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 - 책 읽어드립니다,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지음 / 스타북스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백범일지]는 김구 선생이 후손에게 남긴 유언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쓴 자서전이다. 이 책의 상권은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임시정부 시절 두 아들에게, 하권은 중일전쟁의 결과로 정처 없이 떠돌아야 했을 때 동포들에게 선생의 삶과 민족운동에 대한 소회를 밝히려 쓴 것이다.

 

난산 끝에 태어난 김구는 어머니의 젖이 말라 암죽을 먹이고 아버지가 품고 다니시며 동냥젖을 먹이셨다. 이 생원댁 아이들과 놀다가 억울하게 몰매를 맞았다. 다 죽일 생각으로 칼을 들고 울타리를 뜯고 있는데 그 애들 누나에게 들켜 목적도 달성 못하고 실컷 얻어만 맞고 칼도 빼앗긴 채 집으로 왔다. 밥 먹던 수저를 반으로 잘라 엿으로 바꿔 먹기도 하고, 아버지 돈을 훔쳐다 떡을 사 먹으려다 집안 어른에게 들키자 아버지는 들보 위에 매달아 회초리로 후려갈겼다. 마침 아버지와 동갑이신 학렬이 높은 장련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마구 때리셨다. 어린 것을 그렇게 무지하게 때려서 쓰겠느냐는 것이었다.

 

조상인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었다. 멸문지화를 피하는 길은 오직 하나뿐, 그것은 양반의 행색을 감추고 상놈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상놈이 되야만 했나 분해서 글 공부를 하리라 결심했다. 글 선생이 글방을 옮기면 밥그릇을 메고 고개를 넘어 공부를 하는데 김구가 일치월장 하니 다른 학생들이 시기를 하였다. 과거를 보고 와서 실망을 하자 아버지는 풍수나 관상 공부를 해보라 하셨다. <마의 상서>를 빌어다 석 달 동안 꼼작도 안하고 거울을 보고 내 얼굴을 부위와 이름을 익혀가며 연구를 하는데 귀격이나 부격과 같은 좋은 상은 없고 천격, 빈격, 흉격 뿐이었다. 짐승처럼 살다가 죽어야 하는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책 속에 좋은 구절대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동학에 입도하고 아명인 창암 대신 창수로 개명하였다. 동학당 중 나이도 어린데 가장 많은 연비를 가졌다 하여 아기 접주라고 별명 지어 불렀다. 황해도에서 도유 15명을 선출하는데 그중 한명이 되었다. 팔봉이라는 이름을 짓고 해주성을 향하여 전진했다. 민간에 행패하는 자는 적발하여 엄벌에 처했더니 백성들도 안도하였다. 청나라를 가기 전에 안 진사댁에서 만난 참빗 장수 김형진이 길동무가 되었다. 대포를 두 손으로 들었다 놓을 정도의 장사로 소문난 김이언을 찾았다. 그는 고집만 내세워 작전에는 실패하였다.

 

고 선생님의 손주 사위가 되려나 했는데 김치경과 농담 삼아 정한 청혼으로 이루지 못했다. 지하포에서 진남포로 가는 길에 왜놈을 때려 죽였다. 그때 객주의 고발로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두 다리를 주리를 틀어 지금도 큰 흉터가 생겼다. 김구는 법정에서 오히려 큰 소리를 쳤고 소문이 났는지 찾아오는 사람들이 음식을 한 상 차려서 만나러 왔다. 옥중에서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상감이 국모보수란 죄명으로 사형을 정지하도록 결정했다. 김주경은 재산을 탕진해가며 김구 석방 운동을 하였지만 효과가 없자 단념하였다.

 

2년 만에 인천 감옥을 탈옥하게 된다. 거지 행색의 김구는 문전박대를 당하고 서울로 향했다. 약간의 노자 돈을 얻어 남쪽을 여행하다 출가하기로 결심하고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영천암의 주지가 되었다. 불심이 회복되기 어렵고 부모님도 중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아 산을 내려왔다. 유인무와 성태영이 상의한 끝에 쫓기는 몸이라 김창수로 행세하기 불편할 것이니 김구로 정했다.

 

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하여 고기나 약을 살 돈이 없어 자신의 허벅지를 베어 구어 드시게 했다니 참 대단하고 눈물겹다. 도산 안창호 여동생과의 혼담이 깨지고 최준례와 혼인을 하였다. 안창호는 미국에서 돌아와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웠다. 안중근 사촌 동생 안명근이 독립운동 자금이 필요하다 하였지만 인재를 양성하여 힘을 키워야 하니 젊은이들을 서간도로 보내 군사교육을 시키는데 노력하자고 하였다.

 

숱은 애국자를 잡아들이니 감옥이 부족했다. 신문이 아닌 고문과 악형을 하였다. 와타나베 놈은 조금이라도 숨긴다면 살아 돌아갈 생각을 말아라 하면서 17년 전의 인천 감옥의 김창수인 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사형정지를 받고 탈옥 도주한 것은 적혀 있지 않았던 거 같다. 가출옥으로 고향으로 가니 서너 달 전에 딸 화경이가 죽었다. 7살 밖에 안된 어린 것이 아버지를 걱정했다고 한다. 상해에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안창호 동지가 내무총장으로 국무총리를 대리하게 되었다. 아내가 인을 데리고 상해로 오고 신이 태어났다. 아내는 신을 낳은 후 폐렴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

 

문지기를 청원했는데 뜻하지 않게 경무국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서른한 살 이봉창은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 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다고 하였다.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된 후 사형당했다. 윤봉길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려는 큰 뜻을 품은 의기남이었다.

 

상해에 온지 14년 왜놈들의 추적을 피하려 뱃사공 주애보와 배 안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남경으로 와서 왜경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주애보의 본가에 월급을 주며 그녀와 동거를 했다, 이봉창, 윤봉길 사건이 생기자 순사대는 집을 포위하여 어머님을 감시했다. 어머니는 지방의 수토병이 걸려 손을 쓸 수 없어 돌아가셨다. 독립이 되거든 유골을 파가 고향에 묻어주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7년간 중경 생활을 회상하였다. 폭격이 심해 임시정부를 네 번이나 옮겼다. 광복이 되어 귀국하면서 동지들을 만나거나 유족들을 찾아 보았다. 독립운동가로 헌신하신 김구 선생의 뜨거운 민족애 너무 감동적이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라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대답할 것이다.(민족국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