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에 대련이 필요하듯,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하지. 그래도 오늘 저녁 저 태백성이 유난히 밝은 것을 보니, 머지않아 무명검법을 완성시켜 줄 주인이 나타날 모양이구나. 그래서 내일부터 제성단을 차려 저 하늘의 태백성에게 기원을 드리려는 것이다" - P10
늙은 사내는 동굴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내는 바로 고국원왕 시절의 뛰어난 무장이자 왕제인 무였다. 늙은 사내를 사부님이라 부른 여인은 대사자 우신의 딸 소진이었다. 한때 그녀는 왕자비 간택 때 후보에 올랐다가 석녀라는 억울한 멍에를 쓰고 고민하다 뜻한 바가 있어 가출을 했다. - P10
소진은 스승 무명선사가 동굴에 들어가 저녁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식기들을 챙겨가지고 산 아래 초막으로 내려왔다. 벌써 어둠이 내려 숲길은 어두웠다. 그러나 나무숲 사이로별빛이 새어들었고, 늘 다니던 길이라 발길은 이미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다. - P11
초막은 세 동이었다. 한 동에는 소진과 수빈이가 머물고, 맞은편에 있는 다른 한 동은 우적과 선재가 거처로 사용하고 있었다. 두 초막 사이의 너른 마당은 그들의 무술 수련장이었다. 그리고 마당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초막에는 마구간, 무기와 식량 창고가 같이 있었다. - P12
"사부님께서는 저 금성을 태백성이라 하시더이다. 금성은 세상 어디에서나 빛나지만, 우리 고구려에서 빛나는 금성은 따로태백성이라 부른답니다. 사부님께서는 태백성처럼 우리 고구려를 빛내줄 타고난 인걸을 기다리시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내일부터 산정에 제성단을 차리고 태백성을 향해 기원을 드리시겠답니다. 하오니, 내일 아침일찍 두분께서는 동굴로 올라가보셔야 할 거예요. 사부님께서 제성단을 쌓아야 한다고 두 분을 부르셨습니다." - P13
소진은 수빈으로 인해 문득 자신의 지금 처지를 돌아보게되었다. 혼인도 못한 채 어느덧 나이 마흔을 넘겼다. 왕자비 후보에 오르지 않고 수빈의 나이만 할 때 보통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면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란생각이 들자, 후회와 번민과 회한이 한꺼번에 겹쳐져 짧은 한숨으로 흘러나오고 말았다. - P15
소진의 배필이 될 뻔했던 당시의 왕자 이련은 지금 고구려를호령하는 대왕이 되어 있었다. 부여 땅 깊은 산속에 있지만, 풍문으로 그런 소식이 자연스럽게 들려왔다. 주로 이 깊은 산속까지 그런 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은 선재였다. 그는 가끔 다섯 식구가 먹을 곡식을 구하러 산 아래로내려갔고, 한 해 걸러 한 번씩 요하 상류의 대흥안령을 넘어 염수에다녀오기도했던것이다. - P15
담덕은 이미 태자로 책봉된 지 3년이 지났고, 나이도 열다섯의 건장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이미 열 살 때부터 체구가 남달라 어른 덩치였지만, 당시만 해도 어린 티를 벗어나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변성기를 지나 목소리도 어른스러워진 데다, 얼굴 또한 뚜렷한 이목구비가 모난 데 없는 어엿한 청년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이마는 번듯했고, 굵직하고 짙은 호랑이 눈썹은 그 끝이 위로 약간 치켜져 올라가 자못 위엄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 눈썹 밑에 자리 잡은 두 눈은 호수처럼 맑고 그윽해 보였으며, 코는 우뚝하고 입술은 두터웠다. 귓밥이 두툼하고, 그 아래로 둥그스름하게 흘러내린 턱이 입술 밑을 든든하게 받쳐주었다. - P19
나를 찾아와 무엇을 하겠느냐? 부여 땅으로 무명선사를 찾아가 보거라, 나는 영혼 없는 귀신이지만, 거기 가면 살아 있는 귀신이 있느니라‘ "사부님!" 담덕은 목이 메었다. 실제로 묘택 속에서 울려나오는 을두미의 목소리를 들은 듯했기 때문이다. 그가 열한 살 때 해평의 반역으로 배를 타고 압록강에 표류된 이후 처음 찾아온 길이었다. - P20
무술사범이었던 유청하의 말에 의하면 사부 을두미는 바로담덕,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졌다고 했다. 담덕은 엎드린 자세에서 다시 외쳤다. "사부님, 담덕이 이렇게 살아 돌아왔습니다." ….….....‘ 그러나 묘택 속의 두미는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사부님 말씀 명심하겠사옵니다. 반드시 무명선사를 찾아가고구려 검법의 가르침을 받겠나이다." - P20
관미령을 넘으면 바다가 나오고, 그 바다를 건너면 바로 백제의 요새 관미성이 있었다. 관미령은 육상으로 관미성을 칠 때 반드시 선점해야 할 군사요충지였다. - P22
국내성에서 두치가 이끄는 말갈 전사들의 소식을 들은 태자담덕은 호위무사 마동을 보내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 그는 두치의 말갈군이 관미령을 넘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언젠가 때가 오면 반드시 그곳부터 점령하고 다시금 관미성을 공략하여 백제의 기를 꺾어놓고야 말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을 했다. - P22
"고맙습니다. 대장님 덕분에 우리 모녀가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귀부인이 담덕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수레 안에는 또 다른 여인이 타고 있었다. 문 사이로 언뜻 보이는 얼굴은 젊고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이었다. 담덕과 눈이 마주치자 소저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수줍은 듯 얼굴을 외로 꼬았다. - P26
"공자님, 대사자 어르신께서 뵈옵자고 하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이 같은 말을 담덕에게 전하는 자는 대저택의 집사 같았다. 예의와 범절을 제대로 갖추어 말했다. "대사자라 하시면………?" "우가족장님을 모시는 어르신입니다." "음, 우가라면 부여의 동쪽 지방을 다스리는 어른이 아니시오?" 담덕은 부여의 귀족들 명칭을 잘 알고 있었다. - P28
부여에서는 왕 다음에 동쪽을 다스리는 족장으로 우가가 있었다. 그리고 서쪽에 저가, 남쪽에 구가, 북쪽에 마가馬가족장으로 있으면서 각기 그 지역을 다스렸다. 이를테면 그들은 부여왕의 명을 받아 동서남북 4개 지방의 행정을 총책임지고 있었다. 대저택의 주인은 바로 동쪽을 다스리는 족장을모시며 그 지역의 조세를 걷고 공물을 징수하는 역할을 맡고있는 대사자였다. - P29
"잘 아시겠지만 우리 부여는 대왕 밑에 동서남북 각 지방을관장하는 사출도 있지요. 나는 동부의 우가 족장 밑에가서 행정업무를 총괄하는 대사입니다. 아진비라고 하지요. 그런데 저들은 북쪽 지방을 담당하는 마가 족장의 수하들입니다. 일전에 마가 족장의 아들이 동부로 사냥을 나왔다가 날이저물어 우리 집에서 하룻밤 묵어간 적이 있었지요. 그때 아마딸아이를 본 모양입니다. 다짜고짜로 내게 딸과 혼인하게 해달라는 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 P30
그럴 수 없는 것이 혼사에는 예법과 절차가 있는 것이고, 더구나 안 될 일은 우리 조상 대대로 마가 족장 집안과는 앙숙이어서 사돈 관계를 맺을수 없습니다. 아마 마가 족장도 그런 이유로 아들을 말린 모양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강제로라도 딸을 납치하여 자기 욕망만 채우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번에 내자와딸아이가 외출한 것을 알고 수하들을 보내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그런 일을 저지른 것 같습니다. - P31
그러면서 아진비는 자신의 아내 성이 부여씨라고 했다. 아주 오랜 옛날 부여 금와왕의 큰아들 대소가 피살되자 막내아들은 형이 죽어 부여가 곧 망할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수하 1백여 명과 함께 고구려 압록곡으로 도망쳐와서 갈사국을세우고, 그 소국의 왕이 되었다. 압록곡은 고구려 땅이었으므로 제후국으로 대우했는데, 갈사국왕의 손녀가 대무신왕의 둘째왕비가 되어 왕자호동을 낳았다. 그리고 태조왕 대에 와서는 갈사왕의 손자 도두가 고구려에 나라를 바쳐, 그를 우태로삼았다. 이때부터 압록곡의 부여씨는 고구려인이 되었다. - P33
"바로 압록곡의 부여씨 후손이 나의 내자이고, 무명선사 밑에서 검술을 배우고 있는 부여선재가 내 손위 처남올시다. 세간에서는 성을 생략하고 선재라는 이름만 쓰지요. 아무래도부여 땅에서 부여씨를 내세우게 되면 자유롭게 행동하는 데장애가 되니까요." - P33
"바로 그것이 인간으로서 지향하는 바다. 끊임없이 하늘을꿈꾸는 자세, 그것이 네발 달린 동물과는 다른 인간의 직립보행이 아니겠느냐? 그런 점에서 이 지구상에 사는 인간이나 새. 나무는 하늘을 꿈꾸는 특별한 존재들인 것이야 늘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살지 않느냐? 그런데 하늘은 무궁無窮하지. 그 무궁을 향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느냐? 무명검법은 바로 검술의 무궁을 추구하고 있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미완성의 완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P43
담덕은 천천히 백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먼저 눈과 눈을 마주쳐 백마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문득 백제 대상과 함께 서역으로 말을 구입하러 갔을 때 사기의 말을 떠올렸다. 당시 사기는 말에게도 관상이 있다고 했다. 불쑥 나온 번듯한이마, 영롱한 빛을 내는 툭 불거진 눈, 그리고 누룩을 쌓아 올린것처럼 두터운 말발굽 등을 보고 말을 고른다는 것이었다. 바로 백마가 그와 같은 상을 가지고 있었다. 명마임에 틀림이 없었다. 툭 불거진 두 눈은 양쪽으로 뾰족하게 솟아난 두 귀가까이로 치우쳐 있어 넓은 시야를 확보하는 데 매우 유리해보였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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