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아리랑 2
정찬주 지음 / 다연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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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아리랑]은 광주민중항쟁 40주년 회심작으로, 19805월 광주민중항쟁 14일간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다룬 장편소설이다. 독서를 하면서 이렇게 마음이 아픈 책은 다시 없을 거 같다. 광주 시위대는 담양, 목포, 해남까지 시위차를 타고 달려갔다. 소총과 실탄을 구하기 위해서였지만 화순 말고는 여의치 않았다. 총기는 물론 경찰도 없었다. 목포로 간 시위대도 무기를 구하지 못했다. 시위대에게 약속한 대로 경찰차가 고속버스를 선도해주었다.

 

헌혈차가 적십자병원에서 가까운 곳부터 돌면 서로가 먼저 헌혈을 하겠다고 팔뚝을 걷었다. 서석1동 반장과 아주머니들이 주먹밥을 듬뿍 올려주기도 했다. 헌혈 하는 여학생을 쫓아와 어머니가 집으로 데려다 놓아도 언제 빠져나가 또 피를 뽑는다.

 

공수들이 철수한 강의실은 취조실로 쓰여 바닥에는 피가 흥건하고 러닝셔츠, 신발, 바지 등이 어지러웠고 머리카락도 한 웅큼씩 뭉텅뭉텅 떨어져 있었다. 강의실에는 신발 100여 켤레, 허리띠 50여 개가 널브러진 채 뒹굴었다. 모새를 퍼가지고 와서 핏물부텀 닦고 빗자루로 쓸어야 할 거 같았다.

 

14일부터 16일까지 학생 시위가 시민들의 가담을 촉발시키기는 했으나 학생 간부들은 19일 전까지 이미 광주를 빠져나갔고 실제로 총을 들고 싸운 사람들은 서민과 빈민층의 청년 및 보통 학생들이었던 것이다. 재야인사들도 빙빙 돌면서 피신했다가 돌아온 것도 사실이었다.

 

시민군이나 시민들 중에서 여러 명이 지원해 민원실 앞과 상무관에서 장례 일을 보고 있었다. 아직 관에 들어가지 못한 시신의 모습은 참혹했다. 시민군끼리 대여섯 명씩 1조에서 5조까지 기동타격대를 편성했다. 박인수와 김현채는 6조가 되었다. 김현채가 김밥을 먹고 있는데 총알이 김밥을 뚫고 지나갔다.

 

무기가 너무 많이 돌아댕겨서 사고 날 위험이 커서 반납하자는 의견과 제이의 목숨이나 같은 무기를 가지고 있자는 의견이 나뉘었다. <계엄군들은 광주시민을 폭력적으로 굴복시키려고 했지만 정신만 살아 있다면 우리들은 평화적으로 계엄군들을 굴복시킬 수 있소. 하느님은 결코 광주시민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오> 조비오 신부는 말했다.

 

모두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지만 523일에 생긴 주남마을 시민 학살은 분노하게 하였다.소형버스가 지원동을 지나치려 할 때 매복해 있던 장교 한 명과 무전병이 11공수여단 본부에 소형 버스가 화순 방향으로 간다고 보고했다. 소형버스는 100미터도 달리지 못했다. 주남마을 앞에서 집중사격을 받았다. 운전수 김윤수는 즉사하고 소형 버스는 벌집이 되어 옆으로 굴렀다. 여덟 명이 즉사하였고, 남녀 세 명이 중경상을 입은 채 끌려 나왔다. 세 명을 경운기에 태우고 가다가 부상이 심한 시민군 두 명을 훔쳐온 리어카에 싣고 홍금숙은 걷게 했다. 홍금숙은 사시나무 떨 듯 바들바들 떨었다. 혼절했다가 정신을 되찾아 공수부대원 끼리 주고받는 말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병원으로 보내!” 홍금숙은 폭도라는 말을 악마로 듣고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눈을 뜬 곳은 시민군 부상자들이 북적거리는 전남대병원 병실이었다.

 

교도대에 당한 분풀이를 송암동 주민들에게 했다. 철로변에 살던 김승후는 M16 총알이 집 안으로 날아들자 솜이불을 덮은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공수부대원 대여섯 명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청년 세 명 모두 총을 맞고 맥없이 쓰러졌다. 계엄군의 만행은 송암동뿐만이 아니라 동운동 무고한 시민이 죽었다.

 

윤상원은 어젯밤에 고등학생들에게 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고등학생들은 나가라. 우리가 싸와서 도청을 사수할테니 니들은 집으로 돌아가거라. 니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거라. 우리는 오늘 계엄군에게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니들이 우리를 잊지 않는다믄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기록할 것이다. 도청을 나가는 니들은 비겁자가 아니다. 역사의 증인이 되기 위해 나가는 것이다.”p314

 

[광주 아리랑]198051440대 초반의 전남대 학생과장 서명원이 교정에서 바라보고 느낀 봄날과 학생들 시위에서 시작된다. 끝은 527일 새벽 계엄군의 시민군 살육 현장에서 끝내 총을 들지 못하고 비켜나 이불 뒤집어 쓰고 떨면서 쓴 이희규의 비망록이다.

 

작가는 말한다. 정말 광주는 특별한 도시가 아니라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보통의 도시였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시위 중에 들었던 횃불이 밤하늘의 별이 된 도시라고. 작가는 40년 전 5월의 광주를 향해 따뜻한 눈물을 흘려주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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