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범한 밥상 - 박완서 대표중단편선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3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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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타계한 박완서 작가의 중단편선 대범한 밥상이다. 박완서 선생님은 불혹의 나이에 등단한 작가로 불리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 글에도 많이 나오는 한국전쟁은 작가님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1973년 작품부터 표제작 2006년 대범한 밥상 10편이 실려 있는데 선생님만의 특유하고 생생한 문체가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정답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어머니를 따라 부처님 앞에 지성을 드리러 절에 온 나는 만수향 연기에 통증을 참지 못했다. 6.25가 터지고 좌익운동에 가담하였던 오빠는 총잡이에게 맞아 참혹한 죽음을 목도하고 아버지는 빨갱이로 매를 맞아 죽어 행방불명으로 해 버렸다. 모녀가 삼킨 죽음을 이제는 그 이야기가 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20년 동안 간직한 한을 토악질하듯이 절에 위패를 모시고 오는 길이 얼마나 편안했을까<부처님 근처>

 

세 번째 결혼 신접살림을 하게 되어 이십여 년 만에 돌아온 서울에서 동창을 만난다. 남편은 일본과 기술제휴한 전자회사 사업을 한다고 꾸며낸다. 먹을게 없던 어린 시절 동생들과 풀을 캐러 들과 산으로 헤매는 게 일과였다. 엄마는 불파마를 시키고 양공주를 시키려한다. 누나는 굶건 말건 저의 배만 채우려는 동생들을 부양하기도 싫어 서른이 넘은 신랑의 후취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자식을 낳지 못해 실패한다. 두 번째 남편인 대학 강사는 자기 기만에 빠졌고 겁쟁이에 비겁하고 거짓말쟁이었다. 부잣집 사모가 된 동창의 말에 남편이 출세하려면 일본어를 배우라고 하지만 늘지는 않았다. 일본인 관광객 안내원의(저 여러분, 이 근처부터 소매치기에 주의하십시오) 한마디를 알아듣고 고통스럽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별의별 학원들은 많지만 부끄러움은 안 가르쳤을 거다. 70년대초 가난한 우리나라였으니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난리통에 사람이 지킬 도리 같은건 짓밟히기는 했지만 여자 남자 사이에 도리는 분명하고 당당해져 있었다. 군인이냐 인민군이냐 누가 머물든 관심이 없었지만 분교에 둘다가 아닌 양코배기란 소문이 돌았다. “색시 해브 예스? 여자들만 보면 이런 소리를 했다. 노파가 화장을 하고 다홍치마와 노랑저고리로 갈아입었다. 머리엔 줄무늬 보자기를 썼다. 양코배기 차를 타고 간 노파는 무사했을까. 아낙네들은 젊은것들 몸 더럽히지 않게 하려고 그러시는 건 알겠는데 연세가 있다며 말리려 한다. 실제 있었던 이야기로 노파들은 여자였다고. 죽는 날까지 여자임을 못 면했다고 말해주고 싶다.<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

 

53년 봄, 27세의 나는 처녀의 몸으로 겁도 없이 개업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개업의다. 동란중 후송되어온 부상병을 돌본 경험과 피란 가서 선배 언니네 병원에 취직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변두리 주택가 경성상회 2층 자리였다. 아버지가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들어 있는 액자를 선물로 들고 오셨다. 아버지는 의술이 어쩌구 인술이 어쩌구 설교를 하시고 돌아가셨다. 첫 환자로 주인집 황씨의 딸의 아기를 받는걸 끝으로 소파수술만 전문으로 30년이 되었다. 사흘만 있으면 만 55세가 되고 이 일대가 도시계획에 걸려 병원을 철거해야 하는 마지막 날이 된다. 마지막으로 꼭 해보고 싶은 게 한 가지는 애기를 받아보는 일이었다. 집주인 황씨는 첫 손자를 사람백정 손에 맡길수 없다고 하였다. 원치 않는 임신이 된 소녀의 미숙아를 살리려는 나의 몸부림은 신도들 틈에 섞여 교회당으로 가고 있었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

 

집을 비우되 몸과 마음이 함께 떠났을 때, 집 걱정은 조금도 안 하고 바깥 재미에 흠뻑 빠졌다가 돌아오면 영락없이 어떤 사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걸음마를 뗀 첫애가 끓는 물주전자를 들어 엎어 화상을 입기도 하고 골절상, 낙상 교통사고, 약물중독 등 수없이 사고를 겪게 했다. 눈길에 다친 엄마의 사고에 내 식구가 아니라 친정어머니라는 것에 안도하고 기뻐했던 나를 부끄럽게 했지만 죄책감은 별로 들지 않았다. 6.25때 죽은 효자 오빠의 죽음을 떠올린다. 엄마는 마취가 깨면서 이상한 헛손질을 한다. 어머니는 나 죽거든 행여 묘지 쓰지 말거라 하셨다. 오빠처럼 한줌의 먼지와 바람으로 남고 싶으신 것인가<엄마의 말뚝2>

 

너우네 아저씨가 월남해서 처음 직업은 자물쇠장수였다. 나의 어린 눈에는 장군처럼 위대해 보였다. 피난 나올때 우리 홍씨 문중의 종손, 성표놈 하나 공부 시켜 성공하고 손 퍼뜨리는 거라던내 자식 뿌리치고 대신 델고 나온 장조카에게 버림을 받고 죽음의 문턱에 와 있었다. 그는 아들 은표의 이름을 불렀다. 은표 어머니의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는 이제야 앙갚음을 완수한 것이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게 아니라는 말이 생각이 날까<아저씨의 훈장>

 

성남댁이 3년 동안 시중을 들던 영감님이 돌아가셨다. 며느리가 곡기를 끊고 애통해 하는 것을 보고 성남댁은 먹을 수가 없었다. 2년 조금 지나서 중풍이 왔을 때 며느리인 진태 엄마는 계모로서 열세 평짜리 아파트를 주겠다고 되풀이했었다. 아파트가 팔렸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영감님이 다달이 생활비에서 한푼이라도 더 주려고 떼어 준 것으로 만족하고 그녀에게 욕 대신 가래침을 한번 뱉고 엉덩이짓만 하고 돌아선다.<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

 

시집살이 면한지 삼 년 만에 과부 되시고 며느리 보신 형님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하는 동서는 아들을 잃고 있을 때 동창들은 청첩장을 보낼까 망설이기도 했다. 명애 친구와 다른 친구의 아들을 보러 가게 된다. 차 사고로 뇌와 척추를 다쳐 하반신 마비에 치매까지 된 거였다. 동창의 모습이 노파가 되어 있었고 아픈 아들을 요리조리 굴리고 주무르는데 거들어 주려고 우리의 손이 닿자 환자가 괴성을 질렀다. ‘웬수덩어리가 또 효도하네친구의 말에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에 질투가 나고 부러워 울음이 복받친다.<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교장 선생님이었던 그녀의 남편과 별거 아닌 별거 생활이 길어졌다. 아들 딸 졸업식이나 결혼식 상견례가 있을때만 만나게 되었다. 아들의 졸업식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갈비를 먹고 러브호텔로 가자고 한다. 낡아빠진 팬티를 입고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의 정강이가 모기에 물린 자국이 무수했다. 가부장의 고단한 의무에 얽매여 있으려는 남편에 대한 연민이 목구멍으로 뜨겁게 오른다.<너무도 쓸쓸한 당신>

 

남편이 먼저 간지 삼년 만에 건강진단 결과 췌장암으로 길어야 삼사 개월 밖에 못 살거라는 진단을 받았다. 자신의 재산을 삼남매에게 어떻게 배분할까 고민하고 있다. 여고동창이 불의의 사고로 딸과 사위를 잃었다. 어린 손자와 손녀가 친할아버지 외할머니 손을 놓지 않아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친구들은 바깥 사둔의 재산을 보고 같이 사는 것 아니냐며 의중을 떠보기도 한다. 동창이 해준 호박잎쌈에 밥을 먹으면서 바깥 사둔이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유학 가 있는 손주들의 추억이 깃든 이곳을 디카에 담아 교신을 하느라 못 떠난다고 하였다.<대범한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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