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왔고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다보던 그녀는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어둠이 소리도 없이 벚나무를 거두어들인다. 마지막 남은 나뭇잎을 거두어들이자 나뭇잎들은 저항없이 속삭이며 어둠을 받아들인다. 피곤하다, 하루가 거의 끝났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할 일이 아직 많고 아이들은 거실에앉아 있지만 그녀는 유리창 앞에서 잠시 쉰다. 어두워지는 정원을 보고 있자니 이 어둠과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 밖으로 나가 어둠과 함께 누워서, 낙엽과 함께 누워서 밤을 보내고, 새벽과 함께 잠에서 깨 아침이 오면 새로워진 모습으로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문 두드리는 소리, 그 소리가 생각 속으로 들어오고, 그 날카롭고 끈질긴 소리 하나하나에 두드리는 사람의 존재가 가득해서 그녀는 얼굴을 찌푸린다.이제 어두워지는 정원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저 어둠의 일부가 집으로 들어왔다.
비극으로부터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겉발림으로 하는 다정한 말이 아니다.비극의 본질에 상응하는 깊이를 지닌 언어뿐이다.그것을 나는 지금도 찾고 있다.- 헨미 요
투쟁 따위는 없었다. 국회에서는 법안에 다소 비판적인 질의가 있었으나 별다른 일 없이 전원일치로 채택됐다. 국가총동원법은강압적으로 강요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 되는 대로 내맡기기와 몰주체성에 대해 죽기 전 한 번은 따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었다 - P13
1937년의 중국에서 ‘황군‘ 병사인 너는 군도를 빼어들고 사람을 베어 죽이려는 충동을 멈춘 채 제정신을 차리고 그 충동을 광기로 대상화함으로써 스스로 멈출 수 있었을까 - P30
히토바시라(사람기둥), 히토바시라는 다리나 제방, 성 등을 쌓을 때 공사의 성공을 기원하며 신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희생물로 사람들을 물 밑바닥이나 땅속에 생매장하는 것을 말한다. - P48
아버지는 가끔 중병에 걸린 개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눈을 부릅뜬 채 옆으로 쓰러져 하수구를 떠내려가는 죽은 짐승같은 얼굴. 그런 눈은 전쟁의 시간을 살아가야 했던 인간으로서 어쩐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생각도 들어 무서웠으나 반드시 싫지는 않았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온 것인가. 무엇을 보고 온 것인가. 그런 의문들에 대해 결국 질문을 던지지 못했던 내게도, 그것을 불문에 붙임으로써 상처를 피하려는 교활한 의도가 어딘가에 있었던 것이고, 끝내 말하지 않았던 아버지와 끝내 직접 물어보지 않았던 나는 아마도 같은 죄를 지은 것이리라. 묻지 않은 것-말하지 않은 것. 많은 경우 거기에서 전후 정신의 괴이쩍은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 - P181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떤 말이 문득 튀어나왔다. "아, 모든 것이 적의 악, 전쟁의 악 때문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땅거미가 지는 가운데 심호흡을 하면서 그 말을 더듬거렸다. 그 말의 밑바탕에 봐서는 안 될, 알아서는 안 될 광경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그 무렵에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절대적 광경이었다. 나는 잔혹하게도 거기로 아버지를 몰아세워 보기도 했다. - P183
나는 기억이 안 난다고 하지 않고 꿈을 꾸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상당히 밝아진 얼굴로 연필을 만지작거리며 어떤 꿈이었느냐고 질문했다.그가 뭐라고 받아 적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무리 체계적으로 이야기하려 해도 그의 입장에서는 내가 하는 말을 대부분 알아듣지 못할 테니 내가 한 말을 받아 적었을 리 없다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그는 입술 읽는 법을 아직 터득하지 못한 귀머거리와 비슷할 것이다. - P355
아가씨, 한 번도 해본 적 없기 때문에 해야 되겠다는 건 말이 안되는 일이에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아가씨 어머님께서 같이 가신다면 흠잡을 데 없는 자리가 되겠죠. - P361
자갈 틈새로 작약이 자라고 있어요. 헐거운 회색 자갈을 뚫고 올라온 그들은 뱀의 눈처럼 봉오리로 공기를 탐색하다 부풀어 공단처럼 반짝반짝하고 반들반들한, 짙은 빨간색의 큼지막한 꽃을 터뜨리죠. 그러다 산산이 땅으로 떨어져요. - P15
나는 잔인한 악마이고, 불한당에게 끌려가 목숨이 위험했던 순진한 희생양이고, 나를 교수형에 처하면 사법 당국이 살인을 저지르는 게 될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이고, 동물을 좋아하고, 안색이 밝은 미녀이고, 눈은 파란색인데 어디서 말하기로는 초록색이고, 머리는 적갈색인 동시에 갈색이고, 키는 크거나 작은 편이고, 옷차림이 단정하고 깔끔한데 죽은 여자를 털어서 그렇게 꾸민 거고, 일에 관한 한 싹싹하며 영리하고, 신경질적이며 뚱한 성격이고, 미천한 신분인 것에 비해 조금 교양이 있어 보이고, 말 잘 듣고 착한 아이라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고, 교활하며 비딱하고, 머리가 멍청해서 바보 천치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궁금하다. 내가 어떻게 각기 다른 이 모든 사항들의 조합일 수 있을까? - P38
넓고 깊고 복잡하고 미묘하면서 언제나 조금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을 주로 침묵의 세계 속에 품고 있었을 그런 그녀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작가와 작가의 인물에게 동시에 빠져들게 되는 글들...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리즈에서 종종 발견하게 되는 새로운 기쁨과 비로소 해소되는 갈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