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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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해언 언니가 살해되었다. 월드컵이 한창이던 6미모의 여고생 살인사건이라고 불렸던 비극이 벌어지고, 사인은 외부 충격으로 인한 두부 손상이다.

 

당시 용의자였던 한만우를 형사가 취조하는 모습을 다언이 상상하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형사는 한만우와 신정준을 취조할 때 외모와 가정환경에 범인이 누구인지보다 누구를 족쳐서 범인으로 만들 수 있는지, 만들어야 하는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언니보다는 평범한 얼굴에 조금 통통한 다언, 오이지 같은 얼굴, 홀어머니 동생과 사는 한만우, 말끔한 얼굴에 회계사 아버지를 둔 신정준, 입술이 붉고 예쁜 해언의 친구 윤태림, 해언의 친구이고 다언과 문예활동을 하며 [레몬과자를 파는 베티번씨] 시를 쓰던 상희 등 소설 속 인물이다.

 

신정준은 자퇴를 당하고 유학을 가버렸다. 한만우는 일곱차례의 조사를 받았고 범행을 자백하지 않는다고 두드려 맞기도 하고 혐의 없음으로 풀려났다. 이 사건은 미제 사건으로 남는다. 그 비극에 얽힌 사람들의 삶은 송두리째 달라진다. 엄마와 다언은 소문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이사를 했지만 먹는 것, 씻는 일 조차 엄두를 못낼 정도로 추락한다.

 

해언의 이름은 혜은이었는데 엄마는 그 이름을 찾겠다고 개명 신청을 하고 혜은이라는 이름에 집착을 하다가 살아 있는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혜은이 되었다. 다언이 엄마에게 준 선물이다. 돈에 벌벌 떠는 엄마가 선뜻 수술비를 대주겠다고 하여 다언은 성형수술도 한다.

 

그 사건 이후로 다언과 주변 사람들은 뭔가를 잃어버렸다. 다언만은 자신이 뭘 잃었는지 자각하고 있었다. 귀국하여 태림과 결혼을 하자고 하는 정준 둘 사이는 그리 행복하지 않은 듯 보인다. 태림의 독백처럼 상담사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는 섬뜩하다.

 

복수의 주문처럼 레몬, 레몬, 레몬이라고. 천사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다언은 한만우 집을 찾아가면서 이웃 치킨집 사장님은 일머리가 있고 착하고 일도 잘하고 좋은 사람으로 기억한다. 목발에 의지하고 있는 만우를 보고 다언은 당신 천벌 받은거야한다. 몇 번 만우의 집을 찾아가면서 여동생의 계란후라이를 같이 먹으며 친해진다.

 

어떤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어쩌면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식당 주방에서 일한다는 그들 남매의 엄마는 난쟁이였다. 선우를 좀더 가혹하게 눌러놓은 것처럼 작았다. 그 엄마를 보자 이상하게도 내가 앞으로 어디를 찾아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분명해졌다. 내가 살아갈 방향도 정해졌다. 일단 엄마에게서 독립할 것이다.(p145)

 

다언은 대학 도서관 계단에서 우연히 만난 후 십년 만에 상희 언니를 만난다. 다언이 윤태림에 대해 물었다. 상희는 동창에게서 태림은 신정준과 결혼하고 몇 년 뒤 어린 딸 아이가 유괴되었다는 얘기만 들었다. 다언은 한 남자아이가 태어나 난쟁이 엄마와 누이동생만 있는 가난한 집에서 새신을 사지 못해 직직 끌고 다니고 열두살 때부터 푼돈을 벌며 학교 다니고 열아홉살에 살인 누명을 쓰고 경찰에게 매를 맞고 이웃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학교에서 쫒겨난다. 군대에 가서 육종에 걸려 다리를 절단하고, 의병전역을 하고 세탁공장에 취직해 화상을 입으며 육종이 폐에까지 퍼져 서른살에 죽는다. 이게 신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는지 상희에게 말하고 떠난다.

 

나는 다언이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들으면서 점점 매료되었다. 그러나 나를 매료한 건 그녀가 하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 그러니까 다언의 태도였다. 다언의 말에서 나는 지독한 쓸쓸함을 느꼈는데, 그 느낌은 단순히 다언이 외로워 보인다는 차원을 넘어 다언이 고립되었다는 것,자의든 타의든 사람들로부터 격리된 상태에 있다는 것에서 왔다.(p185~186)

 

이 소설에 레몬으로 대표되는 노란빛이 있다. 레몬은 화자 다언이 친언니보다 따랐던 선배 상희가 썼던 시에 등장하는 단어이면서, 다언이 한만우 집에서 함께 먹었던 따뜻한 계란후라이의 애틋한 노란빛을 떠올리게 한다. 노란빛은 언니 해언이 죽기 직전 입고 있었던 원피스의 색깔이기도 하다. 다시 오지 않을 좋았던 시절을 상징하는 레몬의 노란빛은 다언으로 하여금 복수를 결심하게 만드는데 이 소설의 반전이 숨어 있다.

 

살인으로 시작한 추리소설을 읽고 나니 마음이 헛하다. 레몬을 읽으면서 안타까운 삶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당신의 삶이 평하기를, 덜 아프기를, 조금 더 견딜 만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당신의 평하지 못한 삶의 복판에, 아프고 무섭고 견디기 힘든 삶 한가운데, 곱고 단단하게 심어놓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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