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평전 - 강의한 사랑의 독립전사
이태복 지음 / 동녘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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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은 상하이로 망명해온 젊은 학생들을 위해 난징에서 동명학원을 설립해 어학과 유학 준비를 돕는 사업을 했고, 동명학원이 불이 나서 휴업할 수밖에 없게 되자 상하이에 청심학원을 세워 그 뜻을 이어갔다. 김광은 흥사단우였고, 이유필도 신민회 시절의 동지로서 안창호 선생의 측근으로 알려졌다. 윤 의사의 상하이 거처가 대부분 흥사단우들의 집이었다는 점 등도 백범일지의 기록대로 진행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윤봉길 의사는 백범 김구 선생의 지시대로 움직인 행동대원이 아니라, 그 스스로 혁명적인 거사를 여러 동지들과 계획하고 폭탄 확보를 위해 김구 선생에게 거사를 상의했던 것은 아닐까. p318

 

저자는 예산중학교 시절, 유인물을 통해 윤봉길 의사를 만난 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윤 열사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가 몰랐던 윤봉길 의사의 진면목을 이 책에서 알리고 싶었다. 윤봉길 사전·사후 기록들이 충분하지 않은 이유는 김구 측근들의 429일 의거 프레임 때문이다.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거사는 김구의 지시에 따른 것이고 윤봉길은 이를 수행한 인물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백범일지에서 김구 선생이 자신의 지시에 따라 윤 의사가 거사를 했다고 기록했기 때문에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고 서문에 밝혔다.

 

저자: 이태복예산중, 성동고, 국민대, 고려대 노동대학원 졸업. 사회복지학 명예박사(순천향대). 현재 국민에너지() 대표이사이다. 예산중학교 2학년 시절 굴욕적인 한일회담 규탄 시위와 윤봉길 의거일을 군민의 기념일로 제정하자는 서명운동에 참여하면서 한국 사회의 정치·경제·사회 문제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윤봉길 의사가 편저한 농민독본을 읽었을 때는 냉철한 논리 전개에 전율을 느꼈고, 어머님께 쓴 편지에 나오는 강의한 사랑이라는 말은 이후 가슴 속에 깊이 자리 잡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사회운동가의 길에서 결단을 요구받을 때마다 윤봉길 의사의 강의한 사랑을 다짐하곤 했다.

 

이 책은 윤 의사의 죽음부터 시작한다.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다루는 시간적 흐름의 기술을 뒤집었다. 시간적 배열의 역순이 독자들에게 낯선 느낌을 줄 수도 있다고 하였는데, 거꾸로 쓰였다고 해서 거부감은 없었다. 윤봉길 의사의 죽음을 높이 사는 의미에서 그렇게 쓴 거 같다. 무엇보다 책 속의 활자들이 커서 읽기에 좋았다.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축하식장에서 확실하게 던지고 확실하게 끝장내야 했다. 1932429일 윤봉길 의사는 평소에 연마해온 강건한 체력으로 준비한 폭탄 도시락과 물통 가운데 물통 폭탄을 단상에 정확하게 던졌다.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카와바타 사다지, 우에다 9사 단장, 시게미츠 공사, 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 등은 죽거나 실명, 패혈증 증세, 다리를 절단하는 사람도 있었다.

 

윤봉길 의사는 1219일 오전 6시에 기상했다. “아침식사를 할 것이냐?” 묻자 소금물로 목을 축이고 싶다고 요구했다. 윤 의사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까지를 너무 자세히 기록을 해서 가슴이 먹먹하였다. 처형 시간도 일본 대장이 숨진 시간으로 정했다니 무슨 그런 경우가 있나. 시라카와 대장이 사망한 625분경에 맞추어 사형을 집행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집행도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 시간인 오전 10시에 맞춰졌다.

 

윤 의사의 묘지도 없이 암매장을 하였는데, 전사한 일본군의 유족들이 드나드는 입구의 쓰레기를 버리는 곳에 암장해 일본인들이 밟고 다니게 하였다. 무려 13년 동안 죽은 뒤라도 내리누르려 했던 것이다.

 

윤 의사가 훌륭하다고 인정한 첫 번째 인물은 안창호 선생이다. 상하이 생활에 같이 생활도 하였다고 한다. 안창호, 김동우 다음에 김구를 거론하고 다음으로 이유필을 진술했다. 525일 사형 판결을 받았다. 안중근 의사는 형사재판을 받았고 윤봉길 의사는 군사재판을 받아서 어떤 법정 투쟁도 할 수 없었다.

 

 

칭다오에서 배를 타고 꿈에 그리던 상하이에 첫발을 내 딛는다. 193036일 충남 예산의 삽교역에서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을 다짐하며 독립운동의 본거지에 오기까지 14개월이나 걸렸다.

 

윤봉길전의 저자 김광은 본명을 쓰지 않았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가명을 많이 썼는데, 본명은 고영선으로 상하이에서 윤 의사와 열 달 동안 한 방을 쓰며 생활을 했다. 상하이 생활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과 관련된 인물들도 함께 생활한 것이다.

 

윤 의사는 상하이에 있으면서 어머니에게 가끔 편지를 썼다. 어머니는 친정집에 가 있는 사이 아무 말도 없이 부모와 처자식을 버리고 집을 떠난 아들을 원망했다. 일찍 조숙해서 한시를 짓고 야학 농민회 활동을 하는 출중한 자식인줄 알았는데 집을 떠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윤봉길이 남긴 장부출가생불환이라는 유명한 출사표 못지않게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위해 청춘을 바친 젊은이들의 정서를 잘 표현하는 강의한 사랑]은 멋진 말이다. 네 살 아들에게 쓴 편지에 너는 아비가 없는 것이 아니라(아비는)이상의 열매를 따기 위해 집을 떠나 있을 뿐이다를 강조해서 썼다.

 

윤봉길 의사는 농민야학, 월례강화, 목바리 공생 사업도 추진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나중에는 월진회라는 부흥원을 조직하였다. 열심히 활동해 매일매일 앞으로 나가자는 취지였다.윤봉길은 열다섯 살 되던해 한 살 위인 배용순과 혼인하였다. 딸 한명 아들 두명을 낳았는데 큰아들 만 살아남았다. 25세에 독립운동을 하다 숨졌지만 짧은 생애 동안 좋은 일을 많이 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한 권의 책으로 윤봉길 의사 4.29 의거를 자세히 알게 해준 저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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