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 - 우리시대의 지성 5-011 (구) 문지 스펙트럼 11
주경철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이번 책은 책의 내용보다도 다른 측면에서 보다  큰 의미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책은 끝까지 읽은 첫 e-book 이었다. 그동안 사실 모니터상으로는 긴 글을 읽기 힘들다는 고정관념에 알게 모르게 빠져있었는데, 이번 독서를 통해 실체가 불분명했던 그 의혹을 해소해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책을 펼쳐 들기가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컴퓨터를 통해서라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반가운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도서․출판에 관한 전문적 지식이 부재한 상황에서, 자신 있게 예상할 수는 없지만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앞으로 전자책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이용한 도서․출판이 증가할 것이다. 이와 같은 매체 환경의 변화가 예견되는 상황 하에서 전자책 읽기의 첫걸음을 떼었다는 사실은 후일 계속될 나의 독서 편력에 있어 작은 ‘사건’으로 자리매김하리라 믿는다.

 이처럼 이번 독서는 ‘사건’으로서의 독서 경험이었으나, 사실 그 내용에 있어서만큼은 ‘사건’에 걸맞는 무게를 지니지는 못하였다. 이번 책은 페르낭 브로델의 걸작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완역한 주경철 교수가 일반인들을 위해 가볍게 써나간 역사 에세이들의 모음집이었다. 페르낭 브로델, 필립 아리에스, 노베르트 엘리아스 등의 아날 학파의 거장들과 긴즈부르그 등의 이탈리아 미시사가들의 저작과 연구 결과를 일반인의 수준에서도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설명해 놓은 것이 대중을 이루었다. 이처럼 저자가 가볍게 쓴 글이지만, 역사의 문외한인 나로서는 결코 가볍게만은 읽어 넘길 수 없는 내용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나 그동안 나의 지적 호기심을 무수히 자극했으면서도, 자세한 실체를 드러내 보이지 않아 나를 감질나게 만들었던 페르낭 브로델의 ‘장기 지속’개념을 감싸고 있던 흑의 장막이 주경철 교수의 쉬운 설명으로 어느 정도 걷힌 것은 유쾌한 지적 경험이었다. 또한 주경철 교수 역시 매우 창발적이면서도 설득력있는 역사 이해의 방법이라 논평한 ‘근대-시장-자본주의’의 피라미드식 삼단계 구조는 페르낭 브로델이라는-주경철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20세기 역사학의 슈퍼스타에 대한 경외감을 한층 더 드높이는 동시에 그의 저작에 대한 독서욕을 가일층 자극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편,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등 아날 학파를 대표하는 걸작들에 대해서도 한 눈에 들어오는 짤막한 설명과 맛깔나는 논평이 함께 곁들여져 그 책들에 대한 유혹을 점점 더 뿌리치기 힘들게 만들어벼렸다.

 이와 동시에 이탈리아 역사가들이 주도했던 미시사라는 새로운 역사적 흐름과 그 세찬 흐름의 퇴적물로서 역사학의 하구에 고이 쌓인 『고양이 대학살』,『치즈와 구더기』등의 저작도 앞서 언급한 아날 학파의 걸작들과 동등하게 서술함으로써 거시사에만 쏠렸던 나의 역사학적 안목을 어느 정도 바로잡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역사학의 매력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해준 이번 책이 무조건 유쾌했던 것만은 아니다. 책의 내용이 대부분 서구 역사학과 역사가들로 채워졌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대 역사학 역시 서구의 학계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다른 학문들과 별 다를 바가 사정이다. 이러한 상황은 ‘역사학을 한다는 것은 곧 서양사를 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서구의 밖에서 서양사를 한다는 것은 무슨 의의가 있을까.’ ‘과연 국내에서 서양사를 하면서 학자로서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등의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게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역사학을 포기하겠다는 뜻은 전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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