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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치의 상상력 - 질병과 장애, 그 경계를 살아가는 청년의 한국 사회 관찰기
안희제 지음 / 동녘 / 2020년 8월
평점 :

이 책은 크론병을 앓고 있는 20대 청년이 써내려간 ‘청춘 고발기’이자 아픈 몸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모순을 비판한 날카로운 보고서다. 안 아프면 좋겠다는 말, 얼른 나으라는 말은 아픔을 불행이나 피해로만 전제한다. 저자는 난치 질환이다. 얘기해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희귀 질환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아픈 사람으로서 갖게 된 태도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고 싶었다.
스무 살의 여름, 크론병을 진단받는다. 면역계가 정상 세포를 공격하는 과잉 면역 반응을 일으켜 소화기의 입구부터 출구까지 염증이 생기는 희귀병이다. 진단 받기 전 항문 주의 농양이 생긴 것이 이해가 됐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종기를 달고 살았는데, 자신의 피를 물려준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청춘이라고 하면 알바도 하고, 인턴도 하고, 놀러도 다니고, 술도 마셔야 한다. 가령 여행을 가서 아픈 적은 없었지만 피로와 스트레스에 약해 힘들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도 아픈 사람이었다. 크론병을 가진 아들과 메니에르병을 가진 어머니와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하게 했다. 메니에르병을 가진 저자의 친구들은 어머니에게 먹어선 안 될 것과 조심해야 할 것들을 알려준다.
저자는 오래 일했던 장애인권동아리의 회장 후보가 되었을 때 ‘장애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에 부딪힌다. 장애인 옆에서는 비장애인으로 비장애인 옆에서는 ‘조금 더 장애인’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대학생활에서 아플 것 같아 수업에 빠지는 상황을 교수님들께 메일을 구구절절 써서 보내야 했다. 크론병은 언제나 아픈 것은 아니다. 통증은 왔다가, 돌아갔다가, 어디로 사라졌다가 어느새 돌아오는 길고양이 같은 존재이다.
건강했다면 저자 역시 취업 준비에 매진하거나 유예된 시간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아픈 몸은 청춘이란 화려한 포장에 가려진 진짜 청년들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청춘의 낭만 뒤에는 값싼 노동력으로 청년들을 사용하려는 시장의 논리가 도사리고 있었다. 저자는 경제학과 대학원을 오래 고민했다. 공무원 시험, 로스쿨을 고민했지만 어딜 가나 몸이 문제여서 포기하고 몸을 다루는 학문들을 찾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문화 인류학은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배우고, 알아갈 수 있어서 지금이 행복하다.
코로나19에서 수많은 기사, 칼럼, 평론이 쏟아져 나왔다. ‘바이러스’는 가장 흔한 은유였다. 인종차별, 지역 차별 등을 ‘혐오 바이러스’라고 칭한 사람과 언론사는 세기 힘들 정도로 많다. 저자는 자주 의심받았고 고통은 사소한 것으로 무시되기 일쑤였다. 질병을 노화와 연결 짓는 빈곤한 상상력과 눈에 보이지 않는 아픔을 꾀병으로 취급하는 사회가 낳은 비극이었다. 젊으니 금방 이겨낼 수 있다는 말, “안 아파보이는 데 왜 그래?” 같은 친구의 물음 등은 공감이나 응원이 아닌 비하에 가깝다. 저자는 이렇게 타인의 아픔을 존중하지 않거나 쉽게 넘겨짚는 행위를 이른바 ‘헬스플레인’이라고 말한다. 남성이 여성에게 저지르는 ‘맨스플레인’처럼 ‘헬스플레인’은 건강이 권력인 세상에서 아픈 이들이 수시로 당해야 하는 횡포다.
질병과 장애를 뚜렷이 나누고 다르게 대우하는 사회를 생각하게 되면서, 이제는 질병과 장애를 대하는 사회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저자도 그렇고 주변에는 SNS에 자주 ‘찡찡대는’이들이 있는데 그 ‘찡찡대기’가 정말 중요하다고 말한다. 의존해야 한다. 아픈 사람이 혼자서는 살기가 정말 힘들다. 저자와 친구는 인스타그램 DM으로 찡찡대다가 ‘찡찡의 공동체’라는 말을 떠올렸다. 20대 청년이 쓴 첫 책인데 성찰과 예민한 감각이 곳곳에 녹아 있다. 질병과 아픔의 경험, 나의 이야기가 다른 아픈 사람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그렇게 아픈 사람들이 서로를 참고하면서, 이 사회에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