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존재와 존재자 사이

레비나스의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는 같은 해에 나온 강연록 <시간과 타자>(1947)와 함께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서 출발했지만 바야흐로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을 구축하기 시작한 레비나스의 '야심작'이다. 비록 아담한 판형에 분량도 100쪽이 조금 넘을 정도로 소략하지만(영역본은 100쪽이 되지 않는다), 자신이 20세기의 '철학사적 사건'이라 명명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고 있는 책이기에 그러하다(두 사람의 대결을 제대로 관전하기 위해선, 따라서 하이데거에 대한 예비적인 독해가 필요하다. 하이데거가 얼마나 강자인가를 확인해두어야 이 '도전장'의 의미가 음미될 수 있다. 가서 하이데거에게 얻어맞는 일은 각자가 해보시길).

잘 알려진 바대로, '존재자에서 존재로'(하이데거)에 대항하는 레비나스의 구호는 '존재에서 존재자로'이다. <존재와 시간>이 '철학사적 사건'이라면 '논리적으로 볼 때' <존재에서 존재자로> 또한 그에 버금하는 사건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물론 팜플렛적인 저작으로서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레비나스 사건'의 프로그램적 윤곽 정도를 그리고 있을 따름이며(그러니까 이건 '전체주의' 철학의 거두 하이데거에 던지는 레비나스의 잽이다), '사건'의 전말이 다 드러나게 되는 것은 <전체성과 무한>(1961)에 와서이다(이게 어퍼커트이다). 

<전체성과 무한>은 아직 우리에게 번역/소개되지 않은 관계로(물론 해설들은 차고 넘친다), 우선은 레비나스의 잽만 맛보기로 한다. 그런 생각으로 집어든 것이 오래전에 사둔 국역본 <존재에서 존재자로>(민음사, 2003)이다.  당시에 내겐 비교해볼 만한 영역본이나 러시아어본이 없었기 때문에 독서는 자연스레 미루어졌는데, 어느덧 3년전이다. 한데, 이번에 주문받은 글도 있고 해서 (없는 시간이지만) 이참에 완독해보리라 책을 펼쳤다. 알폰소 링기스의 영역본(3판, 1995)과 러시아어본(2000)도 백업으로 준비하고서.  

한데, 분량상 수월하게 읽을 줄 알았던 국역본은 초반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인문 번역서의 첫페이지부터 오역이 등장하는 건 절대로 드문 일이 아니지만(차라리 그런 게 고마운 일이긴 하다. 책에 대한 '판단'을 빨리 할 수 있도록 해주니까), 이 공들인 번역서에서(역자는 부록에서 번역어에 대한 해설과 일람표까지 제시하고 원서의 오기까지도 교정하고 있다) 어떻게 첫문장에서부터 오역이 튀오나올 수 있는지 정말 미스터리하다('철학책'들이 '추리소설'과 얼마나 동종적인가를 새삼 확인시켜주는 역자의 고난도 유머가 아닌가란 생각도 했다). 서론의 그 첫문장이다.

"존재하는 것과 그것의 존재 자체 사이의 구별, 개별자, 유, 집단, 신 - 이런 것들은 명사들 및 그것들의 존재 사건 또는 존재 활동을 통해 나타나는 것인데 - 사이의 구별은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19쪽)

단어들에 병기된 불어는 인용에서 삭제했는데, 중간의 삽입절까지 삭제하면 이 문장의 요체는 이렇게 된다: "존재하는 것과 그것의 존재 자체 사이의 구별, 개별자, 유, 집단, 신 사이의 구별은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여기서 철학적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번역문에 따르면, (1)존재하는 것과 그것의 존재 자체 사이의 구별, (2)개별자, 유, 집단, 신 사이의 구별이다. 그리고, 조금 주의깊은 독자라면, 구문적으로 병행적인 이 두 가지 구별이 실상 같은 사실은 반복진술하는 것일 터이기에 뭔가 아귀가 안 맞는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1)에서 '존재하는 것과 그것의 존재 자체 사이의 구별'은 다시 말해서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구별이지만, (2)에서 나열된 "개별자, 유, 집단, 신"들은 모두 '존재자'이므로 이건 그냥 존재자들 사이의 구별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두 가지 구별은 같지 않으며, '존재자들 사이의 구별'은 하이데거나 레비나스에게서 상대적으로 아무런 철학적 의의도 갖지 않는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영역본을 옮겨오면 이렇다(집에 놔두고 온 불어본의 경우도 내가 아는 한 같은 내용이다): "The distinction between that which exists and its existence itself, between the individual, the genus, the collective, God, beings designated  by substantives, and the event or act of their existence, imposes ifself upon philosophical reflection."(17쪽) 

이 문장의 통사적 핵심은 두 차례 등장하는 'between A and B' 구문에 있다. 해서, "A와 B 사이의 구별, 즉 C와 D 사이의 구별은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는 게 문장의 내용이다. 국역본의 역자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여기서 두번째 'and'이다. 그걸 연결된 수식어구로 본 것(그래서 '및'이라고 옮긴 것이리라). 영어본 문장에서 수식어구를 삭제하면 이렇게 된다:  "The distinction between that which exists and its existence itself, between the individual, the genus, the collective, God and the event or act of their existence, imposes ifself upon philosophical reflection."

'존재하는 것(ce qui existe; that which exists)'이 소위 '존재자(existant; existent/being)'이다. 즉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존재(불어, 영어로 existence)'라는 건 존재자들의 '존재함이라는 사건 혹은 행위'(existing; Being)를 가리킨다. 이 '존재'를 흔히 우리말로 '있음'이라고도 옮기는데, 나는 '있다는 것'으로도 새긴다. 그러니까 '있는 것들'과 그것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 사이의 구별이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구별이며, 이 둘 사이의 차이, 즉 (하이데거의 전매특허이기도 한) '존재론적 차이'가 레비나스가 하이데거의 가장 중요한 기여로 꼽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덧붙이자면, 하이데거에게서는 이 존재자(=있는 것들)와 존재(=있음)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서 존재는 항상 '존재자의 존재'이다. 반면에 레비나스는 그 둘 간의 분리를 가정한다. 소위 '존재자 없는 존재' 그것이 레비나스 철학의 출발점이다.    

어쨌든 첫문장이 왜 오역인지는 확인한 셈이다. 사실, 영역본이나 러시아어본과 대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나는 왜 이런 '실수'가 빚어졌는지 궁금해서 불어본(1947년판이었다)을 도서관에서 복사하기까지 했다. 한데, 원서라고 해서 특별히 미스터리한 구석을 찾을 수는 없었다. 내가 갖게 된 결론은 독자들뿐만 아니라 역자나 교정자도 책을 그다지 꼼꼼하게 읽지 않는다는 것. 먹고 살 만한 고상한 독자들은 번역서를 외면하며 일반독자들이라면 이런 고상한 철학서는 일찌감치 독서 목록에서 제외된다.

하여, 이 책이 작년에 학술원 주관으로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된 데는 그런 이유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정도 흠이라면 문제삼을 만하지 않다는 판단을 심사위원들이 했었는지 모르겠지만(나는 그보다는 아무도 읽지 않았을 거라는 데 내기를 걸겠다), 만일 그런 경우라면 대한민국 학술원은 우리의 학술 수준을 대단히 얕잡아보고 있음에 틀림없다(일리가 없지는 않으나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적어도 체면이 있지 않은가?). 왜냐면 오역은 이 첫문장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서문에서 처음 이런 문장을 발견했을 때 나는 나름대로 '옥에 티'를 발견한 거라 생각하여 부듯했다: "존재 안의 이 자리는 현재의 노동이라는 주제로 제한된다."(9쪽) 이 대목의 영역은 "The theme of the present work is limited to this position in Being."(15쪽)이고, "이 책의 주제는 존재 안의 이러한 자리로 한정된다." 정도의 뜻이다. 'present work'를 '현재의 노동'으로 옮긴 것인데(역자는 불어의 'travail'를 번역 일람표대로 '노동'이라 옮겼다! 한데, 다른 대목들에선 '연구'라고 옮기기도 했으므로 역자가 문맥을 잘못 본 것이라고 할 밖에) 번역이라는 노동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가를 다시 확인하게 해준다.

그렇게 한번 웃으면서 지나갔지만, 막상 서론의 첫문장과 대면하니까 이게 웃을 일이 아니었다. 이 국역본이 런닝 바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전혀 아니며 중무장을 요구한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에(이젠 조금이라도 뜻이 들어오지 않으면, 불어본과 다른 두 번역본을 뒤적여야 한다).

서론의 25쪽도 그런 대목이다. '목적을 향한 탈자태'(영역은 'toward the end')에서 'fin'을 '목적'이라 옮긴 건 '유한성'을 다루고 있는 문맥상 '종말'이 더 적절했을 거라는 건 아쉬움이지만, "불안 없는 존재란 무한한 존재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무한한 존재라는 개념은 모순이 아니다."라는 번역문은 유감이다. 영역은 "A being without anxiety would be an infinite being - but that concept is self-contadictory."(20쪽)

이 대목의 불어문장은 내가 보기에 가정법 문장이고, 러시아어본도 가정법으로 옮겼지만("만약에 이 개념이 모순이 아니라면") 영역본과 국역본은 직설법 문장으로 바꿔 옮겼다. 그런데, 뜻은 정반대이다. 영역본에 따르면, '무한한 존재'라는 개념은 자기모순적이며, 국역본에 따르면 '모순이 아니다'. 역자가 참고했을 것으로 보이는 독역본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읽은 불어본과 러시아어본, 영역본은 모두 같은 뜻이며 '무한한 존재(infinite l'être)'를 개념적으론 모순형용이라고 진술한다. 그건 내가 보기엔 '무한한 존재자'라고 해야 한다.

우리말 '존재'도 그렇지만, 불어의 'l'être'도 모든 문맥에서 하이데거의 'Sein'에 상응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사실 역자도 "존재라고 번역하는 l'être가 문맥에 따라 '존재자'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걸 염두에 두기 바란다"(175쪽)고 적고 있지 않은가? "대부분 문맥상 어떤 뜻인지 쉽게 구별할 수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물론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구별은 단어상으로는 혼란스러운 게 사실이다(레비나스는 어감상의 이유로 기존의 역어 대신에 'existence/existant'를 사용함으로써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다). 그러한 혼란은 영역본 등의 다른 번역본들에서도 해소되지 않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내가 읽은 바 이 대목의 다른 번역들은 국역본을 지지하지 않는다. 국역본을 내가 충분히 신뢰할 수 없다고 보는 이유이다.

일반적으로 번역 작업은 '번역자에서 번역으로' 이행하지만, 이 레비나스 국역본은 부득불 '번역에서 번역자로' 관심을 돌리게 한다. '신뢰할 수 없는 번역'과 '신뢰할 만한 번역자'(그는 같은 세대의 훌륭한 인문학자이면서 경탄할 만한 논저들의 저자이다) 사이에서  나는 잠시 길을 잃는다. 이 '미스터리 극장'에서...

06. 02. 20.

P.S. 일견 단순해 보이는 오역들이어서 나는 2쇄 이후에 번역문이 혹 수정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구내서점에 가보았지만 재고가 없었다(내가 갖고 있는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1판 1쇄이다). 혹 출간 직후의 서평들에서 이러한 일부 오역들이 지적되지 않았을까도 싶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가까이에서 찾을 수 없기에 일단 이 번역서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올려둔다.  

P.S.2. 충실한 역주와 해제 등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모범적인 번역의 사례로 꼽힐 만하지만, 이 책의 '번역원칙' 한 가지는 나로선 불만스럽다. 그건 'existence'와 'existant'의 역어로서의 '존재' '존재자'에 대해서는 항상 원문을 병기해준다는 원칙이다. 즉, 본문에서는 항상 '존재(existence)'와  '존재자(existant)'로 기재된 형태만을 만나볼 수 있다. 두 용어는 레비나스 자신이 하이데거의 '존재(Sein)'와 '존재자(Seindes)'의 역어로 채택한다고 밝힌 바 있고, 역자 또한 이를 분명하게 언급해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그렇다면 같은 개념인 etant/l'être와 혼동의 여지가 없는 거 아닌가?) 매번 원문을 병기해준다는 것은 '원문에의 충실성'이라는 강박관념의 소산으로 보인다. 덕분에 훼손된 건 우리말 번역문의 말끔함이다. '존재'/'존재자'란 우리말 역어가 그렇게 못 미덥다면, 그냥 원문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아무리 '타인의 취향'이라고 해도 동감할 수 없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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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박지향, 김일영, 이영훈 외 지음 / 책세상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보통 정치사회분야 책이 출간될 때 책속의 내용들은  기존 사고체계속에 뛰어들어  새로운 '중심잡기' 를 꾀하려거나  기존의 이념, 개념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힘겨루기를 하게 된다.  어떤 글쓰기이든지  의식변화를 꾀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이미 정치성과,  또하나의 관점성을 갖게 된다 .  글을 통한 생각의 전달이라는  '사고의 광고' 는 소위 관점주의,  상대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책에서   '재인식'이라는 대립개념화된 표제 속에는 이미 특정 자리에서 바라본 개별요소들에 대한 배제, 강조, 포괄, 추상화가  전제되어 있다.   이 책의 표적이 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 도 본질적으로 좌파편향이다.  스스로를 객관이라 억지부리지는 않았으되  제시된 증거자료들만은 객관화된 진실임을 실증하였다.   < 해방 전후사의 인식> 은 소위 분단직후 우익강점의 (우익이라 불릴 가치도 없는 수구퇴폐성향의) 헤게모니 지반위에서,  무참히 제거된 반쪽 진실과,  가치들을 복권하기 위한 지향성으로 인해,  책의 논의점들이 최종 안착할 목표가 아무리 객관(중립)이라 해도  방향자체는 좌향일수 밖에 없었다.

 이런 근본 딜레마, 한계성을 고려하여  이번의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책을  최대한 수용해 보려 했으나  일단의 글들은  그동안 지겹도록 반복되었던 반쪽역사를,  가부장적 폭압으로 박제되버린 50년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스스로 표방했던 '다각적, 객관적, 실증적' 이란 수식은  견강부회하며 수집한 그들만의 자료였다.   구체적으로 꼬집자면 전쟁전후의 미군이란 존재의 정체성을 놓고  '결과지상주의'  관점 (현 남한의 체제우위의 승리?를 자축하며 과거의 모든 오류들을 긍정해버리는) 을 앞세워 특혜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소련의 책임을 전면에 부각시키기 위해 미국의 책임과 불순한 행적들을 은근슬쩍 감싸주거나 아예 빼먹고 있다.

  상징적인 일례로 한반도 분단의 가장 근본적인 단초라고 할 만한 (45년 12월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 대한 이 책이 할애한 겨우 2페이지(!)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해방전후의 재인식> 제 2권,  5부  해방 공간  ㅡ p46 ~ 47)

당시 3상회의기록 전문에 대한 어떠한 증빙자료도 없이 당시 미국측 협상대표였던 '번즈'국무장관과 '조지 캐넌'의 몇마디 발언이 이 책이 내건 객관적 자료의 전부이고!  당시 미국의 음해공작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한 국내 동아일보의 기사(45년 12월)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기사, 당시 동아일보는 이승만<한민당>의 전담지였다),   한반도를 해방시켜준 댓가로 이권을 챙기려한 미국의 조직적 개입(신탁통치를 꾀하려 여론몰이)은 이미 드러난 사료史料  인데도 이 부분에 대한 의도적인 누락은  그야말로 곡학아세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논지를 펼치는 방식도 증거한다는 자료들도  50년전 논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당시 번즈국무장관에 대한 조지 캐넌의 증언을 인용한 부분인데   " 모스크바 3상회의 당시 그는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서 전혀 아는바가 없었고,  미국에서 정치적으로  어려운 입장에 처했던 터라  당시의 회의에 대해 별 준비도, 고민도 없이 좋은방향(통일국가수립)으로 빨리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애초부터 회의결렬을 작정하고 있었던것 같다." 라는 어설픈 대목이 그대로 소개되고 있다.   이 인용문이 마치 진실의 폭로인양 소개되는 것을 보며,  이 책을 쓴 저자들이 얼마나 순진하고 졸속한 수준으로 글쓰기에 임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당시 한반도의 운명을 앞에두고 표명한다는 비공식적(하지만 진실이 담긴) 입장이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미국의 최대견제국이던 소련,중국의 지배영역권에 속해있던 한반도 (더군다나 전국민의 80%가 사회주의에 고취되어있던 나라) 를  신탁통치를 통해 어떻게든 견제용 전초기지로 만들려한 미국의 속셈을 겨우 이따위 변명으로 숨기려 했다는 것은 졸렬함을 넘어서 우리를 우롱하는 처사라고 밖에는 생각할수가 없다.    (미국은 그동안의 노력으로  현재 전세계 90개국에 점령군, 파병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신탁통치조작에서부터 전쟁발발전 미군의 의도적인 철군, 양민학살진상, 전후 정치적개입과 비밀방첩활동 등 일련의 사건들을 이야기 하게 될때,  우리들은 어쩔수 없이 반대편 주장을 거짓으로 여기며 편이 갈릴수 밖에 없게 된다.  역사를 인식함에 있어 스스로 중립이라 참칭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오만이다.  애초부터 자기는 우편이요 좌편이요 밝히는것이 차라리 솔직함일 것이다.  역사에는 정립이 없다.  단지 끝없이 이어진 설득의 과정만 있을 뿐이다. 

 미국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아니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저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과거 일제시대 부역지식인들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일제의 잔재들과 그 잔존세력들,  또 그들의 행적들을 어떻게든 정당하게 윤색하려는 저자들의 모습들.  서두에서 이미 밝힌, 민족주의를 역사의 구닥다리로 못박는 그들의 세계관에서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잔여물이 보이는 건 왜일까?

 당시 일제가 주창했던 것이, 일찌기 근대화에 앞장선 자기네 우월인종이 아시아의 주인이 되어 민족을 초월한 전아시아의 공영(지배)으로써 서양세력과의 대결이었다.  그런데 수입된 근대사상들중  '민족주의' 사상이 일제에게는 최대의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 국내의 배알없는 몇몇 지식인들이 이에 부화뇌동하여 황국신민으로 포섭(인종상승)되길 바랐던 것이다.  그런 세력의 잔당들이 친일에서  친미로 주인을 갈아치웠듯이  요즘같이 극우민족주의가 다시 득세하는 추세에 이 책의 필진들이 과연 또 어떤 모습으로  그들의 '反민족주의'를 탈바꿈하여 그들의 입맛(극우)에 맞게 이용할지 지켜볼 노릇이다.   아니 어쩌면 지켜야할 노란피부의 민족이란 애초부터 필요 없어져버린지도 모른다.  이미 자신들과는 다른 피부의 주인(미국인)을 섬기고 있으니깐.   그래서 민족주의를 버리자는 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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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잔의여유 2006-02-13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도 안읽고 썼군요. 리뷰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니 그리고 님의 그 인식에는 의문을 표합니다.왜냐하면 악이라는 것도 그 경중이 있기때문이죠.소련과 미국 둘 다 나쁜 놈이다.그러므로 아무거나 선택해도 상관없다.그것이 결과적으로 많은 민중에게 해를 끼쳤는지 모릅니다.결과주의 위험하죠.그러나 사람은 살아가는데 결과가 없으면 공허한 이상주의로 결과주의보다 더욱 위험한 생존의 문제에 모순이 생깁니다.그러한 면을 간과한다는 면에서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저의 예전 사고방식입니다.결과적으로 제가 망가졌었죠.지금도 여파가 있습니다.

한잔의여유 2006-02-13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이 책은 저도 읽지를 않았지만,내용은 대충 아는 것이 이미 학술회나 강연회에서 다룬 내용을 정리한 것뿐입니다.잘못된 부분은 시대적인 흐름때문이지,무슨 이념이니 뭐니하는 우파니 좌파니 하는 이데올로기적 사고관으로는 역사적인 사고도 70-80년대 사고관이죠.해방전후사의 인식 저도 조금 읽어봤는데,그 당시의 사고관으로는 그것이 대체로 맞습니다.님이 생각하는 역사관은 우리나라의 정치판에서 이용하는 단골메뉴일뿐이죠. 님이 증오함은 한쪽 편의 손을 들어주는 편향적인 사고일뿐이라고 저는 단정합니다.날개는 좌우 양날개로 날지 한쪽이 쎄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죠.그것은 나는 것 자체의 문제입니다.앞으로는 어느 쪽이 더 강해지는 것도 흐름의 문제일뿐이죠.

leben 2006-02-14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이 책을 다 읽지 않았습니다. 아니 못했습니다. 사서 읽기엔 돈이 너무 아까웠고 서점에서 훑어보다가 열이 받쳐서 전부 읽는다는건 고문이였습니다. 앞으로도 다 읽을 생각은 없을것 같습니다.
제글에 약간의 보충설명을 추가하였으니 논박하시려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논박하십시오. 원래 좌,우라는 이념의 대립은 서로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을 좌나 우편이라고 말하는게 아니라, 상대방을 불순물로 여기는 양태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좌우를 초월했다고 님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근본적인 한계, 아니 우리들이 지닌 한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정치적 성향자체를 문제삼고 계신듯 한데, 이 책의 필진들이 벌이는 정치적 행보(친일문제, 위안부발언, 뉴라이트운동)를 먼저 문제삼고 넘어가시길.

한잔의여유 2006-02-16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은 책을 읽지도 않고 쓴 것인데 책도 안읽은 부분을 쓴 것을 논박하라니 더 이상 할말이 없네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그리고 위안부발언 저는 원문을 봤는데,그러한 뜻이 아니던데요.이영훈교수는 알지도 못하고 안면도 없지만,그러한 왜곡된 생각이야말로 잘못된 것 아닌가요? 이명박의 다보스발언이나 노무현대통령의 다케시다발언처럼 언론에서 왜곡한 것인지 원문을 보시고 말하시길 바랍니다.더 이상 할말이 없네요.(참고로 이영훈발언중에서 몇몇문제되는 것은 학계에서는 논쟁중에 있는 사안입니다.역사쪽에 그냥 막연한 생각으로 말하지 마시고 직접 논문이나 책을 보고 말하시길 바랍니다.그러한 의미에서 말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네요.쉬운 곳으로는 역사카페같은데 가면 자료들이 나왔으니 그것이라도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님이 어떠한 정치성향을 갖든지 그것은 님의 자유이고 제가 남에게 뭐라고 할 자격도 안되니 알봐가 아니고(제 오지랖도 급한데) 그것을 터치해봤자 제 기력과 제 입만 아프죠...저는 단순히 역사적인 인식을 비판한 것인데, 님의 정치적인 성향을 비판했다고 본다면 그렇게 보세요. 그럼 ..^^

leben 2006-02-16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본의 아니게 감정적으로 글을 써놓았습니다. 너그러이 답변해주신점 고맙습니다. 님이 지적하신 부분에서 그리고 보여주신 태도에서 제가 배울점이 많습니다. 저도 망가진기억과 여파를 갖고있습니다. 보통사람들이 쏘아대는 증오의 이데올로기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저 또한 독설스럽게 변한것 같습니다. 님의 지적 다시한번 잘 살펴보겠습니다.

abcd4737 2006-02-16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파들은 그 신념에 목숨을 걸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애초에 토론이 안됩니다. 좌파토론은 모든 결론이 정해져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악 일단 붕괴시키자

인디^^ 2006-02-19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bcd4737 // 역지사지 하심이...... "우파들은 그 이익에 목숨을 걸어놓고 살기 때문에 애초에 토론이 안됩니다. 우파토론은 모든 결론이 정해져 있습니다. 좌파는 악 철저히 박멸하자." 자신 스스로 우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런식의 주장을 읽게되면 어떻게 느낄까요? 당장 전투모드로 들어가지 않을까요?

로토 // 어차피 책을 읽지도 않은 두사람이 갑론을박하는데, 자신에게도 있는 약점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면서 마치 그 약점이 상대방에게만 있다는 듯, 또한 자신에게 있는 그 약점은 별 문제될 것이 없지만 상대방의 그 약점은 상당히 문제있다는 듯한 주장...... 어디서 많이 보던 방식입니다, 그려......

그노 // 그노님의 리뷰 - 로토란 분의 말씀에 따르자면, 리뷰라는 말의 정의부터 새롭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에 감정적인 부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리뷰에 대한 로토란 분의 댓글은 훨씬 더 감정적이군요. 그런데 왜 로토란 분은 줄기차게 공격을 하고, 그누란 분은 겸허하게 사과를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감정적이란 부분 때문에 말입니다. 어쩌면 이런 순수하고 순진한 자세 때문에 좌파는 결코 우파 헤게모니를 극복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mizuaki 2006-08-23 0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이정식 교수의 논문은 책에 수록된 글들 중에서도 가장 오른쪽에 치우친 글입니다. 저자는 1931년 평안도 출신에 미국에서 교육받고 미국 대학 교수로 있는 분이고, 주제는 한국 전쟁은 스탈린의 팽창 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거랍니다. 가장 오른쪽으로 치우친 글의 그것도 일부 기술을 들어 책 전체를 극단적으로 비난하시네요.
이영훈 교수가 요즘 열받아서 싸우고 다니느라 가끔 조마조마한 얘기를 합니다만, 이 책을 우파의 반격이니 뭐니 하는 건, 이영훈이 현정부 씹는 뉘앙스 풍긴 걸 조중동이 침소봉대하는 거라고 봅니다. 이 책, 그다지 우파적이지 않습니다. 2권 615쪽에서 김철은"편집위원들은 이 책을 편집하면서 이것이 또 다른 정파적 이해나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데 처음부터 합의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좌파니 우파니 진보니 보수니 하는 용어들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욕설'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무튼 그런 식의 편 가르기가 이 책에 덧씌워지는 것을 극력 거부한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한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 책의 정치적 입장은 집단적 사고에 반대하고 개별 인간의 가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취향에 안 맞으시면 안 읽으시는 게 맞지만, 안 읽고 너무 욕하시지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전출처 : hadrianus75 > 알기 쉬운 들뢰즈!!!
시뮬라크르의 시대 - 들뢰즈와 사건의 철학, 소운 이정우교수 강의록
이정우 지음 / 거름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담론의 공간과 가로지르기를 통해 프랑스 철학을 알기 쉽게 해설해온 저자는 그 난해하다는 의미의 논리를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여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의미의 논리 전반부인 정적 발생만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나마 이부분도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도, 아니 최소한 대학생들이라도 이 책을 통해서 '버스나 전철에서도'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그럼에도 의미의 논리 중 첨예한 부분인 후반부의 동적 발생을 다루지 못한 점은 매우 아쉽다고 할 수 있다. 이후의 저작에도 이 부분은 다루고 있지 않은데, 저자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어서는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들뢰즈가 동적 발생을 다룬 부분은 현상학이나 해석학에서 주장하는 주체의 문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반증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표면 효과라는 장에서의 계열들의 발산과 그 '수동적 종합'으로서의 주체는 사실 주체 철학을 크게 뛰어넘지 못한다. 계열의 잉여(앙띠-외디프의 표현을 따르자면)인 '수동적 종합'이라는 개념 자체가 후설의 발생적 현상학의 영향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동적발생을 다루고 있는 부분은 자연이라는 존재에서 인간의 의식이 탄생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인식을 통해 존재를 구성하려는 현상학이나 해석학과 더욱 뚜렷한 경계선을 긋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에만 너무 기대고 있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의 철학을 너무너무 알기 쉽게 해설했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앞으로도 philosophe populaire로서 큰 활약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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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몽상가들'과 '69 식스티나인'에 대하여

 

 

 

 

최근에 나온 책들 얘기를 꺼내놓기 전에 최근에 개봉한 영화 두 편에 대한 얘기부터 늘어놓기로 한다. 그 두 편이란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과 이상일의 <69 식스티나인>이다. 전자는 68년에 관한 영화이고, 후자는 69년에 관한 영화이다. 이미 한국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나로선 영화관에 들락거릴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게 아주 당연하기에, 개봉 영화들을 본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몽상가들>은 러시아에서 산 비디오시디를 노트북에 복사해놓고 있기 때문에 가끔 볼 때가 있다(러시아어 시나리오도 갖고 있다). 그리고 <69>에 대해서는 몇 개의 영화평을 통해서 대략 어림짐작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를 다룬 영화이어서인지 근래의 영화평들 가운데는 두 영화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것도 드물지 않다. 오늘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몽상가들>, 혁명은 노는 것"(<필름2.0>)이란 평도 그런 경우인데, 베르톨루치의 영화를 비교적 호의적으로 평하면서 이렇게 언급한다: "물론 <몽상가들>의 결말은 시시하다. 어쩌면 베르톨루치는 그 당시 거리에서 벌어졌던 혁명에 대해서는 말할 게 없었는지도 모른다.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럴 바에야 지지 않는 법은 웃어주는 것이다. 이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 <69>에 나오는 전언이기도 하지만 베르톨루치는 그걸 다른 방식으로 얘기할 뿐이다." 소설 <69>는 물론 영화 <69>의 원작이다. 요컨대, 베르톨루치와 무라카미 류/이상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같은 내용은 얘기하고 있다는 것. 그 같은 내용이란 글의 제목을 빌자면, '혁명은 노는 것'이라는 전언이다.

<몽상가들>에서 김영진이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이런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테오와 이자벨 부모가 휴가를 마치고 잠시 집에 들렀을 때 그들은 자식들과 그들의 친구가 저질러놓은 완벽한 집안의 무정부주의적 혼란에 질겁하면서도 그걸 존중해준다. 그들은 내색하지 않고 용돈을 던져놓고는 다시 휴가를 떠난다. 이 장면은 충격이다. 다음 세대의 도덕을 현재형으로 강요하지 않는 자그마한 혁명의 도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보수적이었던 프랑스 사회가 오늘날의 수준만큼이나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은 여하튼 실패한 부르주아 혁명이었던 68년 5월 혁명 덕분이다."

갓 스물에 이른 세 청춘남녀가 서로 벗고 뒹굴고 하는 '관능의 막다른 골목에서 혁명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걸 읽어내는 건 평론가의 권리이고 관객의 권리이다. 하지만, 자유로운/방종한 아이들의 '무정부주의적' 혼란을 부모들이 존중해주는 장면에 대해 '충격적'이라고 하는 것은 좀 오버이다. 부모가 그렇게 방임하는 것은 그들이 성인이어서라기보다는 아직 (순진무구한) 어린애들이기 때문은 아닌가? "그들은 내색하지 않고 용돈을 던져놓고는 다시 휴가를 떠난다"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혁명을 자기들끼리의 '노는 것'으로 전유할 수 있는 물적 토대는 부르주아인 부모의 돈이다. 그 돈으로 히히덕거리면서 "자신들의 출신 성분의 토대를 공격"한다는 게 얼마만큼의 진정성을 가질까? 강남의 여피족들이 자녀가 대마초를 피우고 혼음하는 걸 방임하는 일이 과연 얼마나 '혁명적'일까? "뼛속 깊이까지 가부장적 도덕으로 무장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 방임에 의해서 과연 머지 않은 미래에 프랑스 수준만큼 진보할 수 있을까? 뼛속 깊이 가부장적이기는커녕 피부와 머리카락까지 노린내를 풍기면서 길거리에서 자기들끼리의 영어로 떠들어대며 흥청대는 일부 유학생들의 비가부장적인 행태에서 과연 어떤 '진보'를 식별해낼 수 있을까?

해서 영화 <몽상가들>에 베르톨루치 자신과 자신의 세대에 대한 얼마만큼의 애정이 담겨있는지 나로선 가늠할 수 없지만(내가 이 영화에서 읽는 건 주로 영화광 어린애들의 치기에 대한 비아냥이기에), 이 영화가 '청춘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라는 문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순응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본 베르톨루치의 걸작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이며, 거기에는 '몽상'이 아닌 '현실'이 그려져 있다(그러니 '마지막 탱고'는 '마지막 몽상'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러한 현실과의 조우(혹은 상징적 거세)를 장면화하고 있지 않은 영화 <몽상가들>은 역설적이지만, '미성년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불과하다.

"남녀성기의 노출과 혼음을 전면 허용한 것은 처음"(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등급분류소위원회)이라는 데, 사실이라면 이 영화는 내가 본 러시아판과 마찬가지로 세 남녀가 말 그대로 발가벗고 나온다(이 영화는 영화사적 의미가 아닌 '개봉사적 의미'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장면 정도로 '성인'영화의 등급을 받을 수 없다는 것 또한 당연하다. 발가벗고 나오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은 이 영화가 철없는 미성년들의 영화이며, 미성년들을 위한, 애들을 위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마음껏 상상하라, 그리고 마음껏 벗어제껴라, 돈은 줄 테니까."라는 식이니까. '혁명은 노는 것'을 조금 비틀어서 말하자면, '혁명은 돈이 좀 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지난주 <필름2.0>은 <몽상가들>에 대해서 김영진과는 전혀 반대되는 평을 실었는데, "발가벗은 육체가 놓친 것"이란 제하의 평에서 평론가 정지연은 이렇게 쓴다: "베르톨루치가 <몽상가들>에서 부활시킨 68년 5월은 혁명조차도 유희로 쾌락했던 시네필들의 몽환적 시기에 다름아니다. 혁명이 계급이 아니라 세대에 의해 수행된다는 벤야민의 직감이 맞는 것이라면, 이들이 혁명을 수행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테오와 이자벨은 랑글루아 시위에 동참하고, 급진적 사회변화를 거부하는 아버지에 맞서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하나의 제스처에 불과하다. 이들의 방에 붙어 있는 <중국여인>의 포스터, 마오 형상의 스탠드, 들라크루아의 그림은 단지 실내장식물일 뿐이다. 이들은 거리의 진실에 관심이 없다. 그들을 지금 사로잡은 것은 부르주아의 요새와도 같은 아버지의 저택에서 고급 와인과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에로스의 쾌락일 뿐이다."

다른 대목들에서 비친 '엄숙주의자'적 시선에 내가 동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용한 대목에 대해서는 십분 동의한다. 다만, 나로선 <몽상가들>을 비판하는 정지연의 시각이 '몽상가들'을 비아냥거리는 베르톨루치의 시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입각점은 다르더라도). 듣기에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베르톨루치는 1970년작 <순응자>를 통해 변절하며 자신의 '아버지-형상'인 고다르를 매우 증오했다고 한다. 내가 <몽상가들>을 처음 보면서 느낀 것은 (프랑스 시네마테크의 설립자인) 랑글루아의 아들들, 고다르와 트뤼포에 대한 베르톨루치의 비아냥이다. 그는 그들을 비판하는 대신에 다만 그들이 순진했다고 말한다. 이미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도 그는 68혁명의 '한계'와 '좌절'을 거리를 두고 우회적으로 그려낸바 있다. 그 영화에서 말론 브란도를 베르톨루치와 동일시할 수 없듯이 <몽상가들>에서 (미국에서 건너온) 매튜를 (이탈리아에서 건너갔던) 베르톨루치와 동일시할 수 없다.

나는 그런 방향에서 이 영화에 대한 평이 나오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는데, <필름2.0>의 두 평론가는 좀 다른 방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러시아어 대사들을 듣는 통에 내가 잘못 이해한 대목들이 있었는지도). 나중에 다른 지면의 영화평들을 들춰봐야겠다(주로 <씨네21>을 보던 내가 <필름2.0>를 들추게 된 건 '돈' 때문이다. 1/3 값이니까. 돈 때문에 고민하는 건 성인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은 된다. <필름2.0>에서 제일 재미있는 코너는 <토크2.1>이다).

영화 <69> 또한 사정은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 영화에는 "데모나 바리케이드 같은 것, 멋지다고 생각해"라는 여학생이 나오고, 이 여학생 때문에 학교를 봉쇄하기로 마음먹는 남학생이 등장한다고 하니까. 원작소설보다는 경쾌하다고 하는데, 그래도 기본 설정 자체는 유지되고 있을 터이다. 지난주 문화일보에 실린 영화평(이안젤라의 시네마토크)에 의하면,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골학생들은 "한편으로는 학교 바리케이드 봉쇄를 실행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록 페스티벌을 기획한다. 한편으로는 미군기지 담을 넘는 반미적 일탈사고를 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흑인병사의 성교장면을 훔쳐보면서 영어와 미국문화에 빠져든다. 왜냐고? 이들이 세상에 이기는 방법으로 택한 전략이란 바로 즐겁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즐겁게 사는 투쟁 전략 또는 청춘의 핑계'로 지양하고자 하는 것은 "전후 기성세대의 보수적 권위주의와 전공투로 상징되는 좌파학생운동의 급진주의"이다. 그들은 이 양 진영을 조롱한다. 모든 건 "눈 앞에 있는 여학생"을 위한 것, "바리케이드도 페스티발도 그 여학생에게 주목받기 위한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유희는 청춘의 특권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청춘들이 모두 기성세대가 돼 버린 지금도 그럴까?

지난주 <필름2.0>의 <69>를 다룬 영화평에서 평론가 이상용은 (프랑스 68혁명을 모방한) 이 해프닝성 짝뚱에도'진실'은 있다고 쓴다(<몽상가들>에 의하면, 68혁명 또한 폼이자 제스처에 지나지 않지만). "68혁명에 대한 답변이라고 읽히는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서인 <안티 오이디푸스>를 빌자면, 혁명이란 사회나 인간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욕망이어야 한다. 켄 일행은 그 누구보다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하다. 그것이 비록 고다르의 영화를 핑계대어 여학생을 꼬시고, 레드 제플린의 음악을 빌어 자유를 흉내내는 것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충실히 배설한다. 켄은 입버릇처럼 즐거우면 모든 것이 괜찮다고 말한다. 정답은 여기에 있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담은 청춘의 기관차는 무언가를 재보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가득 안고 부딪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구 반대편에서 체험한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이었다."

재일교포 감독 이양일도 이 영화에서 "지금은 없어진 그 시대 젊은이들의 에너지를 회생시키고 싶었다"라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은 다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 68세대나 69세대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류, 혹은 기성세대가 된 지금 왜 세상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걸까? 혹은 왜 이것밖에는 달라지지 않은 걸까? 그건 '즐거움' 자체가 우리 삶의 물적 토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특정한 사회적 토대와 관계가 허용하는 상부구조이자 잉여이고 기분이다. <69>를 쓰는 작가는 그걸 써서 밥벌이를 하는 전업작가이다. 거기에서 즐거움만 읽어내는 건 순진한 태도이다. 다들 아는 것이지만, 69라는 건 특정한 성적 체위이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욕망을 대변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하지만, 69라는 체위만으로는 어떠한 재생산(reproduction)도 가능하지 않다. 바꿔 말하면, 그 욕망은 아무런 물적 토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니, 그러한 기호가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이었다면(<몽상가들>에서도 그렇지만), 혁명이란 그저 폼(form)이며 폼(foam)이다.

마음껏 전시되는 육체들에도 불구하고 <몽상가들>은 내게 틴토 브라스의 영화들보다도 재미가 없었는데(물론 브라스는 주로 엉덩이를 전시한다), <69>는 그보다는 재미있을 걸로 보인다. 하지만, 재미 혹은 재미의 윤리(fun ethic)는 말 그대로 (자기충족적인) 재미를 위한 것이다.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한 것. 거기에 진정한 혁명이니 기운이니 하는 문구를 갖다 붙이는 건 보기에 불편하다. 혁명이 아무리 대단한 게 아닐지언정 거기엔 피흘림이 있고 피냄새가 섞여 있다(그런 점에서 아직 보지 않았지만, 내가 지지하는 영화는 최양일의 <피와 뼈>이다. '피와 뼈'에 비한다면 '69'는 애들 장난이다). 그게 마스터베이션과의 차이이다...

P.S. 최근에 나온 책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영화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굳이 책 얘기를 덧붙이자면, 베르톨루치에 관한 것으로 <베르톨루치, 중요한 장면들>(예건사, 1991)을 들어볼 수 있다. 절판된 책이어서 구하기가 쉽진 않지만). 글을 나누는 수밖에. 제목도 바꿔서 걸고. 아즈마 히로키 얘기도 덧붙이려고 했는데, 복사한 글을 들고 오지 않았다. 다음에 보완하기로 한다...

05. 03. 28

 지난주 <한겨레21>에 두 영화에 대한 소개 기사("청춘의 꽃, 68을 기억하는가")가 실린 걸 뒤늦게 읽었다. 내가 읽은 평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균형이 잡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이 기사를 먼저 읽었더라면 나는 굳이 두 영화에 대해 군말을 덧붙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 대목만 인용해 둔다: "두 감독이 돌아보는 60년대는 같으면서 다르다. 두 영화는 60년대를 혁명의 시대이기에 앞서 축제의 계절이었다고 회고한다. <몽상가들>은 섹스를, <69>는 청춘을 내세운다. 인류의 마지막 청춘세대였던 68세대 출신인 베르톨루치 감독은 60년대를 돌아보며 분열한다. 베르톨루치는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영화는 60년대를 조롱한다. 베르톨루치는 “미래에 대해 깊은 우울감을 가지고 있을 요즘 젊은이들에게 나는 긍정적으로 희망으로 가득 찼던 그때를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몽상가들>은 매튜의 시선을 빌려 쌍둥이 남매의 일탈적 행동이 미숙아들의 자폐적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감독은 자신의 세대를 긍정하고 싶어하지만, 감독을 포위한 현실은 감독의 무의식에서 희망을 거세한 듯 보인다. 그의 시선은 자꾸 이상과 현실의 균형을 찾는 매슈에게 쏠린다." <몽상가들>에 대한 유효하면서도 적절한 읽기이다(내가 말하고 싶었던바 또한 <몽상가들>이 60년대에 대한 베르톨루치의 '조롱'혹은 비아냥이라는 것이다)...

 0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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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새해 1월 1일에 "시편 1편에 대한 읽기"라고 운을 떼고서 한참 늑장을 부린 글을 대충 정리하도록 한다. 어느덧 1월의 중순이다. 딸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같이 안 가면 혼자만 지옥에 간다고 아이가 엄포를 놓는다) 얼떨결에 주일마다 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또 놀면 뭐하겠느냐고 가서 하는 짓이 영한 성경을 펼쳐놓고 '고전'을 음미하는 것이다. 그건 코란이건 불경이건 마찬가지이다.

특별한 신앙심을 갖고 있지 않은 탓에(참고로 나는 '신은 없다'라고 주장하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나는 그냥 '신이 있으나 없으나'를 믿는다. 더불어 내가 존중하는 팩트는 신이 존재하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의 존재는 확실하다는 점이다. 모든 팩트는 존중되어야 한다), '성경'을 읽으며 감동을 받는 일은 좀처럼 없지만, 인류의 한 '고전'으로서만큼 언제든지 읽어볼 용의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에 <성서 이야기>를 읽은 지도 오래된 만큼 이 참에 '시편' 정도는 읽어두는 게 도리일 것 같기도 하고.

 

 

 

 

겸사겸사 구한 책은 지난 여름에 출간된 이원우의 <성서>(살림, 2005). "서양문화의 뿌리이자 원류인 고전, <성서>"라고 규정해놓은 것이 일단 마음에 든다(한데, 책은 그다지 많이 팔린 것 같지 않다). 400쪽 정도의 분량이므로 '부피'에 대한 나의 요구도 얼마간 충족시키고 있다. 다만, '관련서'라고 참고문헌을 나열해 놓은 대목에서 '허걱'했는데, 모두가 영문으로 된 신학 원서였던 것. 한국어 참고문헌이 왜 하나도 없는 것일까, 의아했는데, 저자가 미국의 한 대학 종교학과 교수였다. 그러니 한국어 책을 읽어볼 기회가 아예 없었던 것. 사정은 이해할 만하지만, 참고문헌에 대한 실제적인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다는 건 유감이다. 이전에 사놓고 읽다 만 <인간을 옷을 입은 성서>(책세상, 2001)을 다시 들춰봐야겠다.

참고로, 내가 갖고 있는 관련서는 디스커버리 총서의 <성경>(시공사, 2001)이 거의 유일하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성서의 기호학적, 정신분석학적 해석에 대한 책들도 갖고 있고, <예수는 신화다>(동아일보사, 2002)나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현암사, 2001) 등도 소장도서이다. 지젝 덕분에 바울에 관한 책들도 몇 권 되고. 하니 엄살을 부릴 일은 아니고 게으름이나 탓해야 할 일이겠다.

 

 

 

 

하지만 욕심은 또 욕심 나름이니, 더 여유가 된다면 클라시커 시리즈의 <성서>(해냄, 2002)와 <아시모프의 바이들>(들녘, 2002) 정도를 서가에 꽂아두고 싶다. 2권짜리 <기독교 죄악사>(평단문화사, 2001)도 읽어두고 싶은 책이고. 비록 종교학 강의들은 몇 과목 들은 바 있으나, 기독교에 대해서는 '문외한' 수준이니만큼(보다 정확하게는 '무관심'이었지만) 나머지 책들은 대개 리뷰 등을 참조해야 하는 형편이다. 내가 '관련서'나 '참고문헌'에 민감한 이유이다. 

  

 

 

 

낮에 아서 단토의 책을 구하기 위해 구내서점에 들렀었는데, 아가페출판사에서 나온 <쉬운성경>(2004/2005)이 눈에 띄었다. 실상은 공동번역 성경의 고답적인 어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성경 읽기를 미루어두기도 했는지라(비슷한 이유에서 나는 우리 법전들을 읽지 않으며 의학서적들을 읽지 않는다. 모두가 어휘나 통사 모든 면에서 아직 일본어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 경우, 아버지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고시 공부를 하지 않은 이유는 6법전서의 '문장들'이 맘에 들지 않아서이다. 최근에 나오고 있는 '순한글' 법전들의 경우 얼마만큼 개선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번쯤 훑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읽고자 했던 시편 1편은 이렇게 번역돼 있었다.    

A

1 행복한 사람은 나쁜 사람의 꼬임에 따라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죄인들이 가는 길에 함꼐 서지 않으며
   빈정대는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2 그들은 여호와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깊이 생각합니다.
3 그들은 마치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새가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입니다.
4 나쁜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바람에 쉽게 날아가는 겨와 같습니다.
5 그러므로 나쁜 사람들은 하나님꼐서 내리시는 벌을 
   견뎌 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죄인들은 착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6 착한 사람들이 가는 길은 여호와께서 보살펴 주시지만
   악한 사람들이 가는 길은 결국 망할 것입니다.

이와 비교해 볼 것은 기존의 성경 번역이다.  

 

 

 

 

B

1.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걸 우리말답게 약간 푼 번역도 있었다.

C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 지 아니하며,

2.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

4.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다.

5. 그러므로 악인은 심판받을 때에 몸을 가누지 못하며, 죄인은 의인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한다.

6.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그리고 영역본(그밖에 러시아어본도 참조했지만, 여기에 옮겨놓지는 않겠다). 물론 영역본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며 아래에 옮겨온 것은 그 중 한 가지일 뿐이다. 시편 1-2편에는 따로 제목이 붙어 있지 않으며 영역에 붙은 제목은 주석상의 필요 때문에 달려 있는 것이다. 1편의 내용인즉슨, '의인의 길과 악인의 종말'이라는 것.

PSALM 1: The Way of the Righteous and the End of the Ungodly

1. Blessed is the man
   Who walks not in the counsel of the ungodly.
   Nor stands in the path of sinners,
   Nor sits in the seat of the scornful;

2. But his delight is in the law of the LORD,
   And in His law he meditates day and night.

3. He shall be like a tree
   Planted by the rivers of water,
   That brings forth its fruit in its season,
   Whose leaf also shall not wither;
   And whatever he does shall prosper.

4. The ungodly are not so,
   But are like the chaff which the wind drives away.

5. Therefore the ungodly shall not stand in the judgment,
   Nor sinners in the congregation of the righteous.

6. For the LORD knows the way of the righteous,
   But the way of the ungodly shall perish.

 

진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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