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 말로 지리산 10경에 노고운해, 반야낙조라고 했는데그리 급할 것 없잖겠소?" 아주 느긋한 박두병의 말이었다. "말이야 필경 그렇제라. 근디, 날이 은제꺼정 요래 말끔하다는 보장이 없는디라? 지리산 칠팔월이야 요리 깨끔허다가도 은제 먹구름 깜깜하게 찔란지 몰르는 일 아니겠는가요?" - P459
물줄기는 장애물들을 만날 때마다 부딪치고, 깨지고, 부서지고, 휘돌고, 솟구치고, 나뒹굴고, 처박히고, 맴돌이질 쳤고, 그러면서도 흩어지거나 멈추지 않고 하나로 뭉쳐 끝끝내 목적하는곳까지 도달하는 것이었다. 아아, 저 물의 흐름은 혁명의 과정과 같지 않은가! 혁명에는 그 얼마나 장애가 많던가. 그 장애를 무너뜨리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가. - P453
빨치산에게 술이 극약인 것이야 하늘 천・따 지고, 고것얼 귀 닳게 갤친 사람이 바로 김지회 동진디, 그때 고것이 허방인지 착 알아묵고 그 백여시 꼬랑댕이럴 잡아챘어야 헐 것인디, 와하! 무신 잡귀가 씌었든지 그러덜 못허고 그 백여시 꾀에 넘어가술얼 받아묵고 말었소. 그러니 워찌 됐을 것이요. 몸언 곤헌디다가빈속에 술이 들어간 판이니 관우 아니라 장비가 당허겄소? 보초도 멋도 없이 다 곯아떨어져쁜 것이제라. - P457
근디, 알고 보면 술얼 마시기도 전에 또 한 가지 속힌 것이요. 고것이 먼고 허니, 낭구가 안몰랐다고 혀서 생솔가지럴 때게 냅둔 것이요. 생솔가지럴 때먼 내가 을매나 지독스럽게 나오요. 고것이 바로 신호였드란 말이요. 그내럴 보고 아랫동네서 두 놈이 토벌대헌테 연락얼 취헌 것이요. 토벌대가 들이닥쳤는디, 더 말혀서 멋 허겄소. 그 자리서 열여섯이 죽고, 일곱이 달아나다가 잡혔는디, 결국에는 다 총살당혔제라, - P457
선원의 말은 단순한 체험담이아니라 살아 있는 투쟁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귀한 경험자들에 의해 투쟁사는 이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그런 생생한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엮고 싶은 의욕을 느끼고 있었다. - P458
한낮의 해는 작으면서 맵고 거만했는데, 저물녘의 해는크고 부드럽고 친근했다. 노고단이 장만해 놓은 하늘은 사람의 눈으로는 감당해낼 수 없도록 넓고도 넓었다. 그 서쪽을 물들인 휘장만으로는 모자라는 것인지 해는 무슨 큰 깃털들처럼 옆으로 뻗친 구름층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얇고 가볍게 뜬 구름들도 층층이 붉게 물들어 찬란한 색조로 빛나고 있었다. - P460
그러면서 황적색이 적색으로 변해 하늘은 더욱 붉은빛으로 칠해졌다. 그 진해진 붉은빛은 이제 불길이 아니었다. 불길이 잦아든 그 진한 붉은빛은 환상적인 핏빛이었다. 하늘은 처연한 핏빛으로 물들어 침묵하고 있었다. - P461
아, 저건! 손승호는 가슴을 쳐오는 충격을 느꼈다. 저건……… 지리산에서 죽어간 수많은 동지들의 넋이 아닐 것인가! 한이 아닐 것인가! 그 생각이 들자 그는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을감았다가 한참 만에 떴다. 노을은 그대로 핏빛인 채 가장자리가 적보랏빛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듯 웅장하고 장엄하고 기 질리는 노을을 여지껏 본 적이 없었다. - P461
그런데 노고단은 하늘을 있는 대로 다 열어주고는, 그 넓은 하늘에 해가 그려내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찬란하고, 가장 황홀한 그림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던 것이다. 안개가 골짜기를 자욱하게 채운 산중턱에서 해돋이 직전의 아침노을을 보며 솥뚜껑은 그런 경치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고 했었다. - P462
동쪽에서 제일 높은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아야 한다고 천왕일출이라고 했고, 서쪽에서 제일 높은 반야봉에서 낙조를 보아야 한다고 반야낙조라고 한 겁니다. - P464
그리고 사실 높이가 250미터나 차이나는 반야봉의 낙조와 노고단의 낙조가 같을 수가 없지요. 높이250미터 차이에서 오는 서쪽의 전망이 달라지니까요. 높을수록 더멀리, 더 넓게 보일 수밖에 없는데, 오늘같이 맑은 날이면 반야봉에서는 바다 가까이까지 보입니다. 그 낙조를 즐긴 옛사람들의 관찰이 예사는 아니었지요." - P464
요 샘물 찾어 구빨치털이 여기에다 트럴장만하는 것이야 당연지사 아니겠소? 이 골짝, 저 골짝으로 빠지기도 좋고, 붙기도 존 고지이기도 허고. 그래께 개덜이 우리 잡겠다고요 넓은 노고단에다 싹불얼 질러뿌렀소.잡녀러 새끼덜, 일본놈덜언 천왕봉아래장터목에 산신령을 넘어뜨려 골짝으로내리굴리등마, 인자 친일민족반역자덜언 명산 꼭대기에 불얼 질르고 염병 지랄이요." - P465
보초를 안 서도 되는 밤을 손승호는입산하고 처음 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총을 겨드랑이에서 떼어놓지는 못했다. 지리산의 별들을 올려다보고 누워 오랜만에 집생각을 하다가 그는 깜빡 잠이 들었다. - P466
동쪽 하늘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아침노을이었다. 어제 본 저녁노을보다 붉은 기운이 더 진하고 넓게 퍼져 있었다. 황금빛 찬란함이 덜한 대신에 붉은 기운은 펄펄 살아서 넘치고 있었다. 아침의 해맑은 대기와 함께 그 붉은 기운은 풋풋한 생명력으로 부풀고있었고, 싱싱한 활력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어제의 저녁노을에서느낄 수 없었던 꿈틀거리고, 용솟음하는 것 같은 생동감이 어디서생겨나는 것인지 손승호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 P468
해는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불덩어리였다. 어제의 해가 불덩어리는 불덩어리이 타는 것을 정지한 불덩어리였는데, 아침의 해는일렁거리는 불길을 온몸에 달고 이글이글 타고 있는 불덩어리였다. 그래서 어제의 해는 정교하게 동그랗고 그 색깔도 붉은기 섞인 황금빛이었는데, 지금의 해는 정교함이 없는 동그라미이면서 그 색깔은 눈이 시린 순황금빛이었다. - P469
그것은 혁명이다. 역사의 해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 혁명은 역사의 해다. 해는 세상 만물에게 평등한 생명을 부여하고, 모든 인간에게 평등한 삶을 보장한다.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인간으로 태어나 한목숨 바쳐 해볼 만한 일이 아닌가. - P470
"지리산은 너무나 크고 넓어 어느 지점에서도 한꺼번에 볼 수가없소. 천왕봉에서 이 노고단까지만 해도 100리가 넘소. 그러니까지리산은 부분적으로 볼 수밖에 없고, 그 부분도골짜기 중심으로나눠서 봐야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소. - P475
"와따메, 택도 없소. 지리산서 포도시 사오 년 살아갔고 지리산아흔아홉 골짝얼 지가 무신 수로 다 안당가요. 말이 시무 개제, 한골짝에도 샛골짝이 쌔고 썼고, 그 샛골짝이 또 새끼럴 쳐서 수십개가 되는 판인디워떤 장사가 고것얼 다 알 것이요. 세석평전에 약초캠시로 평상얼 지리산서 사신 영감님이 기신디, 그 영감님 말이자기도 골짝 골짝얼 다 몰른다고 그럽디다. 긍께로 나 겉은 것이야반봉사로 그냥 둔전기리고 댕기는 것이제라." - P477
"저기 바로 내려다보이는 게 피아골이오. 그리고 저 산들 사이로멀리 보이는 물줄기가 섬진강이고." 박두병이 손가락질하며 설명했다. "그럼 저 멀리 솟은 게 백운산인가요?" 손승호는 정면을 가리켰다. "잉, 딱 맞쳐뿌렀소!" - P479
"날씨가 빨치산얼 신선 맹글어주네. 신선은 구름 속에산당께로, 신선이 따로 있간디. 우리가 신선이제" - P480
지리산은 산이 산을 품고, 산이 산을 업고, 산이 산을 거느리고있는 그 크기도 모양새도 쉽사리 알 수 없는 미궁의 산이었다. 이것은 손승호가 배낭을 벗으며 한 생각이었다. - P481
오히려 빨치산으로 완성되어 가는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빨치산은 온갖 투쟁에서 불가능이 없는 존재여야 했던 것이다. - P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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