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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시간표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6월
평점 :
여름이면 넘치듯 등장하는 스릴러 작품들의 홍수 속, 범인을 찾거나 피 튀기는 복수극이 아닌 독특한 전개의 새로운 스릴러 작품이었던 정보라 작가의 한밤의 시간표를 만났다.
이성적인 이미지가 공고한 연구소라는 소재와 세상과의 소통이라는 대표적 상징인 스마트폰이 단절로 인해 무용지물이 되고, 이미지가 환기된 국면에 처한 작중인물이 소문만이 무성한 괴담과 무속신앙의 스산한 괴기스러움이 새로이 감싸는 이야기를 필두로 펼쳐지는 각기 다른 에피소드 일곱 편으로 전개되었다.
에피소드들은 연구소라는 장소나 몇몇 소재가 일부 이야기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해 공통적 소재가 다양한 의미를 전달하는 색다른 흥미로움에 각각의 이야기가 나누어져 있지만 하나인 듯 이어져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쉴 틈 없이 몰아 숨 가쁘게 읽을 수밖에 없는 매력에 빠지게 만들었다.
자욱한 안개와 어둠 속의 배경이 선연히 그려지는 작품 속 장소들은 마치 영상을 보는듯한 사실적 묘사에 꿈에서 만난 적이 있는듯한 기시감을 주어 어느 순간 나는 터널에, 연구소 복도와 계단을 서성이는 작중인물이 되었고, 눈앞에 아스라이 펼쳐진듯한 데자뷰에 공포감과 이질감,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불안까지 함께 느끼게 되었다.
터부시해야 하는 것들의 영역에 다가간다면 어떤 후폭풍을 만나게 되는지, 무시와 침묵이 외려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아이러니함도 흥미롭다.
본문 속 주인공들은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서 힘겹게 하루를 버티며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존재의 이들을 주로 그려 이들로 하여금 더욱 뚜렷하고 인상깊은 권선징악의 주제를 드러낸다.
게다가 현실과 환상. 아니, 환각의 경계선에서 모든 것이 의심스러운 상황을 마주해 나약해진 작중인물에게 적재적소의 위치에 배치된 판타지 요소와 섬뜩한 대사들은 감정이입을 더욱 심화시켰고, 실험동물인 양을 소재로 주제를 심화시키는 등 저자의 상상력과 기획력에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올여름, 내가 먼저 느껴본 이 독특하고도 이색적인 공포 작품을 함께 맛보고 싶다면 한밤의 시간표의 연구소에 놀러와 보시길 강력 추천한다.
14P) 뭔가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면 그때부터 머릿속에서 그 ‘뭔가‘가 만들어져서 혼자서 무럭무럭 자라나요. 스스로 홀리고 혼자서 씌는 거예요.
45P)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 사람이 들어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소장님이 나타나서 막아 줄 것이다. 그것은 조금 특이한 안전 수칙이지만 연구소에 잘 어울린다고 나는 생각했다.
142p) 실험동물의 삶은 끝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224P) 모두가 깨끗하게 떠날 수 있었다면 이 연구소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227P) 고양이는 그 천 사이로 물이 흘러나가듯 스르륵 빠져나갈 것이다. 고양이는 이미 조금씩 투명해지고 희미해지고 내 손가락 사이로 물이 흐르듯 스르륵 사라져간다. 목에 박힌 커다란 못만 점점 더 차갑고 딱딱하고 불길하게 단단해지고 있다.
233P) 우리는 생명 없는 존재가 밝은 세상에서 고통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업무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