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욕망들과 싸우도록 훈육되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실상 모든 전선에 그 싸움을 위한 증원군이 파병된다.
내면세계와 외부 세계 사이의 암묵적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욕구에 관한 이야기다. 갈수록 더 시각에 치중하고 상업성이 짙어지는 세계, 여성의 형태가 무자비할 정도로 외현화되는 세계, 여성의 욕망에 관한 관념이 너무나 협소한 틀 안에 갇혀 있는 세계에서 한 여성이 자신의 몸과 자신의 욕망에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관한 이야기다. 전통적인 심리 구조와 사회구조가 얼마나 오래도록 멀쩡히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고, 여전히 소녀들에게 자기부정의 씨앗이 뿌려지고 권장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이며, 40년에 걸친 법적·사회적 변화가 진정한 대안적 변화를 아직 일구어내지 못한 까닭에 우리가 행위 주체성과 주도권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나, 자신의 욕구는 건전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만족시켜도 될 타당성과 자격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이 부재한다는 이야기다.
작년 3월에 읽고 별점 3이었던 책. 한켠에 넘겨두고 못내 찜찜했었는지 오늘 캐럴래인 냅의 글을 읽다가 문득 이 책이 떠올랐고 갑자기 이해가 됐다. 갑자기 베일이 녹아내리고 별점은 4
며칠 전 갑자기 다시 읽고 싶어, 새로 사 두었던 설국을 꺼내어 두고 눈이 오길 기다렸다. 마침 오늘 예보대로 설상대를 볼 수는 있을 만한 눈이 내리고 있어 획실한 행복을 누리게 된 하루
비인간 동물에 대해 잠시 언급되기는 하나 논조가 너무나 강렬하여 주장하는 바에 동감하고 공감하면서도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내칠 수가 없었다. 유물론적 이기일 뿐이므로 타자의 경계는 어쩔 수 없이 조금 넓은 우리까지인 걸...하고 어깨를 으쓱하고 말 수는 없게 된 마음이랄까.젠더 트러블을 보다가 어렵지도 않은 단어에도 이해불가인 오역이 있었다는 게 떠올랐는데 이 책도 그러함. 대충 걸러 읽지만...그런데 알아차리지 못한 오역은 또 의미를 어디로 끌고 갔을런지....
보름스 : 모든 살아 있는 존재, 특히 살아 있는 인간의 삶에는 죽음의 형태가 한 가지 이상 존재합니다. 살 만하지 않은 삶에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그것은 살 만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주체의 죽음을 초래합니다. 인간의 삶이 죽음에 맞서 살아 있는 삶을 돌보는 것으로 이루어지듯, 그것은 또한 모든 의미에서, 살아 있는 인간의 모든 생기적 차원에서, 살 만한 삶의 조건을 준비하면서 살 만하지 않은 삶에 맞서 살 만한 삶을 돌보는 것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 P42
버틀러: 주체를 상호주체성으로 언급해야 하는 이유는 당신의 삶이 살 만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수많은 삶들이 살 만하지 않고서는 나의 삶도 살 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통되게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고 공통된 삶을 위해서 사회구조에 의존하기 때문이지요. 나라는 주체는 유아기만이 아니라 평생을 돌봄에 의존하며, 여기서의 "돌봄은 모성적 특성이라기보다는 살 만한 삶을 위한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대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의존하는 구조가 실패하면 우리 또한 실패하고 쓰러집니다. 제가 맞다면, 살 만한 삶의 상호주체 조건은 타인의 삶에 대한 나의 일종의 의무를 암시하며, 그 타인 역시 나에게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 P59
버틀러 : necropolitical logic"거기"와 "여기"는 부인과 유기가 일어나는 가운데 안정적인 것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 중 누구라도 그러한 근본적 불평등이 확정 또는 편향되어 재생산되는 이 세계의 모습에 동의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보존하려 하고, 그렇게 보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한편 이들이 외면하는 타인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 P99
버틀러 : 우리가 삶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나의 것이든, 우리의 것이든, 다른 누구의 것이든 죽음과 파괴를 한쪽으로 밀어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심리적 부인에 입각해서 삶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살 만함의 조건을 확립하기 위해서 죽음의 힘에 반대해야 합니다. - P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