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이 이야기는 9:27에서 이어진다. 그곳에서 아달랴의 아들아하시야왕은 예후에게 죽임을 당했다. 아하시야의 아들들을 모두죽이려 한 아달랴의 시도는 허사였다.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태어날 것이라고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삼하 7장).
- P655

11:2-3 여호세바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였으므로 성전은 아기 요아스를 숨기기에 적당하고 자연스러운 장소였다. 우상 숭배를 행한 아달랴는 성전에 관심이 없었다. - P655

12:20 요아스에 맞선 신복들의 반역의 이유는 역대하 24:17-26에 기록되어 있다. 요아스는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했고 예언자 스가랴를 죽였으며 아람 군대에 패했다. 요아스가 하나님에게서 돌아서자 그의 인생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신복들은 요아스가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에 죽인 것이 아니라, 나라가 통제 불능이었기 때문에 그를 죽였다. 결국 요아스왕은 악한 사람들에게 죽임을당한 악한 사람이 되었다. - P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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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라는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는, 정권을 잡았다. 그녀는 먼저 왕족을 모두 죽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호람 왕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죽을 운명에 처한 왕자들 중에서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몰래 빼냈다.  - P444

그녀가 아달랴를 피해 요아스와 그 유모를 은밀한 곳에 숨겨서, 요아스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요아스는 여호세바와 함께 육년 동안 하나님의 성전에서 숨어 지냈다. 아달라는 그가 살아 있는줄 모른 채 나라를 다스렸다. - P445

4 칠 년째 되던 해에, 여호야다가 사람을 보내 경호대 지휘관과 왕궁호위대 지휘관들을 불렀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여호세바를만났다. 여호야다는 그들과 언약을 맺고 비밀을 엄수할 것을 맹세하게 한 뒤, 어린 왕자를 보여주었다. - P445

12 그때 제사장이 왕자를 데리고 나와 그에게 왕관을 씌우고, 하나님의 언약이 담긴 두루마리를 준 뒤에 그를 왕으로 세웠다. 그에게 기름을 붓자, 모두가 손뼉을 치며 "요아스 왕 만세!"를 외쳤다. - P445

"여호야는 하나님과 왕과 백성 사이에 언약을 맺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왕과 백성 사이에도 따로 언약을 맺었다.
- P446

백성은 바알 신전으로 몰려가 그 신전을 허물고, 제단과 우상들을 산산이 깨뜨려 부수었다. 제사장 맛단을 제단 앞에서 죽였다.
- P446

그런 다음 여호야다는 하나님의 성전에 경비병들을 배치했다. 그는경호대 지휘관과 왕궁호위대 지휘관, 그리고 백성과 함께 왕을 호위하여 하나님의 성전에서 내려와 호위대 문을 지나서 왕궁으로 들어갔다. 왕이 왕좌에 앉자 모두가 기뻐했다. 무리가 아달랴를 왕의검으로 죽인 이후, 그 도성은 안전하고 평온한 곳이 되었다.
요아스가 왕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 일곱 살이었다. - P446

제사장 여호야다의 가르침을 받은 요아스는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다. (그럼에도 다산 산당들은 제거하지 않아서, 백성이 여전히 그곳을 찾아 제사를 지내고 향을 피웠다.
- P446

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지시했다.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오는 거룩한 현금, 곧 의무적으로 바치는 헌금과 자원하여 바치는 헌금을잘 계산하여, 성전 안에 파손된 곳이 있거든 그것으로 보수하시오."
그러나 요아스가 왕이 된 지 이십삼 년이 지나도록 제사장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성전은 전에 없이 황폐해졌다.
- P446

 또한 이 사업에 쓰는 돈을취급하는 사람들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없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정직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보상 제물과 속죄 제물로 지정된 헌물은 건물 사업에 들어가지 않고 바로 제사장들에게 갔다. - P447

17-18이즈음 아람 왕 하사엘이 용감히 나아가 가드를 공격하여 그곳을 점령했다. 그는 내친김에 예루살렘도 치기로 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유다 왕 요아스는 모든 신성한 기념물-조상인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거룩한 용도로 바친 예물, 자기 자신이받았던 거룩한 기념물, 성전과 왕궁 창고들에 있는 모든 금까지모아다가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냈다. 하사엘은 만족하여 자기 길로갔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지 않았다. - P447

성벽의 진입로를 거닐고 있는 요아스를 암살했다. 암살자들은 시므앗의 아들 요사갈과 소멜의 아들 여호사바드였다. 요아스는 그렇게죽어서 다윗 성의 가족 묘지에 묻혔다. 그의 아들 아마샤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 P448

유다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이십삼년에, 예후의13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십칠 년 동안 다스렸다. 그는 이스라엘을 죄악된 삶으로 끌어들인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을 그대로 밟았다.  - P448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 치우치는 법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한결같이 악하게 살았다. 하나님께서 크게 노하셔서, 이스라엘을 아람왕 하사엘과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넘기셨다. 그들의 지배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 P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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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세미나는 마태오 복음서 4장 1~11절과 루가 복음서4장 1~13절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검은색으로 판단했다.
이 단락들이 거의 혹은 완전히 지어낸 이야기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 P70

기억과 전설은 쉽게 분리할 수 없다. 허구라는 잡초를 제거하려 할 때 우리는 그 외 다른 많은 것까지 뽑아버릴 수 있다.

마르코는 반복해서 시편 22편과 69 내용을끌어 온다. 여기서 테르툴리아누스Tertulian와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섭리의 손길을 보았지만, 많은 비평적 학자는 마르코 복음서 저자와 그 이전 그리스도교인들의 창의적인 손길을 발견했다.  - P72

크로산은 수난 이야기가 "역사화된 예언"이라고 주장한다. 기억의 산물이 아니라, 유대인 경전에서 도움을 받아 만든 상상의 산물이라는것이다. - P72

예수 세미나는 마르코 복음서 15장 내용 중 99%가 검은색이라고 판단했다. 정말 이 이야기는 예수 세미나의 주장처럼정경의 분량을 늘린 하나의 예에 불과한가? 그저 이야기 형태를 취한 교회의 신학일 뿐일까? 마르코 복음서의 마지막두 장이 나오기 전에 역사적 예수는 사라진 걸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 P73

마태오 복음서에 기록된 산상설교가 예수의 정신을 충실하게 드러낸 것이 맞다면(분명히 맞다) 마르코 복음서 15장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예수의 정신을 충실하게 드러낸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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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실 정보를 기록하는 타키투스의 능력은 최고였다.  - P22

그러므로 우리는 타키투스의 『연대기』(Annals)에 나오는 초기 기독교인에 대한 설명과 그것을 이루고 있는 명백한 사실들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옥스퍼드 고전 문헌 안내서』(Oxford Companion to Classical Literature)를 인용하자면, "연대기는 특히 타키투스를 가장 위대한 역사가 중 하나로 드러내고 그가 인물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당대의 중요한문제들에 대한 냉철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P22

라틴어 ‘크리스투스‘는 단순히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크리스토스‘(Christos)를 음역하여 바꿔 쓴것인데, 이는 히브리어 ‘메시아‘ (Messiah)와 같은 말이다. 메시아가 많은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던 약속된 구원자였듯이,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이름은 약속된 유대교의 구원자가 왔음을 믿는 이 집단의 신앙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준다.  - P29

기독교가 유대교의 요람에서 발생했다는 것과 시간을 더 거슬러 가면 갈수록 기독교의 모든 기록이 매우 유대적이라는 사실을 앞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유대인들의글을 고려하지 않고서 이 공동체가 가진 신앙의 특정 요소들을 추측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P29

 타키투스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티베리우스가 황제로 있는동안인 주후 14년과 37년 사이에 처형당했음을 말해준다. 게다가 그는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를 다스리고 있었을 때인 주후 26년과 36년 사이에 이 일이 발생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타키투스는 우리에게 기독교를 탄생시킨 사건에 대한 대략적인 기준점을 제공해주는 셈이다. - P29

타키투스는 주후 64년 대화재 당시 로마에 많은 기독교인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는 그 문서에서 ‘무수한 사람들‘을 뜻하는 ‘멀티투도 잉겐스‘(multitudo ingens)라는 라틴어 표현을 사용한다. 기독교는 정말 멀리까지 퍼졌음이 분명하다.  - P30

게다가 타키투스는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얼마나 잔인하다루었는지, 그리고 기독교인들 대다수가 자신들이 믿었던 종교 때문에 어떻게 죽임당했는지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 P30

그러므로 우리는 타키투스로부터 기독교가 멀리, 그리고 빠르게 퍼져나갔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기독교의 시작과 로마의 대화재 사이의 기간은 40년 미만이었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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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라틴어 ‘피데스‘ (fides)에서 온 ‘신앙‘ (faith)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신뢰‘ (trust)라는 표현에 더가까운 의미였다. 물론 신뢰는 증거에 기초한다. - P15

물론 사복음서는 예수를 약속된 구원자로 믿는지지자들에 의해 기록됐다. 그러므로 그들은 공정한 기록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키우려는 목적을가진 자들이라는 점에서 편견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 P19

그렇다면 문제는 복음서 저자들이어떤 목적(agenda)을 가졌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정확하게 보도했느냐에 관한 것이다.
- P20

하지만 일부 자료 중에는 기독교를 지지하려는 편견이들어가 있지 않은 것도 있다. 이러한 자료에는 비기독교 저자들의 글이 있다. 이들은 기독교의 기원으로부터 90년 이내에 글을 써서 우리에게 연구할 수 있는 기록들을 남겨주었다. 우리는 세 명의 저자들(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CorneliusTacitus], 소 플리니우스(Pliny the Younger],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Josephus])을 살펴볼 것이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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