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
‘간사하고 불의한 자‘는이쉬이방 민족을 나타내는 히브리적 표현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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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중반 추방령이내려 잠시 어려움을 겪었지만 프라하의 유대인들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 게토는 1850년 별도의 행정구역이되었는데 유대인을 너그럽게 대했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 요제프2세(재위 1765~1790)를 기리는 뜻에서 ‘요제포프‘라는 이름을 붙였다. - P192

가장 인상 깊은 곳은 ‘신구(舊)시너고그(Staronová synagoga)‘라는예배당이었다. 13세기에 초기 고딕 양식으로 지은 이 시너고그는 유럽에 남아 있는 유대예배당 중에서 제일오래되었다. 여러 차례의화재와 박해 · 추방 · 재개발. 나치 점령 등의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박물관으로 바뀐다른 예배당과 달리 지금도 프라하의 유대인들이 여기서 예배를 본다.  - P193

시내 구간 평균 수심은 3미터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낮으며 프라하 남쪽과 북쪽 경계의 수면 고도 차이가 14미터나 되기 때문에 원래는 물살이 빠르다.보와 갑문이 없다면 지금도 그럴 것이다.
프라하라는 지명이 ‘여울‘ 또는 ‘급류‘를 가리키는 슬라브 말에서 유래했다는 정보가 옳은 듯했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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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갑동은 사귀고 있는 간호원 서미향에게 혹시 기혼자가 아닐까하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그건 ‘간호장학생‘들이 피해를 입히고 떠나는 것처럼 광부들 중에서 기혼자들이 총각 행세를 하며 현지 결혼을 했다가 나중에 들통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박갑동은 서른한 살이나 먹어 그런 의심을 더 샀다. 스물다섯이면 거의가 결혼을 하는 세태여서 서른하나면 애가 있어도 두셋은 있을 나이였다. 간호장학생들 때문에 간호원들이 유학생을 불신하고 광부들에게 눈길을 돌리게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또 기혼자들 몇몇이양심 없이 ‘피아노를 치고 나서는 바람에 정작 총각 광부들이 피해를 입고 있었다. - P155

한국에서 보내오는 호적등본이나 사망확인서 같은 것을 안 믿는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광부들의 임금은 독일 복지제도에 따라 기혼자와 총각이 달랐다. 기혼자의 경우 아내와 자식 하나가 있으면 가족수당이 붙어 한 달 임금이 600마르크인데 총각은 400마르크였다. 총각의 입장에서 보면 똑같은 일을 하고 200마르크나차이가 난다는 것은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억울한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문서 위조였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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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일본군들을 연해주에서 몰아내야만우리의 독립투쟁지를 회복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혁명을 도와야 혁명이 완수되면 소비에트는 식민지 약소민족의 해방선언에 입각해 우리의 독립을 한층 더 적극적으로 돕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우리는 청년단을 조직했고, 단원 확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 P150

송수익은 그리도 의젓하고 여유 있게 일을 처리하는 방대근을지켜보며 더없이 가슴 벅차고 뿌듯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만주의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확인이기도 했다. 그동안 대근이는 몸과 마음이 균형 잘 잡힌 의연한 장정으로 성장되어 있었다.
세월은 무심한 듯하면서도 만주땅에는 수많은 방대근이를 키워냈고 연해주땅에는 또 수많은 윤철훈이를 키워낸 것이었다. 송수익의 눈앞에는 불현듯 아들 중원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중원이도 그렇듯 손색없이 커가고 있을 것을 믿었다. - P152

송수익은 두 젊은이의 대화에서 가슴 섬뜩함을 느끼고 있었다.
시대는 급변하고 있었고, 젊은이들은 옛 생각을 고집하고 있는 윗세대를 배격하는 데 지극히 자연스럽게 동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수익은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만주에 와서 군왕신봉자들과 단호하게 결별했었다. 그 표시로 상투를 잘라버렸던 것이다.  - P153

왕권의 부정은 곧 공화제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다시 불어닥친 바람이 공산주의였다. 그러나 자신은 공산주의보다는 민족자결주의에 더 관심을 써왔던 것이다. 송수익은 방대근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산주의에 경도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 P154

중국사람들은 조선사람이 중국말을 잘하면 무척 좋아하며 신뢰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형제의 나라‘라고 우의를 나타내면 더없이흔쾌해하는 것이었다. 그 흔쾌해함은 자기네가 형이라는 자만이기도 했다. 그걸 다 알면서도 중국말을 할 줄 아는 독립운동가들은그 말을 자주 써먹었다.  - P155

"그렇게 황망해하실 것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그럴 만한 연유가 있으니까요. 그 사람들은 함경도의 박토에 농사짓고 살기도어려운데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시달려 살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서 봉금의 땅 만주로 숨어든 것입니다.
봉금의 땅에 숨어들었다가 잡히면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리 목숨을 내걸고 북간도나 연해주에 생활의 터전을 닦은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는 반감과 원한의 대상일뿐입니다. 이곳 연해주에서도 성공한 부자들일수록 독립운동에 무관심하고 냉담합니다. 그건 지극히 당연한 현상입니다.  - P160

침묵이 길어지고 있었다. 너는 어찌하겠는가? 송수익은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만민평등의 개화사상을 접하면서 인간차등의반상사상을 버렸고, 왕권회복의 복벽주의를 부정하면서 민권수립의 공화주의를 택했고, 독립투쟁의 효과적인 방략의 하나로 대종교도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산주의라는 것이 다시 대두하고있었다. 그것이 공화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아직 명확하게 구분은되지 않았다. 무산자계급의 혁명재산 없는 가난한 노동자나 농민들이 중심이 되도록 세상을 뒤집어바꾸는 것.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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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인조가 즉위한 후 후금에 대한 정벌을 계획하면서 국왕의 경호를 위해 개성유수 이귀(李貴, 1557~1633)를 어융사(御使)에 임명하고, 화포군(軍) 260여 명을 선발해 훈련시켰다. 후금 정벌은 실행되지 않았으나이때 모은 군사를 1624년(인조 2) 어영군(御營軍)이라 하고, 이귀를 어영사(御使)에 임명해 국왕의 호위를 담당케 했는데 이것이 어영청 (御營廳)의 출발이다.  - P454

임진왜란 직후 훈련도감을 시작으로 하나둘 생겨난 군영은 당시 정치를주도하던 붕당의 군사적 기반이 됐다. 그리하여 군영을 두고 국가의 공병(쇼兵)이기보다는 각 군영 대장의 사병이라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 P454

1682년(숙종 8) 숙종은 훈련도감의 군사를 줄여 국가 재정에 기여하고, 도성의 경비를 강화한다는 취지하에 훈련도감 소속의 일부 군사와 병조 소속의일부를 차출해 금위영(營)을 설치했다. 금위영은 국왕을 호위하고 수도를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금위영 창설로 비로소 5군영체제가 완성됐다. - P454

 문과의 경우, 3년마다 시행하던 식년시보다 부정기적으로 시행하는 별시가 잦았다. 별시는 식년시에 비해 서울과 경기 지역 유생이 지방 유생보다 유리했는데, 지방에서는 시험 일정이나 시험과목등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과거 급제자가 점차서울과 경기 지역에 편중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 P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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