그러나 쓸 시간이 없었고 머릿속을 정리할 공간이 없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장래 희망에 없음이라고 적었던 나는 지원했던 대학에 떨어지고 공무원 시험이 제격이라는 아버지 권유에 공시 학원을 다녔다. 넉넉하지 않은 집의 장녀로 자랐으면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욕망도 없이 그저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하는 아이일 뿐이었다.

 

동생은 공부도 잘해서 계획에 따라 자신을 설계하고 대학을 다니면서 과외로 학비를 벌었고, 대학원까지 마쳤다. 동생이 대학 3학년이고 내가 스물일곱 살일 때 무심히 물었다. “언니는 글을 쓰고 싶은 거지?” 동생은 평생교육원에서 시 창작 수업을 듣게 해주었고 시를 쓰거나 시인이 되기 위해서 꼭 대학을 나와야만 되는 건 아니지만 동생의 권유와 지지로 다음해 야간전문대학의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졸업을 앞둔 겨울, 그간 써온 시를 추려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당연히 연락 온 곳은 없었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엔 시를 썼다. 신춘문예에 매년 떨어졌다. 시인이 되는 운명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면 결락된 것은 무엇인지 찾고 싶었다. 기어이 왜 시인이 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되묻는 일이었다.

 

조카들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었다. 대책 없이 집을 나오라고 한 것도 나였으니까 대학교에 갈 수 있도록 지지해주고 대출까지 책임져 준 동생에게 빚을 갚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위해 살 수 있을까.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건 서점이었다. 그는 여섯 살 연하였고 휴학을 하고 고모가 운영하는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복학할 때까지 매일같이 서점을 들락거렸다. 시집을 읽고 마음에 드는 구절을 직접 읽어주기도 했다.

 

그 사람과 헤어지게 된 것은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가끔 안부 문자를 보내오기는 했다. 아이들과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그 사람을 만났다. 동생의 짐을 왜 언니가 지는지 이해를 못했다. 어느 날 급성 심근 경색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집을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아버지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엄마의 울음을 뒤로 하고 그 사람 집으로 임시로 들어갔다.

 

다시 시를 쓰기 위해 방을 구했고 일자리도 구했다. 엄마나 아이들을 위해선 나의 손이 점점 더 필요해질 것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잠시만이라도 나는 나로 살고 싶었다. 이 소설은 장녀로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여서 공감이 갔다. 자신만의 시를 쓰기로 용기를 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잘 묘사하였다. 주인공의 상황에 처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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