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노년을 말하다
김윤식.김미현 엮음 / 황금가지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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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문학계의 거목 김윤식 선생도, 비평을 쓰기 위해선 소설을 세 번 읽는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겨우 두 번 읽고 소설에 대해 ‘평’을 하려고 한다. 젊은이의 패기라고 이해해주라고 하면 너무 뻔뻔한 짓인가.


 사르트르는 실존을 논하면서 ‘고독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할 때에만 자유의 권리를 향유할 수 있다.’라고 했다. 이 선언명제를 살짝 변주해보자. 만약 학자에게 실존을 적용시키는 것이 허용된다면, ‘고독한 습작이라는 의무를 열심히 다하지 않은 자는 결코 창의적 발상과 유창한 언어 구사라는 학문적 권리를 갖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후일에 학문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선 지금 이 순간 열심히 생각하고 치열하게 써봐야 할 것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사람은 으레 자기 스스로에 대해 가장 깊이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입장에 치우쳐 행동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진 일일수록 그에 대한 나의 관심과 애정은 성기어 질뿐이다. 때문에 아직 앞날이 창창한 이십 대 중반인 내가 벌써부터 ‘노년’에 대해 생각해본다는 것은 몹시 어색한 일일 듯싶다. 하지만 세상에 난 것은 반드시 소멸하기 마련인 것이고, 나 역시 거기에서 예외일 수 없을 것이며, 이승의 무대에서 소멸되기 전엔 반드시 ‘노인’이라는 새로운 계급장을 달고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오랫동안. 한편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들이자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인 나의 부모는 머지않아 노년의 초입에 들어서게 될 것이며, 초로에 들어선 부모의 존재는 내게 있어 결코 적지 않은 무게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지금 내가 노년에 대해, 노인성에 대해 생각해본다는 것이 그렇게 생뚱맞기만 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이 소설집에는 모두 8편의 소설이 들어있다. 하지만 8편 모두에 대한 비평(?)을 하기엔 나의 역량이 태부족할 뿐만 아니라, 8편 모두에 집중할 시간적 여유도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8편의 소설 중 뱃사람의 시야를 어둡게 하는 짙은 해무와 같은 소설 한 편만을 골라, 졸작이 될 것이 분명하지만, 글을 적어보기로 했다.

 한정희의 「산수유 열매」는 마치 수제비 국물과도 같았다. 얼큰한 맛도, 시원한 맛도 없이 그저 텁텁한 밀가루 국물 맛만 느껴지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술술 넘어가는 수제비 국물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담백하게만 읽힌 소설이었다. 읽다보니 어느 새 끝나있었다. 다 읽은 후엔‘어라, 끝나버리네.’라는 허무한 단말마가 우선 나오는 소설이었다.

 작중의 두 여자 영해와 미희는 나이 차가 적지 않다. 적게 잡아도 30년 정도의 터울은 질 것이다. 영해는 이미 두 딸 모두를 여읜 완연한 노인이고, 미희는 비슷한 또래의 노인의 큰 골칫거리일 것이 분명한 과년한 노처녀이다. 이렇게 비슷할 것 하나 없고, 아무 관련 없을 것 같은 두 여자는 엉뚱하게도 ‘젖내’ 하나 때문에 서로 얽혀든다.

 작품에서 ‘젖내’는 ‘갇혀있는 일상’, 다시 말해 평범한 가정생활의 상징이다. 평범한 가정생활은 단란하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다. 가정주부로서의 고된 일상을 모두 겪어내고 이제 졸업식만 남은 영해에게서는 지난 시절의 일상이 남긴 ‘젖내’가 희미하게나마 아직 남아있을 것이 분명하였고, 미희는 마치 부재하는 것에 대한 갈망은 더욱 더 불타오르기 마련임을 몸소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 희미한 ‘젖내’를 단박에 알아챈다. ‘젖내’를 맡은 미희는 영해에게서 인생의 앞선 시간들을 먼저 겪어낸 선배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동안 얼마나 삶에 찌들었을까하는 가엾음을 동시에 느낀다. 이런 모순된 감정은 그녀가 신부에게서 느꼈던 감정과 일부 겹친다. 미희는 신부를 3년 넘게 만나면서, 신부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의 지긋지긋한 일상 속으로 함께 빠져드는 것은 마다했다. 때문에 그녀에게서 ‘젖내’를 맡으려는 그를 강하게 몰아쳤고, 결국 그와의 만남도 아예 그녀의 삶 밖으로 몰아내버렸다. 그녀는 이렇게 ‘젖내’를 혐오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영해가 그녀에게 남긴 ‘젖내’는 그녀에게 ‘젖내’의 또 다른 면을 일깨워준다. 산수유 꽃이 만발하는 봄과 산수유 열매가 피어나는 늦가을, 그 사이의 긴 시간엔 무엇이 있을 것인가. 아마도 ‘젖내’나는 일상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영해가 주름살 제거 시술을 받으며 ‘인생의 확장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젖내’의 시간을 견뎌냈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 흑백의 풍경을 뒤로하고 천연히 빛나는 새빨간 원색의 산수유 열매를 맛보기 위해서는 일상에 갇히는 수인 생활을 마다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인생의 달콤함은 그저 오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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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반점 - 2005년 제2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이상문학상 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학사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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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의 세계에 발걸음을 디딘 지 채 1년도 안된 초짜에 불과하지만, 이제 좋은 소설과 그렇지 않은 소설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감식안은 조금 생긴 것 같다. 물론 아직 ‘좋은’ 소설의 좋음에 해당되는 범위가 협소하고, 그 좋음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짚어낼 분석력이 없어 무색하긴 하지만. 이번 글은 이런 무색함을 모면해보기 위한 첫 번째 몸부림이다. 문학 이론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특정 작가에 대해 깊이 파고 들어본 적도 없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내용에 덧붙여 더 화려하게 해주는 수사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보다 중요한 일은 소설을 읽고 나서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내밀하게 표현해 내는 일이 아닐까. 터무니없는 자신감일 지도 모르겠으나, 이 글은 그 내밀한 표현을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이다.

 책의 다른 소설들에 대해서는 모두 쟁쟁한 작가나 평론가들의 논평이 달려있어, 그들의 감상에 반박을 가하거나 그들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는 발상을 해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가공되지 않은 생생한 물 그 자체로 남아있는 한강의 <아기부처>를 첫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아기부처>는 어릴 적 화상 때문에 추악하게 쪼그라들어버린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야심찬 한 남자와 그 남자의 피부도 야망도 모두 감당해내지 못해 힘들어하는 한 여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잘 나가는 방송사의 앵커이며, 그 자리에 어울리는 치밀함과 냉철함의 소유자인 주인공의 남편은 큰 비밀을 가지고 있다. 아니 그의 몸 자체가 큰 비밀이었다. 옷 밖으로 나와 남들의 눈에 띄는 부분들을 제외하곤 그의 몸은 온통 흉악한 화상 자국으로 뒤덮여있다. 때문에 겉보기엔 그는 어느 누구도 부러울 것 없는 승승장구하는 샐러리맨인 것 같지만, 옷을 벗겨 놓으면 화상 때문에 몸을 망쳐버린 가련한 한 남자에 불과하다. 몸을 가리고 보호하는 것이 본연의 기능인 옷은 마치 그를 위해 발명된 듯 하다. 그의 몸을 가리고 보호하기 위해.

 그의 몸이 한 꺼풀만 벗겨내면 추악하고 볼품없듯이 그의 마음 역시 번지르르한 외막 안엔 한심하고 가련한 기질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그는 망쳐버린 자신의 몸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이 무섭게 상승하려고 한다. 때문에 언제나 조급하고 초조하다. 조금만 틀어져도 그는 무너진다. 평정을 잃고 만다. 마치 작은 아픔도 참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다.

 하지만 나 역시 남편 못지않은 상처를 지닌 인물이다. 어렸을 적 편모슬하에서 자라면서, 자식을 강인하게 키우는 엄한 어미 밑에서 자랐다. 예민한 사춘기를 지나면서도 어미의 따뜻한 보살핌이나 격려의 말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길러지기 보다는 차라리 훈육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가혹하게 보낸 어린 시절은 나의 성격마저 이상하게 뒤틀어버렸다. 나는 천장 한가운데 덩그러니 매달린 형광등을 보고서도 그것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하고 공포감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강박증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이토록 예민한 심성은 나의 우유부단함과도 연결된다. 타인의 반응을 지나치게 인식한 나머지 나는 타인과 관련된 그 어떠한 결정도 쉽사리 내리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한다. 그리고 자연히 내 안에만 침잠하고, 타인과 부딪히는 어떤 일도 삼가려는 자폐성을 지닌 인물로 변모되어 왔다.

 이렇게 내면의 깊은 상흔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물들이었기에 그들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삐거덕거리기 시작한다.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감싸주지 못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부터 보여주라고 강요 아닌 강요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마침내 남편이 좋은 조건의 여자를 새롭게 만나면서 완전한 파국으로 까지 치닫는다. 이렇게 그들의 관계는 거의 끝나가고, 서로가 서로에게서 벗어남을 위안으로 삼으며 새로운 출발의 계기로 삼으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의 새로운 로맨스이 얼마 가지 않아 깨져버리면서, 나는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그 동안 나는 내가 아기부처인줄 알았다. 하해와 같이 넓은 마음을 지닌 자비로운 심성의 소유자인 아기부처.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의 추악한 몸을 견디며 여태까지 지냈겠는가.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나는 그의 몸만큼이나, 아니 그 보다 더 추악한 심성을 지닌 소유자였다. 마치 아기부처를 보러 떠난 여행에서 만난 사악하고 살벌한 얼굴만큼이나 역설적이게도, 난 추악했다. 그동안의 남편과의 갈등이 실은 나 자신 때문임을 깨닫지도 못한 채 계속 남편의 탓으로만 돌렸다. 그만 죽어버린다면, 난 행복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실은 아니었다. 나에게 원인이 있었다. 나 자신 때문에 나는 힘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못난 나 자신에게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러한 나 스스로에 대한 분노는 그에 대한 연민과 이해를 의미했다. 나의 상처보단 그의 그것이 훨씬 더 깊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하루는 지난 3년간의 여느 하루와 다름없이 똑같은 일로 시작되며 마무리된다. 마치 내세의 괴로움으로부터 구원해주는 관음불이 소소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는 것처럼. 이렇게 나는 깨닫고, 그와 나는 화해하고, 우리는 서로에게 아기부처가 되어주며 또다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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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5
강성호 지음 / 책세상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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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치열한 논쟁은 역사학에서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하긴 인문학 전반에 걸친 대논쟁의 포화가 역사학이라고 피해갈 리는 만무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포스트’를 둘러싼 여느 논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나는 모더니즘 편으로 조금 기우는 듯하다. 즉, 아직 모더니즘 역사학-마르크스주의 역사학과 아날학파의 사회사․구조사가 유효하다고 여기는 편이다. 나의 이런 편향성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나 스스로도 잘 알 수 없다. 그저 예전부터 마르크스가 좋았고, 그의 책과 그를 반대하는 책을 읽은 후에도 그에 대한 호감은 전혀 변함없다. 또한 현미경을 이용해 사회에 미시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다는 망원경을 이용해 사회를 큼직큼직하게 분석하는 거시적인 관점에 훨씬 더 마음이 이끌렸다. 희한하게도. 이런 가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희극적이긴 하지만, 만약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그 사이의의 무엇 이렇게 세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과감히 모더니즘을 택할 것이고 그 노선에 입각해 학문을 할 것이다. 분명 아직 ‘이성’은 유효하고, 이성을 이용한 세계에 대한 ‘계몽’은 여전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도구적’ 이성의 맹목성과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폭력적인 ‘계몽’은 충분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포스트모더니즘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열린 자세로 겸허히 경청하는 자세가 요구될 것이다.

 역사학은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인 것이고, 따라서 역사가 변화하면 역사학은 변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변화하지 않는 역사에 대해서마저도 역사학이 스스로의 태도를 달리하는 일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추상적․관념적 진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실재를 지향해야 하는 역사학에 있어 구체성은 결코 폐기할 수 없는 중핵과 같은 것이라 본다. 따라서 아직도 세계가 마르크스를 요구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예견하지 못하고, 경제 결정론에만 집착한 속류 마르크스주의에 빠져버린 것에 대한 반성은 충분히 있어야 하겠지만,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본령은 여전히 오늘날 우리에게 유의미한 것이다. 그리고 시각을 달리해보면 현실 사회주의라는 거추장스러운 굴레가 역사의 뒤켠으로 사라졌고,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을 왜곡시켰던 주범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기계론적․결정론적인 해석이 더 이상 인정받기 못하기에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고, 그 자유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또 다른 비상을 위한 충분한 자양분이 되어 줄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선 끊임없는 자기 검열과 그 어떠한 것에도 열려있는 개방적인 자세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현실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바램은 그야말로 장밋빛 환상에 불과하고, 나를 포함한 극소수 진영의 희망에 불과하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래도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될 것이고, 희망을 버리는 순간 그것은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리라 본다. 때문에 홉스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더 나은 세상을 원한다고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완벽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공산주의를 비롯해서 대의를 주장하는 모든 이데올로기가 갖는 최악의 단점은, 너무나 고결해서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의 희생까지도 정당하게 여기는 데 있다는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지적은 옳습니다. 또한 세상에 대해서 절제된 기대감을 갖는 사람만이 끔찍한 해악을 자신과 타인에게 강요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는 지적도 옳습니다. 그러나 저는 원대한 희망과 절대적인 열정이 없다면 인간이 본래의 구실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습니다. 비록 그런 시도가 실패하더라도 말입니다.”


 나 역시도 희망과 열정을 갖고 세상에 덤비되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고, 인간과 사회에 대해 절제된 기대감만을 가져야 하겠다. 그것이 실패할지 성공할지는 그 후에 걱정할 문제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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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5
조한욱 지음 / 책세상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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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들어 급증한 역사학, 특히 역사학사, 역사학 이론에 대한 호기심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고른 책이었다. 비록 깊은 내용을 담을 수 없는 짧은 분량이 아쉬웠지만, 역사학의 탄생부터 오늘에 이르는 역사학 조류들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그것들을 도식적으로 비교․분석하여, 초심자라도 충분히 역사학의 변천사, 특히 최첨단의 역사학이랄 수 있는 신문화사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지침서였다.

 이거스의 『20세기 사학사』에서도 마찬가지였듯이, 조한욱 교수도 근대 역사학을 크게 3단계로 나누고 있다. 근대 역사학 변천사는 짧게 요약하면‘정치사에서 사회사로, 그리고 사회사에서 (신)문화사로’ 간단히 정리될 수 있다. 물론 저자도 우려했듯 이를 선형적으로 파악해 앞선 조류가 뒤이은 그것에 의해 완전히 대체되고, 이전의 그것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는 식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사회사는 물론 정치사도 엄연히 현대 역사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으며. 신문화사에 의해 정치사와 사회사의 연구 성과와 의의가 완전히 부정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치사, 사회사, 신문화사로 변천해 가면서 역사학을 위한 장비가 늘어나면서 스스로의 폭과 깊이를 넓힐 수 있는 기회가 증가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정치사에서 간과했던 부분이 사회사에 의해 보완되지만 그렇다고 정치사의 의의가 전면 부정되는 것은 아니며, 사회사와 그를 뒤이은 신문화사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저자는 책의 전반에 걸쳐 신문화사를 옹호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추구하는 사회사의 학문 정신과 맥을 같이 하지 못할 경우 ‘흥미위주의 저급한 학문’으로 퇴락해버릴 수 있다는 우려를 수미일관으로 강조하고 있다. 사회사의 기본 정신을 이어받으면서도 신문화사의 정교한 방법론을 발전시켜야만, 신문화사의 등장을 역사학의 발전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며 신문화사의 의의를 다하는 길이 온전히 열리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저자는 신문화사에 대한 의심어린 눈초리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며, 그 의심의 정당성에 대해서도 비판자들과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신문화사에 대한 비판과 의구심을 무조건 배척하려고만 하는 소극적 자세를 버리고 있다. 오히려 그는 적극적으로 비판적 시각을 수용해 신문화사에 대한 의심을 하나씩 해소시켜 주려 애쓴다. 나 자신도 신문화사와 그 배경에 깔린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적지 않은 의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저자의 친절하면서도 확신에 찬 해명을 들으면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정말 저자의 공언대로 신문화사가 자본의 논리에 놀아나지 않고 역사학을 사소화시켜 흥미만을 위한 연구 자세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면, 역사학의 시각을 넓히고 역사학에서 소외받았던 이들을 보듬어 안는데 충분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학에 있어 관점의 확대와 다양화는 곧 역사학의 발전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역사학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조류가 범람하고 있는 이 때, 그것을 적극적으로 공유하는 것은 역사학도의 기본 자세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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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 - 우리시대의 지성 5-011 (구) 문지 스펙트럼 11
주경철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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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책은 책의 내용보다도 다른 측면에서 보다  큰 의미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책은 끝까지 읽은 첫 e-book 이었다. 그동안 사실 모니터상으로는 긴 글을 읽기 힘들다는 고정관념에 알게 모르게 빠져있었는데, 이번 독서를 통해 실체가 불분명했던 그 의혹을 해소해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책을 펼쳐 들기가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컴퓨터를 통해서라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반가운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도서․출판에 관한 전문적 지식이 부재한 상황에서, 자신 있게 예상할 수는 없지만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앞으로 전자책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이용한 도서․출판이 증가할 것이다. 이와 같은 매체 환경의 변화가 예견되는 상황 하에서 전자책 읽기의 첫걸음을 떼었다는 사실은 후일 계속될 나의 독서 편력에 있어 작은 ‘사건’으로 자리매김하리라 믿는다.

 이처럼 이번 독서는 ‘사건’으로서의 독서 경험이었으나, 사실 그 내용에 있어서만큼은 ‘사건’에 걸맞는 무게를 지니지는 못하였다. 이번 책은 페르낭 브로델의 걸작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완역한 주경철 교수가 일반인들을 위해 가볍게 써나간 역사 에세이들의 모음집이었다. 페르낭 브로델, 필립 아리에스, 노베르트 엘리아스 등의 아날 학파의 거장들과 긴즈부르그 등의 이탈리아 미시사가들의 저작과 연구 결과를 일반인의 수준에서도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설명해 놓은 것이 대중을 이루었다. 이처럼 저자가 가볍게 쓴 글이지만, 역사의 문외한인 나로서는 결코 가볍게만은 읽어 넘길 수 없는 내용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나 그동안 나의 지적 호기심을 무수히 자극했으면서도, 자세한 실체를 드러내 보이지 않아 나를 감질나게 만들었던 페르낭 브로델의 ‘장기 지속’개념을 감싸고 있던 흑의 장막이 주경철 교수의 쉬운 설명으로 어느 정도 걷힌 것은 유쾌한 지적 경험이었다. 또한 주경철 교수 역시 매우 창발적이면서도 설득력있는 역사 이해의 방법이라 논평한 ‘근대-시장-자본주의’의 피라미드식 삼단계 구조는 페르낭 브로델이라는-주경철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20세기 역사학의 슈퍼스타에 대한 경외감을 한층 더 드높이는 동시에 그의 저작에 대한 독서욕을 가일층 자극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편,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등 아날 학파를 대표하는 걸작들에 대해서도 한 눈에 들어오는 짤막한 설명과 맛깔나는 논평이 함께 곁들여져 그 책들에 대한 유혹을 점점 더 뿌리치기 힘들게 만들어벼렸다.

 이와 동시에 이탈리아 역사가들이 주도했던 미시사라는 새로운 역사적 흐름과 그 세찬 흐름의 퇴적물로서 역사학의 하구에 고이 쌓인 『고양이 대학살』,『치즈와 구더기』등의 저작도 앞서 언급한 아날 학파의 걸작들과 동등하게 서술함으로써 거시사에만 쏠렸던 나의 역사학적 안목을 어느 정도 바로잡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역사학의 매력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해준 이번 책이 무조건 유쾌했던 것만은 아니다. 책의 내용이 대부분 서구 역사학과 역사가들로 채워졌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대 역사학 역시 서구의 학계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다른 학문들과 별 다를 바가 사정이다. 이러한 상황은 ‘역사학을 한다는 것은 곧 서양사를 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서구의 밖에서 서양사를 한다는 것은 무슨 의의가 있을까.’ ‘과연 국내에서 서양사를 하면서 학자로서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등의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게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역사학을 포기하겠다는 뜻은 전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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