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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평점 :
안은영은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어릴 때부터 보아 온 ‘퇴마사’이자 ‘심령술사’이다. 죽고 산 것들이 뿜어내는 미세하고 아직 입증되지 않은 입자들의 응집체다. 젤리 같은 응집체는 종류와 생성 시기에 따라 점성이 달랐다. 안은영은 출근 첫날부터 느낌이 있었다. 남학생 목에서 뽑아낸 동물성 물질을 보며 작게 끓는 소리를 냈다. 핸드백 속에는 항상 비비탄 총과, 무지개 색 늘어나는 깔때기형 장난감 칼이 들어 있다. 30대 여성이 이런 걸 가지고 다녀야 하나 친구들에게는 늘 ‘아는 형’이라고 놀림받는 소탈한 성격의 사립 M고 보건교사이다.
대학 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다 대학 때 따놓은 보건교사 자격증을 활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호러와 에로 중에 고르라면 단연 에로다. 이 학교에 에로에로 젤리들 말고, 사악한 무엇이 있다. 가운 안, 허리 뒤쪽으로 비비탄 총과 장난감 칼을 꽂고 보건실을 나선다.
사립 M고의 한문교사이자 학교 설립자의 손자인 홍인표는 열 페이지쯤 되는 지하실에 관한 사항을 반복해서 읽었고, 열지 말라는 것과 소독 업체도 바꾸지 말라고 되어 있다. 은영은 이상한 기운을 따라 지하실에 들어가고 땅이 연못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부터 이 연못은 정인을 잃은 젊은이들이 몸을 던지던 곳. 자살을 위장한 타살 시신이 버려지는 등 폐단이 있다. 관에서 명을 내려 흙으로 못을 메우게 했다.”
옥상 철망에 학생들이 기어오르기도 하여 막대기로 뒤통수를 후려쳐서 기절시킨다. 무엇의 머리인지는 잘 판단할 수 없는 기괴한 것이 아이들에게 찐득한 비늘이 붙어 있기도 한다. 귀신에게 비비탄을 쏘기도 한다. 은영은 인포의 양손에 한 손을 포개는 의식을 치룬다. 아주 강력한 기운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학교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둘은 힘을 합한다. 두 사람은 몇 년 새 가장 가까운 동료가 되어 있었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으며 말하지 않아도 쉽게 좋은 호흡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나 연인은 아니었다. 매주 손을 잡고 걸어도 연인은 아니었다.
다섯 살인 정현은 은영의 첫 친구였다. 미끄럼틀에서 떨어져 죽은 아이 정현이를 놀이터에서 만난다. 고3인 지형과 민우는 수능 모드에 들어가는데 여학교에서 행운의 방석을 뺏어 오기로 한다. 하필 죽은 애 방석을 들고 와서 3학년 녀석들이 통곡을 하고 있었다. 사는 것도 혼란스러운 나이에 죽어서, 미처 그 죽음의 상태에도 익숙하지 못한 채 엉뚱한 곳에 뜯겨 온 아이였다. 은영은 그런 죽음을 싫어한다. 때 이른 폭력적인 죽음. 그런 죽음을 그만 보려고 직장을 옮긴 것인데 또 보고 말았다.
조금만 더 있어, 말하고 싶었지만 은영은 칙칙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은영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는데 잘되지 않았다. 강선이 방충망에 등을 기댔다. 천천히 망 사이로 조그만 입자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나선 금방이었다.
빛나는 가루가 강선이 처음 서 있던 가로등 쪽으로 흩어졌다. 상자를 들고 달려가서 주워 담고 싶다고, 은영은 생각했지만 그러진 않았다.
대신 아주 오랜만에 울었다.p193
혜현은 승권이와 헤어지게 되었고, 참 좋은 녀석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젤리피시가 답지 않게 슬픔으로 너울거리는게 보기 안쓰럽다. 중학교 동창이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그 친구의 그림자가 없어서 죽었구나 생각했다. 학교 급식에 세균성 이질이 생기고, 서로 사귀던 여학생 커플이 집단 구타를 당하는 일이 생긴다. 두 사람 앞에 나타나는 기이한 괴물들, 학생들에게 보이는 미스터리한 현상들, 학교 곳곳에 숨어 있는 괴상한 힘들. 사립 M고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수동적이지 않고 주체적이며, 감상적이지 않고 감각적인, 아는 형 삼고 싶은 안은영. 그녀의 치명적 매력이 이 소설을 이끄는 주된 엑토플라즘이다.
독특한 소재 '퇴마사' 이야기지만 어둡지 않았고, 다른쪽에 사교성이 좋아서 친구가 없지만 언제나 발랄하고 용감한 주인공 안은영 교사 이야기를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