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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철학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 ㅣ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8
이영호 지음 / 책세상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서두에서 지은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역사철학에 관한 지은이의 생각을 정리해 놓은 글이다. 따라서 역사철학에 대한 본격적인 입문서라고 할 수는 없으나, 결코 가벼이 넘길 수만은 없는 역사철학적 주제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나 자신이 역사철학에 대해서는 무지렁이와 다를 바 없는지라, 어느 한 단락, 어느 한 페이지 쉬운 부분이 없었다. 한 번 읽고서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든 구절들이 수두룩했으며, 그 구절들이 요구하고 있는 수준의 사유는 끊임없이 끼어드는 잡념 때문에 순조로이 진행될 수가 없었다. 특히나 네 번째 장 ‘철학적으로 훑어본 인간의 역사’는 지루하기도 했거니와 전체 분량의 삼분의 일도 채 이해 못했다고 했을 정도로 난해했다. 역시나 주제가 무엇이든 철학적 관점 하에서 쓰여진 글은 내게 너무 버거운 것 같다. 이러다 철학 공포증이 고질병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지.
그러나 다행히도 전반부의 세 개의 장에 서술된 내용들은 이해하는 데 큰 무리가 없었고, 우연성과 필연성에 관한 단락처럼 매우 이채로우면서도 흥미로운 부분들 역시 적지 않았다. 허나 그 흥미로움에도 불구하고 지은이의 전반적인 생각에는 결코 동의하기 힘들었으며, 때로는 그의 학문적 견해가 신체적 나이에 따라 노화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건방진 생각까지 들곤 했음을 미리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나의 다소 과도한 반감은 머리말에서부터 시작해 누차에 걸쳐 반복되고 있는 ‘진리’와 ‘과학’ 등에 대한 관점에서 비롯되었다.
저자는 역사에 있어 진실은 실존하기 마련이며, 역사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민중을 위한 진보적 역사의식을 가지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려는 자세가 필수불가결하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역사의 진실이란 인식 주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정체불명한 것, 즉 불가지적인 것이며, 역사학은 과학이 아니 허구(픽션)에 가까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니체 이래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졸지에 허무주의자가 되고, 그들의 주장은 견해가 아니라 강변이 되고 만다. 하지만 내 생각엔 오히려 저자의 견해야말로 답답스러울 정도의 억지로 일관하는 강변인 것 같다. 저자는 아마도 피억압자인 민중을 위해서는 역사의 진실을 반드시 밝혀야만 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최근의 상대주의적 혹은 허무주의적 관점과는 절연한 채 진보적 관점으로 무장된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야 한다고 여기는 모양인데, 이는 결코 학문적인 태도라 할 수 없다. 이는 학문의 탈을 쓴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다. 베버에 의하면 학문의 연구 과제와 목적 설정은 당연히 가치연관성을 띌 수밖에 없을지라도, 구체적인 연구 수행의 과정에 있어서 만큼은 반드시 몰가치적이어야 한다. 이에 비춰보면,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학문의 필요성을 자각한 태도는 충분히 평가받아야 하겠으나, 그 목표를 달성하기위해 무조건 민중의 편에 서서 자칭 ’과학적‘이라는 연구 방법으로 역사를 파헤치고, 거기서 최종적으로 발굴된 것만이 역사의 진실이라고 여기는 태도는 학자로서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니라 하겠다. 정치․사회적으로는 누구보다 열렬한 사회주의자였으나, 학문에 있어서 만큼은 정치적 선입견을 철저히 차단한 채 오로지 실재적 사실에 대한 기술과 해석을 최우선시했던, 그래서 본인의 정치적 입지와 배치되는 결론까지도 과감히 발표했던 영국의 사가 E.P.Thomson 의 경우는 그 자체로 저자에 대한 충분한 꾸짖음이 되리라 생각된다. 설령 민중을 위한 역사를 축성해내겠다는 결연한 의지에서 비롯되었을지라도, 진실과 과학이 민중의 편에 독점되는 것이 옳은 것일수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한편 절대적 진실을 강조하고, 객관적 과학의 가능성을 전혀 의심치 않으며, 확고한 주체의 위상을 중요시하는 저자의 관점은 의아스러운 정도를 넘어 놀랍기까지 할 정도이다. ‘아직도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지식인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놀라움이 절로 터져 나올 정도이다. 상대주의적 진리관, 과학의 객관성이라는 신화의 붕괴, 주체에 의한 타자 배제 논리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 등이 이미 흥건히 스며들어 있는 오늘의 지적풍토에서 돋보일 정도로 근대성을 신뢰하는 저자의 태도가 의아스러울 정도이며, 최근의 상대주의․해체주의적 지적 경향을 철저하게 무시해버리는 자신만만함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가 궁금할 정도이다. 하지만 학문적 견해와 태도란 것이 본디 타자의 입장에서 물고 늘어지자면 끝이 없는 것이고, 일단은 그것에 대한 평가는 유보한 채 내적으로 얼마나 일관되고 탄탄하게 스스로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가를 미리 살펴야 하는 것이니, 그의 완고한 근대주의적 태도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일단 접어놓아야 할 부분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