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하기 전날이었다. 밤이 아직 오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문간에 앉아 보랏빛으로 서서히 물들어 가는 산을 마주 보며 밤을 기다렸다. 밤이 오기를, 다른 누구도 아닌 밤이 다다르기를 기다리며 나는 생각했다. - P11

그리그는 원하는 만큼 주름이 생길 것이며, 내 눈에는언제까지나 다루기 힘든 늙은 소년으로, 응석받이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모든 싸움, 어떤 약속에든 전권을 가진 반항아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는 종종 말하곤 했다. 어떤 생각, 흐름, 집단, 물결에 자신을 내맡겨선 안돼! 바로 내빼야 한다고! 아무도 못 쫓아오게!
어느새 그는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식사를 해치우고 내빼는 것, 그것이 그가 필요로 하는 전부였다. - P34

오랫동안 자신을 하나의 종으로 제대로 태어나지 못한 비정상적인 존재로 느꼈기에 나는 스스로 이렇게 되뇌어야 했다. 그럴 리 없어. 너는 비정상이 아니야. 네가 느끼는 감정은 너 혼자만 느끼는 게 아니야. 분명 다른 어딘가에 너와 같은 생각을 하는 자매가 있을 거야. 실제로 그런 존재가 한명 있었다. 재닛 프레임이 [또 다른 여름을 향해]에 자신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니며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철새라고 쓰지 않았던가? 이 책을 읽고 느낀 충격과 나를 압도한 놀라움과 기쁨이 내 존재 깊은 곳에 있던 소외감을 설명해 주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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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슨 선생이 타운을 떠난 그 여름은 
몹시 무더웠고 강물은 한동안 죽은 듯 보였다. 강은 타운의 중심을 관통하며 죽은 뱀처럼 납작하게 드러누워 있었고, 그 언저리에는 더러운 거품이 싯누렇게 부글거렸다. - P11

이 세상 어떤 사랑도 끔찍한 진실을 미리 막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그대로를 물려준다는 진실을. - P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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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지음, 김윤하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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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받았습니다. 글자는 좀 작지만 책은 참 예쁘네요, 읽을 생각에 설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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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복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사람들은 침울했지만 그럭저럭 날씨를 견뎠다.





























펄롱은 다른 아이들이 그토록 반기는 것을 
겁내는 자기 아이를 보니 마음이 아팠고 
이 아이가 용감하게 세상에 맞서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 P27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벌써 새끼버섯이 
배양토를 뚫고 올라오는 걸 보고
똑같은 일이 날이면 날마다 여름 내내 
반복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 P44

뭔가 작지만 단단한 것이 
목구멍에 맺혔고 애를 써보았지만 
그걸 말로 꺼낼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끝내 펄롱은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것을 
그냥 넘기지도 말로 풀어내지도 못했다. - P56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ㅡ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 P99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 P119

덧붙이는 말

이 소설은 
실제 인물에 기반하지 않은 허구입니다.
1996년에야 
아일랜드의 마지막 막달레나 세탁소가 
문을 닫았습니다. 
이 시설에서 은폐·감금·강제 노역을 당한 
여성과 아이가 얼마나 많은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적게 잡으면 만 명이고, 
3만 명이 더 정확한 수치일 것입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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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나의 이웃

그 여자는 알까? 
내가 마음으로부터 
그 여자의 건강을 빌면서
손자가 결혼하는 걸 볼 때까지 살고 싶은 
내 과욕을 줄여서라도 
그 여자의 목숨에 보태고 싶어 하는 마음을
.....1983년

언덕방은 내 방 

때로는 집도 낯설고 불편할 때가 있다. 
난방이 잘된 집에서 배불리 먹고 
편안히 빈둥댔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춥고, 배고프고, 고단하고, 
집에 붙어 있음으로 생기는 
온갖 인간관계까지가 헛되고 헛되어 
견딜 수가 없을 때 꿈꾸는 여행은 
구태여 경치가 좋거나 
처음 가 보는 고장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럴 때 표표히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는 사람은 복되다. - P48

두려운 건 목청 높은 편견이 아니라, 
그 목청에 대세를 맡겨 버리는
양식 있는 사람들의 
소극적인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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