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들 수에 비례해서 곡식을 분배해 주며 남자들에게 금지시킨 것이 있었다. 사랑방의 화투놀음이었다. 겨울철은게으름 피우며 그냥 노는 시간이 아니라 내년 농사를 짓기 위한 준비기간인데, 화투놀이에 빠져 농사준비를 소홀히 하고, 빚까지 짊어지고 하는 짓은 바로 인민해방을 가로막는 행위이므로 만약 그짓을 하다가 적발될경우 전재산을 몰수하고 율어에서 내쫓는 엄벌을 가할 것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 P228
그것이 바로혁명이다. 혁명은 완전히 새로움의 창출이고, 완벽한 새로움의 건설이다. 그 세계의 전개를 위하여 인간의 의식은 새롭게 탄생되지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제도의 삶을 수용할 수 있는 의식의 탈바꿈, 그것을 위해서는 새로운 규율의 강압이 불가피하며 악성 습관메 병들어 있는 모든 자들은 그 병이 치유되는 동안 새로운 규율이 요구하는 건설적인 고통을 달게 인내해야 하는 것이다. - P229
그 앞에서 연기 두 가닥이 곧바로 하늘을 향해 뻗어오르고 있었다. 그 연기는 다른 집들에서 나는 연기와는 달리 바람을 타서 흩어지지 않았고, 색깔도 검푸르게 짙었다. 그건 불길이 잘 보이지 않는 낮에 사용하는 봉화로서, 토끼똥을 태운 연기였다. 그 신호는조성책 오판돌과 보성책이해룡이 도착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 P232
"가난한 사람덜헌테 한 주먹썩이라도 골고로 노놔줘서 설얼 쇠게 허자 고런 뜻인디요, 따른 지주덜헌테야 강제로 쌀얼 뺏어내는것이제만, 대장님 말씀이, 김선상님헌테는 예 갖춰 우리 뜻을 전혀먼 선선히 쌀얼 내주실 것이다. 그러시둥마요." - P241
벌교 인민 여러분! 이 쌀을 고루 나눠 설을 쇠십시오. 주먹만큼씩 한 크기로 쓴 붓글씨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약간 작은 크기의 글씨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만약 이 쌀을 나눠갖지 못하게 방해하는 자들은 모두 인민의 적이다. - P242
요쌀얼 묵든 안 묵든간에, 총질꺼정 혀감스로 요리 맘 쓴 그맴이 아즘찮이 아즘찮이 또 아즘찮이요." 남자의 입바른 말을 면박하듯 하는 어느 여자의 더욱 입바른 말이었다. 김범우는 사람들사이를 슬그머니 빠져나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 P243
그러나 설 명절 중의 명절이었다. 추석이고 대보름을 큰명절이라 하지만 그것은 다 설을 앞세운 다음의 이야기였다. 설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을 때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그 나름의 설채비는 끝내놓고 있었다. 설이 되면 비렁뱅이도 쪽박에 낀 때를 벗기는 법이라고 했다. - P250
까끔댁은 측은한 눈길로 죽산댁을 바라보았다. 죽산댁은 큰 허우대로 보아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싶게 음식 만드는 솜씨가 좋았다. 친정이 밥술이나 먹고 사는 살림살이였다는 것을 알면 누구나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 P254
까끔댁은 산이 많은 승주에서 시집을왔고, 산이 겹겹인 산골마을을 ‘까끔실‘이라고 부르기에 그녀의 택호는 자연히 까끔댁이 되었다. - P255
말이시, 묵은 것도 없이 속만 끄득허시" 조성댁이 목을 늘이며 또한 번 트림을 해올렸다. 그네들은 여러 종류의 떡을 만들면서 주인의 권에 따라 떡꼬리를 주섬거리고, 간을 본다며 팥고물을 한 주먹, 뜸이 들었는지 본다며 떡쌀을 한 입, 그러다 보니 배가 찰 대로차 있었다. 못 먹던 속에 갑자기 많은 양이 들어가니 연방 트림이 - P263
그녀의 가슴에는 여러 개의 산들이 담겨 있었다. 그분이 준 소중한 생명을 피로 쏟아버린 안타까운 산, 너무 갑자기 어머니를 떠나보낸 한스러운 산, 낙안댁에게 냉대를받았던 서러운 산, 견디기 어렵게 고문을 당했던 고통스러운 산, 감방에 갇힌 막막한 나날 속에서 키웠던 사무치게 그리운 산, 그 산들 사이를 그분의 음성은 메아리져 흐르고, 그 음성이 스쳐간 산들은 하나씩 하나씩 흔적을 감추어가고 있었다. - P270
"불 켜지 마시오. 밤이 깊어 불빛이 멀리 가니까." 빠른 정하섭의 말이었다. "문에 칠 이불 따로 있구만이라." 소화의 말이었고, 아 그런 여자였지, 생각하며 정하섭은 고개를젖혀 뒷머리를 벽에다 기댔다. 생김은 꽃 같고, 마음은 어머니 같은 - P271
도 그분 앞이라면 발이 시린 것도 모르는 자기가 소화는 더할 수없이 좋았다. 그런 것은 결코 처음의 경험이 아니었다. 고문의 고통속에서도, 감방의 암울 속에서도 그분은 언제나 신령님과 나란히서 있는 빛이었다. - P275
소화의 마음에서는 금방 밝음이 사그라지고 서운한 어둠이 차왔다. ‘고맙소‘라는 말도 서운했고, ‘미안해서‘라는 말도 서운했다. 그까짓 목욕물을 데우는 일일 뿐인데 굳이 그런 말을 하는 그분이 야속했고, 행여 그런 마음의 간격을 가지고 있나 싶어 동한 서운함이었다. - P276
그는 흰 꽃이 내뿜는 흰빛 뜨거움을 가슴속 조깊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소화, 나 때문에 겪은 고생 내 다 알고 있소." - P277
만나자마자 미안하다고 했던 그 첫마디가 무엇을뜻했던 것인지 알았고, 소화는 또다시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않았던 것이다. 정하섭은 자신의 입을 가리고 있는 소화의 손을 어루만졌다. 작고 보드라운 손이었다. - P278
그 손은 생김새와는 달리 너무나 큰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베풀기만 하고 당하기만 하면서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손, 그건 소화의 마음이었다. 어머니 같은여자…………. 정하섭은 어루만지던 소화의 손을 잡고 방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 P278
살에 잡힌 멍이야 날이 가면 시나브로 풀려가는 것이지만마음에 잡힌 멍이야 세월이 갈수록 커져나가 뿌리가 한정 없는 한이 됩니다. 임신을 했었다는 것도, 고문으로 낙태를 했다는 것도 입에 올릴 수 없음의 서러움에 사무치며 소화는 정하섭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소화의 볼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정하섭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 P279
소화는 자신도 모르게 정하섭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아니, 그의 말이 끌어당겨 끌려간 것이다. 존대가 아닌 그의 말이 그렇게정답고, 다정하고, 편안하고, 가깝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앞으로도 쭉 그리 말쌈허시씨요." - P282
소화는 또렷하게 말했다. 정하섭은 빙그레 웃으며 눈길을 들었다. 눈앞에 정색을 한 소화의 얼굴이 있었다. 지금까지 보인 태도는소화답지 않은 면모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정색한 얼굴을 보는 순간 그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알았다. 그건 가장 소화다운 면모의 변형이었던 것이다. 맨발이 시려운 줄도 모르는 바로그 열정의 변형이었다. - P285
한반도의 겨울기온은 삼한사온이라고 하였다. 남도지방에서는그 자연의 변화가 신기할 정도로 잘 지켜져나갔다. 마치도 무슨 법칙이나 되는 것처럼. 사흘이 추우면 나흘은 따스하고, - P296
그 번갈이를 따라 겨울은 한 꺼풀씩엷어져갔다. 그 이목이 음력설이었다. - P297
빛 꽃숲은 오래도록 찬 바람에 시달리는 처연한 외로움이었다. 누구나가 동백꽃을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느낌은 사람도 저어하는추위 속에 피는 까닭이리라. 아침안개에 묻힌 동백의 핏빛 꽃들은안타까운 서러움이었고, 흩날리는 눈발 속의 동백의 핏빛 꽃들은사무치는 한이었다. - P297
음력설을 고비로 절기가 달라졌음을 서둘러 알리는 것은 동백이었다. 음력설을 넘기면서 동백나무들은 서로가 다툼이라도 하듯이 가지 저 가지에 선연한 핏빛의 꽃들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 P297
마치도 핏빛의 눈물을 떨구는 것처럼. 그래서 사람들은 동백꽃을 한 많은 처녀 넋의 환생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또는, 한 많은 청상의 환생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 P298
보름을 기점으로 농사절기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정월 대보름이 달[月]의 잔치이면서 또한 불의 잔치인 것은농사의 시작을 의미했다. 어린아이로부터 시작해서 어른에 이르는불놀이는 재미만으로 하는 명절맞이 놀이가 아니라 농사의 해충을 방지하는 거였다 - P298
단기 4282년 새해는 1월 1일부터가 아니라 2월 11일부터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그날은 바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본격적활동이 공개된 날이었다. - P301
두 가지의 공통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첫째는 공평하게 사는 새 나라가 세워질 것과, 둘째는 모든 친일세력에 대한 응분의 응징이었다. - P302
1945년 12월27일 미국·영국·소련이결정한 5개년 신탁통치 실시가 발표되자마자 탁구공을 되받아치듯 전국적으로 반탁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던 것은 첫 번째 기대가 무너지는 데 대한 민족적 자각의지의 표현이었음과 동시에, 또다른 외세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민족적 결의가 응집된 외세배격항거였다. - P302
대중들의 정의로운 기대는 여지없이 짓밟힌 채 각종 친일세력들은미군정의 비호 아래 양지살이를 하며 더 살이 오르고 더 거드름을피웠다. 사람들은 썩은 놈의 세상, 망할 놈의 세상을 되뇌었고, 세월은 한 해, 그리고 또 한 해, 그리고 다시 또 한 해, 3년이 흐르면서 아무것도 기대할 것 없는 제멋대로의 세상을 외면했고, 체념은돌로 변해갔다. - P303
독립운동 혐의를 앞세워 지하실에서 고문을 자행했던 바로 그자가 해방된 땅의 경찰로 변해 이번에는 좌익 혐의를놓고 똑같은 사람을 똑같은 지하실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고문하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 된 세월이었다.
물론 반민특위가활동을 시작하기까지는 관계법이 두 차례에 걸쳐 국회를 통과했다. 지난해 9월 7일의 반민족행위처벌법과 11월 25일의 반민특별조사기관법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반민특위가 각 도에 조사부를 설치하고 실질적인 활동을 개시한 것은 1월 8일이었다. - P303
한때 패검도 멋지게 금테두리 모자에 검정 경부제복을 입고 동분서주하던 노덕술 또한 고동색 두루마기에 몸을 감은 채 조사관 앞에 고개 숙이고 있는가 하면, - P304
이땅의갑부박흥식도 자가용 자동차에 마카오 양복은 옛일이라는 듯 꾀죄죄한 세루 두루마기에 눈만 번쩍이며 고랑을 차고 끌려다니고, 일본의 국민복을 입고 각반에 전투모를 쓰고 학병을 권유하던 가야마 미쓰로도 이제는 이광수로 돌아와 회색 두루마기에 몸을 싸고 조용히 제2의 ‘나의 고백‘을 쓰고 있다. - P304
신선맹키로 깨끔헌 사람 을매든지 있어. 친일헌 놈덜이 지아무리 많여도 친일 안 허고 깨끔허니 산 사람덜이 몇십 곱절 많다는 것을알아야 써. 친일헌 놈덜얼 처벌혀야 헌다는 것이 먼디. 고놈덜이바로 깨끔헌 둠벙물꾸정키리는 느자구는 미꾸랑지새끼덜이라서 그런 것 아니겠어!" "워따 말 한분 씨언하게 자알헌다. - P306
삼국지가 성님! 허고 엎어져야" "근디 말이여, 친일파 때레잡는 법얼 맹근 것도 중하고 존 일인디, 토지개혁인가 농지개혁인가 허는 법 맹근다는 소식은 신문에 능가?" "고것은 없는디." "참말로 사람 환장하겄네. 친일파 때레잡는 법보담 그 법이 먼첨 맹글어져야 지대로 되는 순서 아니겠어?" - P307
소가 멍에를 끌듯 또 한 해의 농사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반민특위의 소식은 몸 가볍게 만드는 한줄기 신선한 바람이 아닐 수 없었다. - P309
마르크시즘의 맹신적종교화와 자본주의의 추악한 물신주의, 염상진의 확신과 행동, 나의 불확신과 비행동, 김범우의 또다른 인식과 내재된 활동성···· - P309
김범우, 그는 여러모로 건강한 존재였다. 뼈대 앞세우는 가문의식이나 지주 자식으로서의 우월의식 같은 것이 없었고, 순천중학교의 기질인 고상한 현학취미도 없었으며, 더욱이 일본 유학생들이감염되어 오는 전염병인 일본식 서구 열등감도 없었다. - P315
농업학교 학생들은 순천중학교 학생들을 ‘고자‘라고 불렀으며, 순천중학교 학생들은 농업학교 학생들을 ‘야쿠샤‘라고 불렀다. - P315
두뇌적으로는 인문학교와 가깝고, 졸업과 동시에사회진출을 하는 것으로는 실업학교와 가까운 사범학교의 특수성에 따라 사범학교가 순천중학교와 농업학교의 중간지점에 놓이는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 P316
순천중학생들이 ‘늙은 고자‘라고 불리는 것은 책만 파고드는 행동성의 빈약 때문만이 아니었다. 젊은이들에게는 모욕적일 수밖에 없는 그 별명이 붙여진 데는 여중학생들의 작용이 컸다. 여중학생들은 그들 나름의 계산속 빠른기회주의를 십분 발휘하여 한사코 순천중학생들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그 다음의 대상이 사범학생들이었다. 여학생들은 타산적 속성을 야비할 만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꼴이었다. - P316
여중생들 거의 전부가 동일한 호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천중학생들은 ‘늙은 고자‘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신통한 연애사건 하나 일으키지 못했다. - P317
사범학생들은 ‘애늙은이‘라는 별명이 어울리도록 대부분 나이와는 걸맞지 않게 예절바른점잖음과 진중한 사고력을 갖추어 어른스럽게 철이 들어 있었다. 그건 완제품으로서의 ‘선생님‘을 만들어내기위한 일본식 사범교육의 결과였다. - P317
순천중학생인 김범우에게 ‘늘고자‘라는 집단별명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지닌 건강성은 사범학생들과 연계를 이루어 사상학습에 몰입했고, 그가 품은 진지한 열정은 누구의 눈에나 모범적인 공산주의자가 될 것으로 보였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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