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절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천의무봉한 신뢰를 의심하는 사탄의1논리를 제시한다. "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까닭 없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형용사 힌남은 ‘임금도 받지 않고‘, ‘빈손으로‘ 등을 의미한다. - P46
결국 9절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주인과 임금을 받고 일하는 종으로 격하시키는 발언이다. 이것은 고대 바벨론의 인간관을 생각나게 한다. 바벨론 창세기에 해당되는 『에누마 엘리쉬』나 『아트라하시스』에서는 인간은 열등한 신들의 노동을대신 해주는 육체노동자로 창조되었을 뿐, 거기에서 인간은 창조주하나님과 서로 마음으로 소통하거나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인격적 동역자가 아니었다. 사탄은 고대 바벨론의 창조주와 야웨 하나님을 은근히 동격으로 보는 셈이다. - P47
그러면 하나님은 왜 하나님의 자녀들 모임에서 돌출된 사탄의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라는 개념에 자극을 받으셨을까?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신학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끊임없이 물었다. 스콜라 신학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피조물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매우 신경 쓰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진리로 설복하기를 원하셨지. 강압적으로 하나님 경외심을 피조물에게 주입시키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 P46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의 세상 통치는정의롭습니다. 하나님의 세상 통치는 잘 작동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로부터 이런 평가를 기대하셨다. 하나님이 원했던 이런 자기음미적 확신을 사탄이라는 대적자가 부정할 때, 하나님은 그 사탄을 책망하거나 축출하지 않고 사탄마저도 납득시키기 원하셨다.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에게도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곧 하나님 성품에맞는 방식으로 이 질문에 답변하기 원하셨다. 여기가 가장 큰 위기다.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방식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 P47
하나님 성품에 맞는 방식으로 사탄을 납득시키려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사람을 찾아야 했다.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하나도없다(욥 1:9)는 사탄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하나님은 까닭 없이, 혹은 마이너스 까닭(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부조리한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찾아내야 했다. 하나님은 당신이 "내 종"이라며 친애하시는 욥이 그런 사람이라고 보셨다. - P47
12절은 독자들을 다소 놀라게 만드는 하나님의 허락이다. 사탄에게 욥의 모든 소유물 처분을 맡기되욥의 몸에는 손대지말 것을 명하신다. 사탄은 소기의 성과를 거둔 듯한 인상으로 하나님존전을 떠난다. 욥의 인생이 하나님과 사탄의 논쟁의 시시비비를 따지는 과정에서 실험 대상이 된다. 고대나 현대의 많은 독자들은 야웨의 신적 임의성에 절망하고 분개한다. - P48
갈대아 사람들은 주전 6세기 느부갓네살이 이끄는 바벨론의 핵심 족속을지칭하며 욥 당시에는 ‘갈대아인‘으로 불리는 족속이 존재하지 않았다. ‘세 무리‘를 지었다는 말은 갈대아인들의 세 차례 유다 침략주전 597,587-586, 582년을 에둘러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 P49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너무나 구체적인 불행과 고통을 당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기 힘든 스토아 철학자의 아파테이아 같은 초탈언어다. 불교나 노장사상의 도를 터득한 사람의 반응처럼 보인다. - P50
그는 자신의 불행에 오열하기보다는 오직 "야웨의 이름이 찬송받기를 기대한다. 야웨의 이름은 출애굽기 34:6-8과 시편1037에 나온다. ‘인자하고 긍휼이 풍성하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간죄를 초극할 정도로 항구적인 인애를 베푸시는 분‘이것이 야웨의이름이다. 욥은 의인인 자신에게 닥친 재난 때문에 하나님이 오해받거나 비난받는 것을 염려한다. 그래서 야웨의 이름이 비난받거나 원망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오히려 "찬송을 받을실지니이다"라고 축원한다. - P50
22절은 욥을 더욱 비현실적인 존재로 묘사한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원망하지 않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구문은 ‘어리석음을 드러내지 않다‘라는 말이다. 이 불행한 사태를 두고 하나님의 의도를 오판해서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현대 독자들에게먼 과거의 낯선 세계에서 툭 튀어나온 인물처럼 비치는 욥에 비해 오히려 욥의 아내는 매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비현실적으로 경건한 욥에 비해 그녀는 차라리 현대인의감수성을 표출한 것 같다. - P51
그러나 한 단계 더 생각하면, 7남 3녀를 잃은 욥이 자아 소멸을 겪었기에 이런 냉정을 유지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P51
그런데 7남 3녀를 잃은 아버지의 경우에는 아예 슬픔을 느끼고 표현할 자아가 증발된다. 울려면 자아가 있어야 하는데 욥은 그런 애통감정을 표현할 자아가 소멸된 것처럼 보인다. 욥은 7남 3녀를 잃고 몸에 악창이 나도 순전함을 지켰다. 욥은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스토아 철학자 같은 인물로 보인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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