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학문하기를 즐기고사소한 예절에는 구애받지 않았으며 풍류와 학문이 동년배의 마음을쏠리게 했다. 과거에 합격하기 위한 사소한 문예는 익히지 않았으며, 국가의 일을 담론할 적에는 말이 거침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권람더러 ‘백의 재상‘이라 부르기도 했다. - P70
권람은 첩에게 미혹된 아버지 권제가 어머니를 소홀히하자 울면서호소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도리어 아들을 때렸다. 상처받은 권람은 집을 나와 여행길에 올랐다. 그때 동행한 이가 망형교忘形를 맺은 한명회였다. - P70
권람은 1450년(문종 즉위) 정인지가 관장하는 문과에 합격했다. 이날한밤중에 문종이 향시 · 회시에서는 모두 으뜸, 전시에서는 4등을 차지한 권람의 대책을 가져오게 했다. 당시 그는 "옛날 신돈이라는 중 하나가 오히려 고려 500년의 왕업을 망치기에 충분하였는데, 하물며 이 두중이겠는가"라며 신미·학열 무리를 극력 비난했다. 문종은 "권람이 회시에 장원을 하였고 또 본래 명성이 있었는데, 이제 대책을 보니 또한훌륭한 작품이다. 권람을 장원으로 삼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의견을냈고, 그에 따라 1등으로 올렸다. - P71
한명회는 절친 권람이 문과에 합격한 후에도 여전히 백수로 있었다. 한명회가 그나마 벼슬 한자리를 얻게 된 때는 1452년(문종 2)이었다. 이때 태조가 왕이 되기 전에 거주했던 개경의 옛집인 경덕궁의 궁지기로겨우 임용되었다. 할아버지 한상질이 1393년(태조 2) ‘조선‘ 국호를 정하는 데 이바지한 덕분에 특채된 것이었다. - P71
현 정치 상황에 대한 수양의 불편한 뜻을 확인한 권람은 한명회를 소개했다. - P73
권람을 매개로 수양과 한명회가 결탁했다. 끈끈한 관계가 형성되는순간이었다. 이때 수양은 35세, 권람은 그보다 한 살 위, 한명회는 권람보다 한 살 위로 수양과는 두 살 차이였다. 셋 모두 피가 철철 끓는 중년의 남자들이었다. 수양과 한명회가 직접 만난 때는 1453년(단종 1) 3월 21일이었다. 수양은 처음부터 그를 오랜 친구와 같이 여겼다. - P74
신숙주신숙주는 경상도 고령현 사람으로, 공조 우참판에추증된 영의정 신장의 아들이었다. 1439년(세종21) 문과 제3인으로 뽑혀집현전 종6품부수찬· 정4품 응교를 거쳐 단종 대에 직제학에 이르렀다 - P75
수양이 신숙주와 뜻을같이했다는 것은 세종대 집현전을 통해 성장한 여타 학자 관료의 지지를 끌어 낼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 점에서 신숙주의 합류는 수양에게 큰 힘이 되었다. - P76
홍윤성홍윤성은 충청도 회인현 사람으로 1450년(문종 즉위)문과에 급제한 인물이었다. 문신이지만 무재가 뛰어났다. 문종이 수양으로 하여금 진서를 편찬하는 일을 관장하게 했을 때 권람과 함께낭좌로 참여했다. - P76
홍윤성은 한명회보다도 앞서 수양의 사람이 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 먼저 수양을 찾아갔다. 수양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처자를 잊고사직을 위해 죽을 것‘을 다짐받았다. 둘은 이후 같은 배를 탔다. - P77
이튿날밤 김종서가 사람을 시켜 홍윤성을 불렀다. 이현로와 아들 김승규를 모두 내보낸 후 자신이 고시관으로서 홍윤성을 뽑았다며 문생인 그를친자식처럼 여긴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양을 섬기지 말고 안평을 섬기라 권유하며 그 징표로 활을 주었다. 홍윤성은 이 호의에 거짓으로 응하는 체하며 활을 받아 물러났다. 그러나 결국 수양의 뒤에 줄을 섰다. - P77
내금위 무사인 이들이 수양에게 협력하게 된 것은 김종서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앞서 1451년(문종 1) 5월 6일 김종서는 내금위 인사를두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내금위는 본디 정밀하게 뽑아야 하는데 근래에는 혹 알맞지 않은 자가 있다"며 문제를 지적했다. 그래서 문종은무반의 일을 아는 김종서를 시켜 내금위 간택을 관장하게 했다. - P77
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홍달손의 임무는 도성을 순찰하는 순라를 감독하여 허술함이 없도록 하는 감순이었다. 감수의 합세는 도성의 출입을 장악할 수 있다는 의미로 순졸 수백 인을 얻는 효과와 맞먹는 것이었다. - P78
수양이 그런 꿈을 꾸었는지 누가 알 수 있으랴! 하지만 《세조실록》총서에서는 특히 날짜를 특정해 꿈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대군 신분의 수양에게 ‘큰 욕심‘을 이루라며 권유한 노인을 등장시킴으로써 대군 그 이상으로 부상하리라는 예언을 해놓은 것이다. - P79
그로부터 10년 후인 1453년(단종 1) 8월 수양대군 집의 가마솥이 스스로 소리 내어 울었다. 사저의 사람들이 원인을 몰라 떠들썩하고 뒤숭숭하자 수양은 "잔치를 베풀 징조이다"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무당 비파가 급히 달려와서 수양의 부인 윤씨에게 "이는 수양대군께서 39세에임금의 자리에 오를 징조입니다"라고 말했다. 점사를 들은 윤씨가 놀라 다시 묻고자 했지만, 무당은 더 이상 고하지 않고 가버렸다. - P79
오죽하면 점쟁이의 말을 《세조실록》 총서에 기록해 놓았으랴! 《실록》은 없는 사실을 기록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실록>에 대한 그런 믿음은 있다. 마침 가마솥이 균형이 맞지 않아 소리가 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관은 신통한 점쟁이가 수양의 즉위를 예언했다며 의미를 붙여특별히 기록해 놓았다. 이는 점괘를 언급할 만큼 수양의 즉위 명분을찾기 궁박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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