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행복나침반 > 쉽게 읽는 한국 현대 경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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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도난마 한국경제 - 장하준.정승일의 격정대화
장하준 외 지음, 이종태 엮음 / 부키 / 2005년 7월
평점 :
장하준, 정승일 교수와 이종태 기자가 한자리에 앉아 엮어낸, 한국의 현대 경제의 이야기. 목차를 들여다보면 이는 경제학이라기보다 사회경제학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래서 난 주저없이 이 책과 인연을 맺었고, 본문을 읽으면서 꽤 흡족했다. 우리가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경제부문, 특히 시대정황과 맞물려 들어가는 경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저질스러운’기사나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은폐시키는 경제의 면면을 좀 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대화는 과거의 진단으로부터 시작된다. 박정희의 개발독재체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경제학적 입장에서), 재벌개혁, 과연 경제 민주화인가? 등 현재 관심의 초점이 되는 명제들이 화두로 던져진다.
저는 아까 '박정희가 경제 개발에 성공했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이를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면 '박정희가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에 성공했다.' 혹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비교적 자립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을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주장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노동자를 착취했지만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엔 성공했다는 이야기죠. …(중략)… 예컨대 이승만 체제와 박정희 체제의 차이는, 전자의 경우 민중들로부터 수탈한 부를 흐리멍텅하게 낭비해 버렸다는 겁니다. 남미도 마찬가지고요. 그에 비해 박정희 시대의 국가는 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해 수탈한 부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투자하도록 강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유명한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 때 박정희가 당시 이병철 회장을 불러 '당신, 이제부터는 중화학 공업 등 제대로 된 산업에 투자하라.'고 강요했던 거 아닙니까? 이런 과정에서 한국의 자본가들은 당장 이익을 거둘 수 없음에도 어쩔 수 없이 정부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한국의 경제 발전은 착취 때문에 성공했다기보다는 착취한 부를 효율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정승일) p. 53 - 54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박정희 개발 독재 체제에 대해서, 비민주에 대해 반대할 따름이지, 그가 비자유(어떤 의미에서?)적인 입장이었다는 데에서는 옳은 판단이었다고 말한다. 비민주와 비자유. 그들이 경제학자이기 때문에, 용어 선택을 하는 데에 있어서 조금은 쉽고 만만하게 선택하는가 보다, 라고 일단은 넘어간다.
박정희가 자립적인 경제체제를 세우려고 노력했고, 사회․정치부문에 있어서도 자활하기 위해 외세의 간섭을 싫어했다는 것을 우리는 물론 잘 안다. 그래서 미국이 박정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다. 어찌됐든 그는 엄청난 경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게 그의 독재방식이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정말 박정희에게 경제 발전에의 찬사로 꽃을 바칠 것인가. 우린 고민해야 한다. 일제시대 때부터 체화된 어떠한 비굴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못을 박은 게 바로 박정희이다. 어떠한 폭력에의 정당성.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음을 알려준 것이, 또 우리안에 자기검열의 끝없는 칼날을 곶추세우도록, 아직까지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 장본인도 바로 그이다. 그래, 이 부분. 그들이 비민주와 비자유로 나누어 민주와 자유를 묘한 관계로 긴장시킨 이 대목. (도대체 민주와 자유가 왜 다른 맥락이라는 것인가? 난 이해하지 못하겠다)
우리의 경제에 기틀이 잡힌 것에 우리가 고마워하고 꽃을 바쳐야 할 사람들은 엄청난 노동량을 이겨내며,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던 여공들이다. 왜 장하준과 정승일은 그 여공들의 노동착취로 생겨난 잉여 자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가? 베트남전 참전과 이 땅의 조상들의 피의 댓가와 겨레의 울분을 댓가로 받은 ‘독립 축하금’에 대해서는 왜 일절 한 마디가 없는가? 그래, 박정희가 경제의 기반을 잡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돈 몇푼이 구른다고 자본이 되지는 않는 법. 왜 자본을 만들기 위한 폭력적인 ‘원시자본’에 대한 발언은 어디 한 구석도 찾아볼 수가 없는가. 우리나라 국민이, 젊은이가, 좌파가 ‘박정희 알러지’가 있다고 인정할 건 인정하자곤 하지만, 난 그 자본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뿌리를 짚지 않은 것이 참으로 유감스럽다. (경제학자라 언급할 가치를 못느꼈다면 할 말은 없으나, 본디 이 책의 성격은 사회경제학에 더 가깝다)
한국에서는 '노동 시장 유연성'이라고 하면 곧바로 '수량적 유연성' , 즉 '자본 측이 노동자들을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자를 수 있는 정도'만 가리키게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노동 시장에서 '수량적 유연성'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바로 '기능적 유연성'이거든요.
예컨대 일본의 경우 노동 시장이 수량적 유연성 측면에서 상당히 경직된 시장, 즉 노동자를 함부로 자를 수 없는 시스템임에도 불구하고 국제 경쟁에서는 뒤지지 않는 나라인데, 그 비결 중 하나가 바로 기능적 유연성에 있습니다. 일본 기업들은 내부 교육 시스템을 통해 노동자들이 여러가지 기능(다기능)을 갖출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때문에 시장의 수요가 변화해 현재와 다르거나 더욱 개량된 제품을 생산해야 할 때 기존의 노동자들을 생산 라인만 바꿔서 그대로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노동자들을 자를 필요가 없지요. ...(중략)... 이런 노동 시장의 기능적 유연성이 일본에서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수량적 유연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량적 유연성이 없기 때문에, 즉 일자리가 불안하지 않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노동자에게 투자할 인센티브가 생기고, 노동자도 그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우려는 인센티브를 가지게 된 거죠. 그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이야기하는 노동 시장 유연화는 수량적 유연성만을 겨냥한 것 아닙니까? 결국 우리나라는 로우-로드 전략으로 가고 있는 거죠.(장하준) p.145~147
물론 우리가 교과서에서만 읽고 곧 잊고 있었던 기능적 유연성을 짚어준 것이 마음에 들었다. 책에서만 보았지, 우리나라에서 도입하지 않기에 잊고 있던 기능적 유연성. 사양산업이나 혹은 인력 재배치를 위해서 기업에서 손을 쓰면 못 옮기겠다 땡깡을 쓰는 노동자들, 참 많다. 사측에서 옮기라고 하는 거니 좌천으로 인식이 될 수도 있겠고, 기능을 익힐 시간이 필요하다보니 물론 현재의 자리보단 못한 것이 당연지사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이뤄지지 않고 있는 노사간의 대타협, 또 노동자간의 연대와 단결이라 할 수 있겠다. 저임금 노동자가 고임금 노동자를 시기․질투하고, 고임금 노동자는 저임금 노동자를 깔보고 무시하는 게 우리나라의 현실인데, 어떻게 서로 대화가 통할 수 있겠나 싶다. 고임금 노동자가 파업을 하면 무조건 ‘지들이 왜해?’ 란 식으로 밀어붙이고,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너희랑 우리가 같아?’란 식으로 무시하는 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회사에서 90%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는 게 아닌가 싶은 요즘이다. 임금을 많이 받던 노동자들도 하루아침에 회사에서 잘리고 다시 비정규직으로 입사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한다. 노동자들끼리도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는데, 사측과의 협상이 될 리도 없다. 하루빨리 스스로가 노동자임을 확인하고 함께 살아갈 길이 어떤 길인지 모색하는 모습을 보였음 한다.
그게 바로 신자유주의의 기본 정신과 통하는 거에요. 단기주의! 그냥 우선 쉬운 것을 하는 거죠. 축산업 규제 풀어 주면 고기를 싸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후엔 결국 광우병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공기업인 철도 산업을 민영화한 뒤에 투자를 안 하고 수익률 높인 건 좋았는데, 10년쯤 지나니까 열차 사고가 빈발하잖아요. 이렇게 단기 수익 올리려고 노조 탄압하고 해외에서 저임금 노동자 수입하다 보면 당장엔 기업이 살아날 것 같은데, 장기적으로는 업그레이드를 못하게 됩니다. 결국 망하는 거죠.(장하준) p.171
세계는 바야흐로 후기 자본주의사회를 맞고 있고, 신자유주의는 극대화되었다. 초극적 자본이 이윤 추구만을 목적으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본을 굴린다. 자본의 회전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몸뚱이가 커질수록 빨라지고 또 훨씬 더 커진다. 우리가 경제학에서 제일 처음 배우는 것은 자원은 지구 내에 한정되어 있고 결국은 이게 돌고 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자본은 몸뚱이를 부풀릴 수 있는가? 거기에는 임금노예에 대한 노동력 착취가 숨겨져 있다. 결국 우리가 자본을 직시하지 않을 때 우린 사실을 인식조차하지 못한 채 착취당하고 만다. 신자유주의의 단기주의, 주주 자본주의는 결국 떠도는 자본에게서는 국적을 없애고, 그 자본이 침입해 들어오는 곳에서 피해의 대상으로만 국가를 남기는 셈이다.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는 과거 식민지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을 쥐고 있는 자본가들은 막강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윤 부풀리기를 포장하는 셈이다. 이제는 신자유주의의 맨얼굴을 아는 사람이 참 많지만 그들의 행동을 보면 외려 그를 악용하는 것 같다. 여기저기에 투기 열풍이 불어 닥치는 꼴을 보고 있자니 통탄이 터져 나오는 걸 막을 수 없다. 돈이 양반인 세상이니 더러운 일들 앞에 눈감을 수밖에 없지만, 이토록이나 부가 불평등하게 나뉘어서야 어떻게 노동력밖에 가진 것이 없는 임금노예들이 살아갈 수 있겠나.
책 내용과 조금 엇나가 사족을 달자면 재벌 개혁도 재벌 개혁이지만은, 체내에 깊숙이 뿌리박힌 ‘천민 자본주의’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이 나라가 바뀔 성 싶진 않다. 북유럽처럼 되는 것은 어림도 없고. 그래서 난 한때(지금도) 북유럽의 어느 나라(노르웨이;)에 망명에서 사는 꿈을 꾸기도 했다. 거의 현금이 통용되지 않는 나라. 모든 돈의 행방을 알 수 있는 나라. 남도 나와 똑같은 노동자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나라. 이 나라에서 날 좀 박해해줘서 배부른 미혼모로 망명해 잘먹고 잘살고 싶은 생각은 물론 아직까지 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마련해주는 곳, 그게 바로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나라로 나는 가고 싶다. 물론 내 나라 내 조국이 그렇게 해준다면 더도 없이 좋을테고.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읽으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경제학 책이고, 특히나 노동자들을 위한 책이라고 나는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 ‘허위의식’에 빠진 채 자신의 현상태를 직시하지 못하는 많은 노동자들에게 이 책은 다시금 현 상황을 곰곰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경제학자들이 딱딱하게 쓴 이론서가 아닌, 대담형식을 빌어 쉽게 풀어낸 책이고, 자신의 이론에 또 생각까지 덧대어 설명해서 읽는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배려했음이 참 마음에 든다. 주석이 책의 보석이라곤 하지만 쉽게 눈이 안가는 것이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읽는 습관인지라, 되도록 대화내에서 자세히 이야기를 풀어냈다는데 점수를 주고 싶다.
책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치고, 자유주의에 대해서 이야길 좀 해보자. 경제학자라는 것을 감안해도 나는 그들이 자유주의라는 사상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p.235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는 반대하지만, 자유주의(liberalism)는 괜찮다는 태도로 보일 정도이다.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 어떤 근원적인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렇듯 보수와 진보 모두가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현상은 선진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승일)
참으로 위험한 발언이다. 물론 뒤에서 사회적 자본주의니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니 하면서 어느 정도 피해가려고 하지만, 난 그들이 자유주의에 대해 정말이지 크나큰 오해를 하고 있음에 좀 절망스럽기까지 하다.
박정희 개발 독재에 대해서는 시대 상황에 맞춰 이해하면서도,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은 시대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저, 경제적 자유주의로 이해한다. 수백번까지는 아니어도 두어번 독해를 한다면, 아담스미스의 무한경쟁만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무한경쟁을 할 수 있는 ‘똑같은 조건’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밀의 자유론에는 어떤 내용이 나오는가?
중요한 것은 동등한 관계의 대립이 아닌 한쪽으로 유리한 상태에서 나머지 한쪽을 은밀하게 탄압하는 경향을 만든다는 것이다. 라고 사상과 언론의 자유에 나와 있다.
아주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그들이 사민주의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유철규 교수가 케인지안 자유주의자라고 말했다는 것에 물음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 1930년대 대공황의 대응과정에서 스웨덴, 노르웨이, 프랑스 등의 사회당 정부는 케인즈적 경제정책의 운영으로 공황에 대응함으로써 사회민주당에 경제정책의 목표를 갖게 하고, 정부차원의 역할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노동자계급에게 유리한 분배정책의 이념적 중요성을 획득하게 된다. 나는 이러한 맥락에서 유교수가 그런 발언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유철규 교수에게 경제학을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일까? 그건 아닐 거다.)
자유는 원래 평등을 배태하고 있었다. 평등이 갖춰지기 전에는 그건 자유를 얻은 게 아니었다. 그런 자유주의가 경제적 이득과 관련이 되어 신자유주의로 돌연변이처럼 나타난 것이다. 자유주의와 극과 극의 모습으로 뒤바뀌어서 말이다. 어떻게 자유주의=신자유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민주와 자유를 왜 뜯어놓는 것일까? (난 정교수가 그렇게 주장하는 어떤 이론적 뒷받침이 더 듣고 싶어졌다)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자유를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때문에 자유는 극단적 개인주의에서 이기주의로, 경제적 자유주의로 옮겨가며 끊임없이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러나 밀의 자유론에도 실상은 자유란 말보다 훨씬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가 진리임을 상기한다면, 진리의 생성, 소멸, 정당성을 들며 밀이 자유를 이야기한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자유에 대한 오해는 조금 가라앉힐 수 있지 않을까?
평등과 책임과 진리를 뺀 자유는 폭력일 뿐이다. 우리가 피를 흘려가며 자유를 부르짖던 지난 시간을 기억하자. 망각에 걸리지 않았다면 자유의 값어치에 대해 그토록이나 평가절하하는 발언을 할 순 없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말하는 자유, 자유주의가 경제적 자유주의에 국한된 것이라면 최소한 표기라도 해주길 바란다.
또 아울러, 국가의 역할을 긍정해야 한다면서 국가주의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었는데,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잘 헤아려 쓰길 바란다. 국가주의란 인종주의이자 전체주의란 이름의 폭력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