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나에게 - 불교철학자가 40년 동안 찾은 고독의 조각들
스티븐 배철러 지음, 이영래 옮김 / 유노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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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사십 년 넘게 고독 실천법을 탐구했다. 외딴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고, 예술 작품을 감상하거나 만들고, 명상을 실천하고, 피정에 참여하고 정신활성물질을 섭취하고 성찰의 열린 마음을 유지하고자 훈련했다. 몽테뉴, 부처, 지눌에게 받은 단단한 영감부터 뉴욕, 런던, 광양에서 가진 행복한 기억까지 기록하였다.

 

고독은 사랑처럼 대단히 복잡하며 인간 삶의 근본 차원 중 하나여서 단어 하나에 담아낼 수 없다. 나는 고독을 설명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고독을 실천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범위와 깊이를 드러내려 한다.

고독은 단순히 혼자 있는 걸 뜻하지 않는다. 진정한 고독은 보살펴 키워야 하는 존재 방식이다. 고독은 스위치처럼 마음대로 켰다 껐다 할 수 없다. 고독은 예술이다. 고독을 가다듬고 안정시키려면 정신 수양이 필요하다. 고독을 실천하려면 영혼을 돌보는 데 전념해야 한다.

 

내가 사랑하고 옹호하는 고독은, 내 감정과 사고를 내게로 되돌려 놓는 일, 나의 발자국이 아니라 욕구와 불안을 제한하고 억제하는 일, 외적인 것들을 걱정하지 않는 일, 소중한 삶을 위해 봉사와 의무에서 벗어나는 일, 그러니까 인간애에서가 아니라 인간사에서 멀어지는 일이다.

진정으로 고결한 머뭄, 신성한 머뭄, 진정한 사람이 머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삼매, 즉 들품 날숨의 마음챙김이다. 수행자는 숲이나나무 밑동, 빈 오두막으로 간다.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등을 펴고, 입과 콧구멍을 열면서, 마음챙김을 실행한다.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숨을 깊게 들이쉬며 인식한다.

스물 한 살에 승려가 되고는 십여 년간 어떤 정신활성물질도 섭취하지 않았다. 수도 생활 막바지에 한국에서 승려로 지내는 동안, 인근 농부들이 밧줄과 옷감을 만들고자 재배하는 대마 잎을 가끔 말아 피웠을 뿐이다. 수년간의 명상을 거친 나는 칸나비스 효과를 잘 통제할 수 있었다.

화가 아그네스 마틴은 수행자의 외곬수 같은 헌신으로 예술에 매진했다. 가족이나 친구일지라도 영감과 시야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장 좋은 일은 혼자 있을 때 일어난다." 그녀의 말이다아그네스는 오랜 세월에 걸쳐 하루 두 번 이십 분 명상을 했다. 결혼도 동거도 하지 않았고 자녀를 두지도 않았다고독은 그녀에게 영감의 장이었다.

광양 송광사는 이십 대 후반의 승려였던 저자가 구산 스님의 지도로 4년 동안 수도했던 곳이다. 겨울과 여름 석 달씩 매일 열 시간 동안 명상을 했다. 벽에 걸린 시계의 똑딱 거림과 간간이 수행을 이끄는 스님의 죽비 소리뿐이었다. 계절마다 열 명 남짓한 승려들이 앉아 있었지만 그때 처럼 완벽하게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

번뇌의 순간에서, 세상의 끝없는 고통에의 감수성을 키우고 다듬어야 한다. 마음챙김, 호기심, 이해, 삼매, 연민, 평정, 배려 등 다양한 기술을 아우른다. 고독 속에서 키우고 다듬을 수 있지만, 사람들과의 힘겨운 만남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가치가 없다. 항상 진행 중이라는 마음으로,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우리를 놀라게 하려고 여기 있다. 오래가는 통찰의 대부분은 방석 위에서가 아니라 방석을 떠났을 때 생긴다.

몽테뉴는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을 때는 어떤 즐거움에도 아무런 감각이 없다. 내놓을 대상 없이 혼자여서 아무런 자극이 없을 때는 즐거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에머슨은 수필 <자기 신뢰> 에서 "세상 속에서 세상의 의견에 따라 사는 건 쉽다. 고독 속에서 우리 자신의 의견에 따라 사는 것은 쉽다. 하지만 위대한 인간은 군중 속에서 고독의 독립성을 지킨다." 고독은 고독한 삶과 함께하는 삶 중에서 선택하는 게 아니라 둘 사이의 건전한 균형을 찾는 것이라 한다. 세상에 대응하기 위해, 행복하기 위해 고독해야 한다. 요즘 같은 힘든 시국에 한 권의 책이 많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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