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남인 이광정을 이조판서로 정세를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광정은 곧 낙마하고 만다. 새정권에서 벼슬을줄 때 중요한 기준은 과거의 행적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폐모논의에참여했느냐의 여부가 가장 중요했다.  - P30

이광정은 평소 청렴결백하다는찬사를 들었지만 폐모 정청(논의의 결말을 짓기 위한 회의에 참여했던 하자가 있었다. 이광정이 이조판서에 임명된 직후 정사에 참여하려 하자 김자점은 과거의 행적을 거론하며 면전에서 질책했다. "모정청에 참여한 사람이 어찌 이조판서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면박을준 것이다. 결국 이광정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 P30

북인 중에서 드물게 폐모논의에 반대하다가 쫓겨났던 그는 절의를 인정받아 등용되었다. 정온을 제외한 나머지 북인 출신들 가운데정치색이 옅으면서 실무 능력이 뛰어난 인물들도 구제되었다.  - P30

김신국, 심열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평안감사에 임명된 김신국은 명민하고 재주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정치 이력이 복잡했다.
선조 말년에는 유영경에게 광해군대에는 유희분과 박승종과 결탁하여 폐모 논의에 참여했던 ‘하자‘가 있었다. 하지만 과거평안도에 근무하면서 민심을 얻은 점이 참작되어 다시 평안감사가 되었다. 심열은 광해군 정권에서도 손꼽히는 재정 전문가였다. - P30

실제로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반정공신들은 이조판서 이상의 관직은 남인들에게 절대로 넘겨주지 말자고 밀약했다고 한다. 물론 이원익을 영의정에 임명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지만 그는 사실상 새 정권의 ‘얼굴마담‘일 뿐이었다.  - P32

서인 반정공신들의 견제가 심하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어려웠던 것이다. 권력의 실세로 떠오른 서인 공신들은 이원익의 명망과 경륜을 인정하면서도 인조가 그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은 몹시 경계했다.
남인들조차 이렇게 견제받고 있던 상황에서 북인들의 정치적 위상은보잘 것이 없었다. 인조반정 이후 등용된 북인들은 그야말로 ‘정권의들러리‘였다.  - P32

폐모론에 반대하여 유배되었던 전력을 가진 정온만이 삼사의 고위직을 역임하며 어느 정도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 뿐 나머지 인물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심열은 당시 자신의 처지를 가리켜 ‘도필지임자조하기까지 했다. ‘도필‘이란서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 P32

심열은 또한 다른 신료들이 자신을 공장처럼 여기고 있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조정에서 살아남기는 했지만정치적 힘이나 존재감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던 것이다. - P32

3월 17일 인조는 반정공신들을 불러 모았다. 이광수, 이서, 한교심기원, 김자점 등에게 인조가 했던 첫 발언은 자부심이 한껏 넘치는 내용이었다. "오늘날 이 의거가 성공한 것은 경들의 힘 덕분이다. 금수의 땅에서 다시 사람의 세상이 되었으니 뭐라 형언할 수없다." 주목되는 것은 광해군대의 조선을 ‘금수의 땅이라고 규정한점이다.  - P33

모문룡이 동강진을 설치했던 가도는17세기 초 조선과 만주, 명사이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이었다. - P34

가도는 조선과 만주의 지척에 있는 데다 요동반도와 발해만, 그리고 산동 등지로 연결되는 지리적 요충이었다.
1622년 가도로 들어온 모문룡은 ‘요동수복‘을 표방하며 동강진을 배후에서 후금을 견제하는 전진 기지로 삼았다.  - P35

후금 입장에서는 적잖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가도가 바로 코앞에 있지만 수군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금에게 모문룡과 동강진은 ‘목에 걸린 가시‘였다. - P35

 1619년 사르에서 참패한 직후 개원이 무너졌고, 1621년에는 요양이, 1622년에는 광녕마저 넘어갔다. 정치·군사적 요충인 요양과 광녕을빼앗긴 이후 명은 요하 동쪽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다. 그것은명과 조선을 잇는 육로가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이제 양국 사신들은평안도 선사포에서 요동반도 연해를 거쳐 산둥 반도의 등주登州로 이어지는 해로로 왕래해야 했다. 그러나 해로는 위험했다. 난파 사고가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 P35

육로의 단절로 명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과 ‘통제력‘이 약화될 위기를 맞았다. 그때 혜성처럼 나타난 인물이 바로 모문룡이다.  - P35

광해군은 모문룡을 화근으로 여겼다. 모문룡이 진강을 휘저어놓은데다 조선에 다시 들어와서도 ‘요동수복‘을 떠벌리며 후금을 계속 자극했기 때문이다. 실제모문룡 때문에 격앙된 후금은 조선을 협박했다.  - P36

광해군의 끈질긴 설득에 밀려 모문룡은 1622년 가도로 들어간다.
모문룡이 가도로 들어가자 명 조정은 고민에 빠졌다. 그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명의 산동에서 가도에 이르는 바닷길이 험해 수송이 쉽지 않았다. 필자엄이 모문룡에게둔전을 경작시키라고 했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P37

요구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모문룡을 경솔하고 위험한 인물로 여겨섬으로 밀어 넣으려 했고, 그가 가도로 들어간 뒤에는 이런저런 원조요청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문룡을 ‘찬밥‘ 취급했던 것이다.
모문룡은 광해군에 대해 앙앙불락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자 모문룡은 반색했다. 자신을 푸대접하던 광해군이 폐위되었기 때문이다.  - P37

실제 새 정권의 모문룡에 대한태도는 달라졌다. 인조는 즉위하자마자 남이공南을 모문룡의 문안사로 삼았다. 남이공을 가도로 보내 ‘조선은 마음을 같이하여 협력할 준비가 되었다‘, ‘새 정부는 둔전과 염전 설치 등을 허용하고 성의껏 돕겠다‘고 약속했다. 모문룡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 P37

맹양지는 본래 1622년 군사 원조를 요청하려고조선에 왔었다. 그런데 광해군은 병을 핑계로 그를 만나 주지도 않았다. 이에 맹양지는 광해군을 만나려고 귀국하지 않고 버틴다. 그러다가 인조반정을 맞았던 것이다. 인조는 정변을 일으켜 권좌에 오른만큼 명에 대해 충성을 다짐함으로써 광해군과 차별성을 부각시키고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맹양지가 꺼내지도 않은 병력동원 문제까지먼저 거론한 것은 ‘오버‘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 P38

정권을 잡은 직후에는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기 마련이다. ‘오랑캐와 화친하고 명을 배신했기 때문에 광해군을 폐위시켰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운 이상,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도 친명의 분위기를 띄울필요가 있었다. ‘천명‘의 실천은 곧 후금과 대결의 길로 가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조선은 후금과 맞설 군사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 P41

그는 북경에 보낸 주문에 덧붙인 글에서조선의 정변을 ‘찬탈‘이라 규정하고 ‘중국의 승인 없이 함부로 광해군을 쫓아낸 역적들의 죄를 성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지어 광해군을 복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가립은 주문사 일행에게 광해군의 생존 여부 등을 물은 뒤, 그를폐위시킨 까닭이 무엇이냐고 힐문했다.  - P44

향정문을 바친다. 섭향고는 우산 아래 서서, 비를 맞으에게며 바닥에 꿇어 엎드린 조선 사신들을 힐난했다. 그 또한 ‘인조 등이거사 당일 궁궐에 불을 지르고, 광해군을 죽였으며, 일본군 3천 명을끌어들이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경전 등은 강하게 부인하고, ‘모문룡이 지척에 있기 때문에 모든 진실을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섭향고는 ‘정변과 관련된 전후 사정을 사문한 뒤에 인조를 책봉할지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선언했다. 8 - P45

월10일 예부를 찾아갔을때, 예부시랑 이근수도 "광해군이 무슨 죄가 있기에 명의 허락도없이 함부로 폐위했느냐?"고 몰아붙였다. 예부 또한 조선에 사문관을파견하여 전말을 조사한 뒤 책봉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이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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