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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코르뷔지에 - 건축을 시로 만든 예술가 ㅣ 클래식 클라우드 23
신승철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8월
평점 :
내 인생의 거장을 만나는 특별한 여행. ‘클래식 클라우드’ 23번째 책으로 읽어보았다. 책 날개에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 그리고 남몰래 시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건축만을 위해 투쟁했습니다.”앙드레 말로가 르코르뷔지에의 인생을 이렇게 요약했다.
일생 열두 개 나라에 일흔다섯 채의 건물을 지었다. 인도의 찬디가르를 제외하면 실현된 것이 없지만 전 세계 마흔두 개 도시의 계획안을 세우고 400여 점의 회화와 8000여 장의 드로잉, 44점의 조각 작품을 남겼고, 살아생전 무려 서른네 권에 이르는 책을 출판했다. 매일 아침 그림을 그렸고, 오후에는 건축을 했으며, 밤에 글을 썼다. 스위스 산간 지방에서 태어나고 지중해 일대를 여행하며 건축을 배웠고, 지중해 출신 이본 갈리스와 결혼했고, 로크브륀느카프마르탱의 해안가에 작은 통나무집을 지었다.
스위스 태생이지만 프랑스인이 되었다. 르코르뷔지의 본명은 에두아르였다. 아버지는 시계에 에나멜 칠을 하는 장인이었고, 어머니는 음악을 가르쳤다. 형 알베르는 음악에 뛰어나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에두아르는 천성이 착했지만 말썽꾸러기였고 예민하고 반항적이었고 공부를 잘했지만 형 만큼은 아니었다. 그림 실력만큼은 대단해서 아버지를 기쁘게 했다.
스승인 레플라트니는 에두아르에게 건축을 하라는 조언을 한다. 시계 장식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지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건축업이고 당시 수채화에 취미를 붙이고 있어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스승님은 학생들을 숲으로 데려가 자연을 관찰하게 하고 자연 형태를 연구하는데 장식 패턴을 개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에두아르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왼쪽 눈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에나멜 작업과 세공 작업을 줄여야 하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피렌체의 산타크로체성당을 마음에 들어했다. 건축의 본질을 회화에서 발견하고 건축 장식뿐 아니라 조형 원리 역시 회화를 통해 찾아내어 평생 그림을 그렸고, 위대한 건축가가 되었다. 피렌체 외곽에 있는 에마수도원 공간과 풍경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에두아르는 빈에서 분리파 활동을 직접 목격했다. 장식미술 공부를 위해서 빈이나 독일로 향하는 것이 유리했지만 파리로 떠났다. 그라세의 소개로 오귀스트 페레를 찾아간다. 각 도시에서 그린 스케치를 페레는 청년의 재능을 간파하고 “내 오른팔이 되어달라”라고 했다. 페레 사무소에서 근무하면서 유럽과 아프리카에 철도콘크리트 건축의 도면을 그렸다.
오귀스트 클립스탱 친구를 만나 독일어 공부를 시작하고, ‘동방 여행’을 떠나게 된다. 새로운 건축을 찾아서 베런스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스케치의 성공 신화는 베를린에서도 이어졌다. 일에 파묻혀 살던 5개월 동안 과도한 업무는 심신을 지치게 했다.
먼 훗날 프랑스 정부로부터 경력을 인정받기 전까지 학위도 자격증도 없는 건축가였다. 자신이 건축을 독학했다는 사실을 평생 자랑스러워했고 여행은 졸업장과 자격증을 대신하는 징표와도 같았다. 첫 설계비를 들고 떠난 여행은 스무 살에 떠나 스물네 살까지 이어졌다. 첫 여행은 고향 친구 페랭과 함께 이번에는 클립스텡과 동행했다. 에두아르는 발칸반도, 이스탄불, 아토스산, 아크로폴리스, 이탈리아반도를 거친 긴 여행이었다. 이미 오래전 빈에서 부르주아의 삶을 포기했고 프롤레타리아도 거리를 두게 되었다. 방랑벽 있는 보헤미안은 호기롭게 출발한 여행에서 삶의 교훈을 찾아야했다.
주택을 효율적으로 짓기 위한 공법으로 돔이노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파리 이주 후 그림에 집중하기 위해 건축을 놓아버렸다. 화가 오장팡의 영향이 컸다. 자신을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에 비유했다. 아파트를 새로 지어 이사했는데 이웃이 상을 당했을 때 시신을 운구할 때 좁은 나선계단이 문제를 일으켰다. 이런 상황을 계산에 넣지 못한 탓이다.
‘빌라 라로슈’에서 선보인 필로티 구조로 지은 별장은 사보아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인기였지만 장대비가 내릴 때 물난리를 겪어 건축주와 가족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배경이 멋져 전쟁 때는 독일군 초소가 되고 미군이 집을 차지하고 프랑스 정부와 문화계 인사들이 복원 운동을 시작했다. 프랑스 최초의 근대건축물로 가치가 있어 르코르뷔지에는 건축계의 피카소가 되었다.
주택 ‘하얀 집’을 지으면서 예산을 초과하고 경제적 어려움이 시작되어 설계비를 부모에게 청구하여 가족의 관계는 위기에 봉착했다. 세월이 지나 브베역 인근에 부모님이 노년을 보낼 주택을 지었다. 르코르뷔지에는 동서를 관통하는 고속도로를 지중해 연안에 배치했다. 항만과 도시를 유기적으로 연결해줄 것이다.
아내 이본을 거침없고 자유분방했던 ‘지중해의 영혼’을 지닌 여인이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도시 생활을 힘들어했고 펜트하우스의 삶을 편치 않아 아파트를 개방적으로 디자인했다. 그는 바다 수영을 즐겨 하였는데 푸른 바다에서 사랑하던 지중해와 하나가 되었다. 시를 닮은 건축을 아름답게 지었으며 감동적인 삶을 살았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 너무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