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 중에 하나는 거침없이 질러대는 전개의 속도전이다.사실 지루할 틈도 없이 책은 마지막 페이지로 치닫는다. 단 다음귄은 기다려는 지지만 그렇게 속앓이를 할 정도는 아니다
물이 흐르듯 순리대로 살라는 뜻이겠는데……….‘우신은 마음속으로 상선약수라는 문구를 통해 딸 소진이자신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했는가를 생각하다가 문득 가슴이 메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딸을 이련과 맺어주려고 했던 것이나 동부욕살하대곤의 아들 해평과 결혼시키려 했다 결렬된 것은, 그의 과도한 욕망이 불러온 잘못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 P332
결국 우신이 정략결혼을 시키려고 했던 것은, 딸 소진을 두번 죽이는 꼴이 되고말았다.그 일로 인하여 소진은 주변에 석녀라는 소문까지 퍼져 얼굴을 들고 밖으로 나다닐 수도 없게되었다. 그 모든 것이 우신, 그 자신의 출세에 급급한 욕망에서비롯된 것이었다. - P333
"이건 절대 비밀입니다만, 그분은 고국원왕의 실제인무 왕제이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이름도 없이 다녀서 무명선사라 불리고 있습니다.""허어………? 무왕제라면해평의 친부가 되지 않는가?" - P335
"왜 무왕제 전하께서 후회를 했단 말인가?"우신은 자신도 모르는사이 우적의 이야기에 빨려들었다."바로 하대곤이 역린의 상이라는 것입니다.""역린이라면 반역?"우신은 그 말을 하다 말고 급히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 P336
주위에 우적 이외에 아무도 없었지만, 함부로 꺼낼 수 없는 말이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그렇습니다. 무술 스승이 되신 무선사가 하산하는 제게간곡히 부탁한 것은 아들 해평을 안전하게 지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대곤의 꾐에 빠져 반역을 하기 전에, 고구려의 훌륭한 무사로 키워달라고 했습니다." - P336
우적이 다시 책성으로 돌아가고 나서, 우신은 며칠 동안 고민하던 끝에 결심을 굳혔다. 모든 욕심을 버리고, 가산을 정리해서라도 딸을 찾아 나서기로 했던 것이다.그렇게 우신이 결심을 굳힌 직후 바로 대왕 구부가 그를 국상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편전에 가서 대왕을 알현한 그는 국상의 자리에 앉을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집안의 우환을 이유로 댈 수 없었다. 그는 지병이 있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 P337
이 뭔 사연이 있어 남장을 하고 다니는지 몰라도 자네가 배짱이 있으면 수작 한번 걸어보지 그래. 아무래도 삿갓을 벗지 않는 게 수상해, 자네가 요령껏 저 삿갓을 벗겨보란 말일세."이제 장사치들은 삿갓을 쓴 미장부를 두고 안주삼아 마구입방아를 찧기에 바빴다."에이, 형님두! 농담이 지나치슈 내 보기엔 지체 있는 대갓집도령 같소이다. 대갓집 도령들 중엔 여자들 품에서만 자란 미장부가 없지 않아 있는 법이우." - P342
바로 그때, 소금 장수들의 술자리에서 황보가 벌떡 일어섰다. 그는 불콰해진 얼굴로 성큼성큼 삿갓 쓴 사내에게로 다가왔다."여보게 젊은이, 그 삿갓을 벗으면 내가 빈방을 만들어지."그러자 삿갓쓴 사내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어허! 그 얼굴 좀 보자니까."황보는 겁도 없이 껑충한 키로 허리를 굽히며 상대의 삿갓을벗기려고 팔을 뻗어왔다. - P344
한 달여 동안 부여 지역의 이 산 저 산을 헤매고 돌아다니는데, 무명선사의 행적은 묘연했다. 남장을 하고 다니지만 여자의몸이므로 가장 불편한 것이 잠자리였다. - P346
때로봉놋방에서 두억시니 같은 사내들 틈에 끼어 잘 때도 있었으나, 그 달걀 썩은내가 등천하는 발 냄새와 땀 냄새는 정말이지 질색이었다. 더구나 사내들이 자꾸만 의심스런 눈길로 바라볼 때나 치근대며뭔가를 캐물을 적에는 도무지 견뎌내기가 어려웠다. - P346
아버지와 연나부 세력들이 궁궐을 습격하는 음모를 꾸미던바로 그날 밤, 소진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새벽에 그녀는 남장을 한 채집을 나와 궁궐의 서문 문루에 종이쪽지를 매단 화살을 날린 후 곧바로 책성으로 무술사범 우적을 만나러 갔던 것이다. - P347
막연했지만 무술사범 적이 말한 바로 그 무명선사를 만나면 뭔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열릴 수도 있다는 이상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과연 나는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할까?‘아마도 그 길을 험난한 여정일 것이라고, 소진은 생각했다.그러나 우직스럽게 그 길을 혼자서 걸어가야만 하리라고 마음을 굳게 다지고, 또 다지고 있었다. - P347
정권을 잡은 직후에 자신감에 가득차서인조가 한 짓은 온갖 벙카만 날린 탓에 우리의 민초들은 병자호란을맨몸으로 맞이했다.마찬가지로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서온갖 친일파가 득세한 곳에서 정권을 찬탈한 이승만은 역시 벙카만 날리다분단,한국전쟁을 최악의 상태로 이끌었다.역시 그 벙카의 대가는 바로 할아버지,할머니들이 개죽음으로 제대로 똑똑이 치러야했다.
또 남인 이광정을 이조판서로 정세를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광정은 곧 낙마하고 만다. 새정권에서 벼슬을줄 때 중요한 기준은 과거의 행적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폐모논의에참여했느냐의 여부가 가장 중요했다. - P30
이광정은 평소 청렴결백하다는찬사를 들었지만 폐모 정청(논의의 결말을 짓기 위한 회의에 참여했던 하자가 있었다. 이광정이 이조판서에 임명된 직후 정사에 참여하려 하자 김자점은 과거의 행적을 거론하며 면전에서 질책했다. "모정청에 참여한 사람이 어찌 이조판서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면박을준 것이다. 결국 이광정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 P30
북인 중에서 드물게 폐모논의에 반대하다가 쫓겨났던 그는 절의를 인정받아 등용되었다. 정온을 제외한 나머지 북인 출신들 가운데정치색이 옅으면서 실무 능력이 뛰어난 인물들도 구제되었다. - P30
김신국, 심열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평안감사에 임명된 김신국은 명민하고 재주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정치 이력이 복잡했다.선조 말년에는 유영경에게 광해군대에는 유희분과 박승종과 결탁하여 폐모 논의에 참여했던 ‘하자‘가 있었다. 하지만 과거평안도에 근무하면서 민심을 얻은 점이 참작되어 다시 평안감사가 되었다. 심열은 광해군 정권에서도 손꼽히는 재정 전문가였다. - P30
실제로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반정공신들은 이조판서 이상의 관직은 남인들에게 절대로 넘겨주지 말자고 밀약했다고 한다. 물론 이원익을 영의정에 임명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지만 그는 사실상 새 정권의 ‘얼굴마담‘일 뿐이었다. - P32
서인 반정공신들의 견제가 심하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어려웠던 것이다. 권력의 실세로 떠오른 서인 공신들은 이원익의 명망과 경륜을 인정하면서도 인조가 그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은 몹시 경계했다.남인들조차 이렇게 견제받고 있던 상황에서 북인들의 정치적 위상은보잘 것이 없었다. 인조반정 이후 등용된 북인들은 그야말로 ‘정권의들러리‘였다. - P32
폐모론에 반대하여 유배되었던 전력을 가진 정온만이 삼사의 고위직을 역임하며 어느 정도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 뿐 나머지 인물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심열은 당시 자신의 처지를 가리켜 ‘도필지임자조하기까지 했다. ‘도필‘이란서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 P32
심열은 또한 다른 신료들이 자신을 공장처럼 여기고 있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조정에서 살아남기는 했지만정치적 힘이나 존재감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던 것이다. - P32
3월 17일 인조는 반정공신들을 불러 모았다. 이광수, 이서, 한교심기원, 김자점 등에게 인조가 했던 첫 발언은 자부심이 한껏 넘치는 내용이었다. "오늘날 이 의거가 성공한 것은 경들의 힘 덕분이다. 금수의 땅에서 다시 사람의 세상이 되었으니 뭐라 형언할 수없다." 주목되는 것은 광해군대의 조선을 ‘금수의 땅이라고 규정한점이다. - P33
모문룡이 동강진을 설치했던 가도는17세기 초 조선과 만주, 명사이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이었다. - P34
가도는 조선과 만주의 지척에 있는 데다 요동반도와 발해만, 그리고 산동 등지로 연결되는 지리적 요충이었다.1622년 가도로 들어온 모문룡은 ‘요동수복‘을 표방하며 동강진을 배후에서 후금을 견제하는 전진 기지로 삼았다. - P35
후금 입장에서는 적잖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가도가 바로 코앞에 있지만 수군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금에게 모문룡과 동강진은 ‘목에 걸린 가시‘였다. - P35
1619년 사르에서 참패한 직후 개원이 무너졌고, 1621년에는 요양이, 1622년에는 광녕마저 넘어갔다. 정치·군사적 요충인 요양과 광녕을빼앗긴 이후 명은 요하 동쪽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다. 그것은명과 조선을 잇는 육로가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이제 양국 사신들은평안도 선사포에서 요동반도 연해를 거쳐 산둥 반도의 등주登州로 이어지는 해로로 왕래해야 했다. 그러나 해로는 위험했다. 난파 사고가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 P35
육로의 단절로 명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과 ‘통제력‘이 약화될 위기를 맞았다. 그때 혜성처럼 나타난 인물이 바로 모문룡이다. - P35
광해군은 모문룡을 화근으로 여겼다. 모문룡이 진강을 휘저어놓은데다 조선에 다시 들어와서도 ‘요동수복‘을 떠벌리며 후금을 계속 자극했기 때문이다. 실제모문룡 때문에 격앙된 후금은 조선을 협박했다. - P36
광해군의 끈질긴 설득에 밀려 모문룡은 1622년 가도로 들어간다.모문룡이 가도로 들어가자 명 조정은 고민에 빠졌다. 그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명의 산동에서 가도에 이르는 바닷길이 험해 수송이 쉽지 않았다. 필자엄이 모문룡에게둔전을 경작시키라고 했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P37
요구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모문룡을 경솔하고 위험한 인물로 여겨섬으로 밀어 넣으려 했고, 그가 가도로 들어간 뒤에는 이런저런 원조요청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문룡을 ‘찬밥‘ 취급했던 것이다.모문룡은 광해군에 대해 앙앙불락할 수밖에 없었다.‘인조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자 모문룡은 반색했다. 자신을 푸대접하던 광해군이 폐위되었기 때문이다. - P37
실제 새 정권의 모문룡에 대한태도는 달라졌다. 인조는 즉위하자마자 남이공南을 모문룡의 문안사로 삼았다. 남이공을 가도로 보내 ‘조선은 마음을 같이하여 협력할 준비가 되었다‘, ‘새 정부는 둔전과 염전 설치 등을 허용하고 성의껏 돕겠다‘고 약속했다. 모문룡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 P37
맹양지는 본래 1622년 군사 원조를 요청하려고조선에 왔었다. 그런데 광해군은 병을 핑계로 그를 만나 주지도 않았다. 이에 맹양지는 광해군을 만나려고 귀국하지 않고 버틴다. 그러다가 인조반정을 맞았던 것이다. 인조는 정변을 일으켜 권좌에 오른만큼 명에 대해 충성을 다짐함으로써 광해군과 차별성을 부각시키고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맹양지가 꺼내지도 않은 병력동원 문제까지먼저 거론한 것은 ‘오버‘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 P38
정권을 잡은 직후에는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기 마련이다. ‘오랑캐와 화친하고 명을 배신했기 때문에 광해군을 폐위시켰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운 이상,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도 친명의 분위기를 띄울필요가 있었다. ‘천명‘의 실천은 곧 후금과 대결의 길로 가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조선은 후금과 맞설 군사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 P41
그는 북경에 보낸 주문에 덧붙인 글에서조선의 정변을 ‘찬탈‘이라 규정하고 ‘중국의 승인 없이 함부로 광해군을 쫓아낸 역적들의 죄를 성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지어 광해군을 복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원가립은 주문사 일행에게 광해군의 생존 여부 등을 물은 뒤, 그를폐위시킨 까닭이 무엇이냐고 힐문했다. - P44
향정문을 바친다. 섭향고는 우산 아래 서서, 비를 맞으에게며 바닥에 꿇어 엎드린 조선 사신들을 힐난했다. 그 또한 ‘인조 등이거사 당일 궁궐에 불을 지르고, 광해군을 죽였으며, 일본군 3천 명을끌어들이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경전 등은 강하게 부인하고, ‘모문룡이 지척에 있기 때문에 모든 진실을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섭향고는 ‘정변과 관련된 전후 사정을 사문한 뒤에 인조를 책봉할지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선언했다. 8 - P45
월10일 예부를 찾아갔을때, 예부시랑 이근수도 "광해군이 무슨 죄가 있기에 명의 허락도없이 함부로 폐위했느냐?"고 몰아붙였다. 예부 또한 조선에 사문관을파견하여 전말을 조사한 뒤 책봉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이었다. - P45
슬프게도, 원하는 바는 보통 개인의 능력과 행복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동일한 말씀인 산상수훈안에 중요하게 들어 있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즉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면서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다. - P90
축복과 순종이 관련되어 있긴 하지만, 야웨께서 다윗과의 언약을 주도하시며 하신 약속은 다윗의 후계자가‘죄를 범하더라도‘ 벌은 받을지 모르지만 그분의 사랑‘은 없애지 않으신다는것이었다(삼하 7:14-15). 이후에, 당시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야훼가 호의를 보이는 지점이 몇 있는데 이는 다윗과의 언약과 관련 있다." - P90
그의 최우선순위는 하나님 백성의 복지다. 왕인 그는 통치할 때, 또 정의를 행할 때 많은 결정을 할 것이다(오늘날의 국가들과는 달리, 입법, 행정, 사법 권력의 구분이 없었다). 이를 위해 그는 "주의 이 많은백성을 재판할 수 있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듣는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9절). 칠십인역은 문자적으로 듣는 마음"(a heart to hear)이라 번역했다(NIV는 discerning heart로, 개역개정은 ‘듣는 마음‘으로 번역했다-역주), 지도자들은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들에게 귀 기울이는 은사를 아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 P91
다윗이 구한 지혜와 야웨께서 주시는 지혜라는 두 ‘지혜‘ 사이에 대조가분명하게 드러난다. 앞의 지혜는 자기방어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뒤의 지혜는 모든 사람을 위한 정의에 초점을 맞춘다. - P92
지혜를 얻은 다음에 서술된 솔로몬의 행동은 사회의 주변부에서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정의를 시행한 것이다. 진정한 지혜는 야웨만을 경배하는 것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고 정의롭게 행하는 것을 결합시킨다. - P93
내러티브는 이름을 명기하지 않고 신분을 나타내는 ‘여자‘, ‘창기‘, ‘왕‘이라는 단어만 사용함으로써 사회적 차이를 강조한다. 오늘날도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당시에 여자는 노예 제도나 사회 경제적 필요 때문에 창녀가 되었다. 보호해 주는 남자(남편, 아버지, 남자 형제, 남자 사돈, 성인 아들 등)가 없는 여자는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시[]" 한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다(시 146:9, 새번역). - P93
고대 근동 전체에서 왕의 주요한 역할은 정의 구현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예를 들어, 주전 1700년경 바빌론 왕 함무라비는 이렇게 썼다. 가장 높은 신들이 "나를 지명하여 백성의 복리를 증진시키고... 땅에 정의를 편만하게 하고, 부도덕한 이들과 사악한 이들을 멸하게 했다. 이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억압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다윗은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다"고 언급되고(삼하 8:15) 성경 다른 부분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일"은 한결같이 왕의 주요한 책임으로 주어진다(예를들어, 왕상 10:9; 시 72:1-3; 렘 22:3, 15;겔 45:9)." - P95
이 장은 그렇게 행하려면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함을 보여 준다. 이는 잠언 서두에서 글의 목적을 서술하는 부분에서도 제시되는 요점이다. "지혜… 알게 하며…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하게 하기 위해] (잠 1:2-3). - P95
의미심장하게도 이스라엘에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이 왕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책임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셨다(창 18:19)고 말씀하셨다. 이는 수많은 선지자에게 선포의 기반이 되는 말씀이다." - P96
슬프게도 솔로몬은 생애 말년에 변했고, 그를 뒤이은 왕들도 그 이상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소망의 메시지가 있다. 여호와께서는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라고 선언하신다(렘 23:5) - P96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 (마 11:19)이자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할(마 12:18) 그 ‘지혜로운‘ 왕임을 본다.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서, 무엇보다도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본다(고전 1:24). - P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