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지음 / 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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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도 안하는 삼수생이라고 집에서 밥버러지 취급 받는 주인공 강무순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할머니댁을 찾았다가 방심한 사이 홀로 계신 할머니 홍간난 여사를 챙길 적임자로 간택(?)되어 산간 오지 마을에 낙오된다. 어렸을 적에 아픈 남동생 탓에 이미 이곳에서 오래 머무른 전적이 있는 무순은 문명의 혜택이 없는 이곳에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여섯 살의 자신이 그린 보물지도를 얻고, 보물지도를 통해 찾아 간 곳에서 무순이 찾아낸 것은 자신의 유치와 매우 훌륭한 솜씨로 조각된 자전거 소년 목상이었다.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닌 이 보물은 누구의 것인가 고민하는 무순의 앞에 마을 유지 경산 유씨 종갓집의 외아들, 꽃돌이 창희가 나타난다. 무순은 창희를 통해 이 물건이 15년 전 이 마을에서 한날 동시에 사라진 네 명의 여자아이 중에서도 유씨 종갓집의 외딸이던 선희의 보물임을 알게 되고, 사라진 선희를 대신하여 선희가 애지중지하던 자전거 탄 소년이 누군지를 찾아 보물을 전달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자신의 이복누나 유선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창희가 무순의 보물'주인'찾기에 동행하는데, 이 두 사람과 보통을 뛰어넘는 여걸 홍간난 여사의 활약으로 15년 전 경찰과 용한 무당도 포기했던 4명의 소녀 실종 사건의 진상에 다다르게 된다. 도대체 한 마을에서 아무런 연고도 없던 네명의 소녀(종갓집 외동딸 유선희, 빨간 지붕집 불량 고등학생 유미숙, 선희와 같은 반이었던 가난한 집의 효녀 황부영, 그리고 목사집 딸 조예은)은 마을 사람들이 마을 최장수 노인의 백수 잔칫날, 증발한 듯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일까?


만약 해수온천욕을 해수욕장으로 잘못 알아듣지 않았더라면 그날 마을에서 없어진 소녀 중에 무순도 있었을 것이라고 믿은 홍간난 여사는 사건 바로 다음날 무순을 집으로 돌려보냈고, 무순은 자신이 겪은 큰 일을 머릿속에서 새까맣게 지워버리고 무탈하게 잘 지내왔다. 그렇지만 그 사건은 어린 무순만을 빼고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와르르, 무너뜨려 버린거다. 존재감도 사라져버려 마치 닌자처럼 움직이는 부영의 어머니, 세번 유산 끝에 얻은 귀한 딸을 잃은 뒤 대문을 꽁꽁 잠그고 사는 미선의 부모, 예은이가 일기장에 쓴 대로 외계인을 따라 저 멀리 우주 별로 떠났다고 믿는 목사집 사모님, 그리고 사라진 선희를 대신해 양아들을 들이고 선희의 이름이 결코 마을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유씨 종갓집 사람들……. 책 속에서 무순이 풀을 뽑다가 개미집을 망가뜨리며 하던 문장이야말로 이 책을 관통하는 구절이 아닐까 싶다. "지팡이로 쓰기엔 턱도 없지만 풀이라기엔 제법 뻣뻣한 놈을 뽑았더니 개미가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하필 개미집 위에 풀이 자랐나 보다. 아니면 풀뿌리 밑에 개미집을 지었던가. 개미로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다. (중략) 저들은 죽을 때까지 나란 존재를 모르겠다. 자신들의 삶을 일시에 무너뜨린 이 거대한 존재를. 목적도 악의도 없이 나는 개미의 세상을 무너뜨렸다." 도대체 이 마을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린 악마는 누구일까? 사라진 소녀들은 어떤 괴한에 의해 납치되어 모두 죽임 당한 것일까? 무순의 수사 활동과 번갈아가며 등장하는 "주마등" 페이지 속의 '누군가'를 찾기 위해 나는 책을 차마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책디자인에 끌려서 서평단을 신청한 책인데(띠지를 벗기면 반전 표지가 드러난다.), 무더운 이 여름에 책을 손에 붙들고 있게 만드는 힘이 있는 책이라 별 네개를 매긴다. 요즘 기대 이하의 실망스러운 책들이 많은데 이 책은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무순과 할머니의 재치 넘치는 입담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백미로 꼽는다. 그리고 결말이 모두들 아쉽다고 말한다. 명탐정 만화와 소설을 하도 읽어 왠만한 반전은 금새 눈치채는 나는 오랜만에 예상치 못했던 결말을 맞았고, 결국에 마을 사람 모두가 끝끝내 알지 못한 진실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모든 미스터리 소설에서 모든 진실은 밝혀질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몰라야 우리의 삶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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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노인 그럼프 그럼프 시리즈
투오마스 퀴뢰 지음, 이지영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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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짧은 길이의 챕터로 이루어진, 매우 직설적이고 고리타분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북유럽 소설들의 재미에 폭 빠진 나는 한동안 북유럽 소설이라면 무조건 믿고 구매해서 읽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오베라는 남자><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핀란드 국민소설이라는 이 <괴짜 노인 그럼프>는 책콩 서평단을 통해 읽게 되었는데, 두께가 100세 노인이나 오베보다 반이나 얇음에도 불구하고 읽는데 속도감이 붙지 않아 고전했다. 오베보다 훨씬 더 고리타분한 할아버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어찌나 정신산만하게 말을 이어가는지, 어르신의 두서 없는 과거 이야기를 듣느라 자꾸 머릿속으로 딴짓하게 되고 앉아 있는 엉덩이가 저리고 다리에 쥐가 나는 그런 느낌이랄까. 아내의 곁으로 가기 위해 자살을 결심하는 오베와 치매에 걸린 아내를 보며 죽음을 준비하는 그럼프는 스토리상에서도 캐릭터 성격으로도 여러모로 비슷한 부분이 많은데, 오베가 과거와 현재가 파도처럼 밀려와 치는 바다 같은 책이라면 그럼프는 별 사건사고 없이 시간이 잔잔히 흘러가는 호수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럼프는 치매에 걸려 요양병원에 있는 아내를 돌보다가 모든 인간의 영원한 숙제,'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내 아내는 지금 내가 돌봐주고 있지만, 내가 만약에 이런 상태가 된다면 내 아들녀석이 과연 나를 돌봐줄까? 나는 내가 어떤 장소에서,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할지 결정할 권리가 있지 않나?' 이러한 생각을 통해 그럼프는 스스로, 미리 죽음을 준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유언장을 쓰고 자신이 눕게 될 관을 만들고, 자신의 장례식에 쓰일 추도문 등을 준비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홀로 있는 아버지를 걱정하며 집에 방문했던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에 크게 불안함을 느끼며 아버지의 유언장에 필요한 잉크를 사기 위해 동행하는데,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유언장의 내용을 들으며 아버지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게 많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잉크를 사러 이동한 길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아들과 호텔에 머무르게 된 그럼프는 이 둘을 찾아 온 며느리가 갑자기 생긴 '셋째 아이'를 두고 싸우는 것을 듣는다. 그럼프는 아들과 며느리가 왜 자신이 준비하는 '죽음'과 하늘의 선물로 찾아온 손주의 '탄생'을 두고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아웅다웅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너희들이 아이를 낳으면 내가 그 아이를 돌봐주면 되지, 뭐. 그리고 내가 이렇게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나 편하고 너희 편하자고 하는 일인데, 이게 왜 싫은거냐. 나는 참 요즘 젊은 아이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새로운 변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편이라, 굉장히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는 편이다. 아직도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이 좋고, (비록 독서리뷰는 편의성과 시간적 경제성을 이유로 블로그에 기록하지만)필기구와 노트를 사서 일기를 쓰고 감상문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며, 찍은 사진은 꼭 인화를 해서 사진첩을 만들기를 좋아한다. 옛것을 좋아하는 나지만 그럼프의 옛것을 우월하다고 여기고 이를 고집하는 그럼프의 사고방식은 조금 불편했다.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을 풀기 위해서는 많은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가치관을 존중하는 노력이 필요한데, 어르신에게 젊은 세대가 무조건 맞춰가는 내용인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건 어쩌면 내가 그럼프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지 못해서, 그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뚝심 있는 노력이 부족했던 탓일수도 있겠다. 정말이지 그럼프가 그의 이웃집 태국 출신의 부인과 그의 아들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그럼프를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포기하고 이 책을 중간에 접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흥미로웠던 점은 죽음을 준비하는 그의 태도다. 관, 묘비, 유언장, 장례식에 틀 음악과 춤까지 구체적으로 하나 하나 챙기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도 내 삶을 낭비없이 더 알차게 살아가기 위해선 항상 죽음을 가까이 두려는 그의 자세를 진지하게 생각해봐야하지 않나 싶었다. 지금까지의 내 삶을 한 번 정리해본다면 내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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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바이러스
티보어 로데 지음, 박여명 옮김 / 북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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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바이러스다!

헬리콥터 사고로 흉한 외모를 갖게 된 IT 재벌 파벨 바이시는 '미의식' 바이러스가 침투한 인간의 뇌에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깔겠다는 광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오로지 '그'만이 할 수 있는 계획들을 세워 차례로 실천에 옮긴다. 전 세계 벌의 멸종, 미스 아메리카의 집단 납치, 황금비율로 만들어진 세계문화유산의 테러, 디지털 이미지를 공격하는 모나리자 바이러스 유포……. 그리고 그의 광기의 끝은 현 시대의 아름다움의 상징품인 예술 작품, 『모나리자』의 파괴로 향한다. 살라이(악마)의 모나리자, 악마적 아름다움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위치에 가져다 놓고자 하는 바이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이시 계획의 핵심 키 열쇠가 된 불운의 피해자는 한때 모든 브랜드의 뮤즈였던 유명 모델, 헬렌 모건이다. 딸 매들린의 임신을 계기로 모델계에서 반강제로 은퇴당했지만, 딸을 위해 강해져야만 하는 싱글맘인 그녀는 미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고 인간이 아름다움을 느끼는 뇌의 특성을 연구하는 신경미학을 공부해서 해당 분야의 1인자가 되었다. 독특한 직업 덕이자 탓(?)에 경비가 삼엄한 루브르에서 모나리자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그녀와 그녀의 딸 매들린이 파이시의 표적이 된다. 진품 모나리자가 필요한 바이시는 거식증으로 인해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던 헬렌의 딸, 매들린을 몰래 데려가는데, 책 초반부에 파이시가 벌이는 미친 짓이 워낙 강렬한지라 매들린의 무사귀환을 확신할 수 없었던 나는 매들린이 과연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책장을 쉬지 않고 넘겨야만 했다. (미성년자의 납치, 아이의 안전을 빌미 삼는 유괴협박범이야말로 나는 악당 중의 악당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끔찍해...)

 


이 책 띠지에 쓰인 하나의 문구가 많은 사람들을 유혹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댄 브라운의 귀환." 나 역시 그랬으니까. 어떤 작품을 쓴 작가라는 수식어가 필요없는 세계적인 작가의 이름이 붙은 책답게(?) 이 책 역시 속도감과 몰입도 면에서는 별 다섯개가 아깝지 않다. 요즘 책 슬럼프에 빠진 나지만 530페이지에 달하는 이 두꺼운 책을 앉은 자리에서 세시간 만에 독파했다. 스토리도 참신하고, 댄 브라운의 여타 소설이 그렇듯 미국, 스페인, 프랑스 등 여주인공과 악당이 누비는 무대배경 스케일도 큰 편인데다 본 스토리 중간중간 삽입된 로 스트라니에로와 레오나르도, 루카 파치올리의 이야기도 으스스한 분위기를 제대로 조성한다. 한번쯤 읽어보기를 권장하지만(도서관 대여도 괜찮고, 구매, 소장도 크게 아까울만한 책은 아니다.) 댄 브라운의 명성을 이어가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은 책인 것은 확실하다. 범죄의 허술함, 범인의 의외성, 인문학적 상상력, 독자의 추리력이 발휘될 만한 복선 등 여러 면에서 제 2의 댄 브라운이라는 수식어가 붙기에는 아직은 좀 부족한 듯 싶다.

 

 

 

 


이 세상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모든 이상에 악마라는 낙인을 찍은 것. 아름다워지는 데 혈안이 된 현대사회에 종말을 선언한거죠. 사회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추함으로 바꿔버린 거예요. (p.468)

 

인류를 대상으로 행동치료를 시도한 거죠.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들과 황금비율을 끔찍한 이미지와 경험에 연결하다보면 언젠가 아름다움에 대한 사람들의 기준이 바뀔 것이고, 심지어 아름다움이라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게 될 거라고 여긴 거예요. 심한 교통사고를 당한 후 자동차에 타기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p.501)

 

 

 

 

야수이자 악마에 대응하는 선한 미녀. 책의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는 결국 작가가 옹호하고자 했던 것은 아름다움이 선이라는 전형적인 디즈니 주제였는지 헷갈리게 만든다. 파이시가 미의 붕괴에 집착하게 된 이유가 미스터리한 책 때문이었는지, 헬리콥터로 잃어버린 자신의 외모 때문이었는지, 성형수술로 숨진 자신의 아내 때문인지 명확하지 않아서 아쉬웠다. 차라리 거식증에 걸린 딸 때문에 헬렌이 전세계를 상대로 해당 범죄를 저질렀더라면 오히려 이해가지 않았을까. 내 아이에게는 이런 잔인한 세상, 이런 몹쓸 가치관을 남겨주고 싶지 않아라는 전직 모델의 뷰티 테러였다면. 미녀가 정작 미의 몰락을 간절하게 원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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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수첩의 여자
앙투안 로랭 지음, 양영란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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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블로그에서 최근 국내에 번역출간한 소설 <프랑스 대통령의 모자>와 <빨간 수첩의 여자> 소개글을 처음 접했는데, 그 때 프랑스 국기 삼색으로 단순하게 만들어진 책 표지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실물로 받아 보게 된 책은 생각했던 것보다 작고, 또 얇았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앙투안 로랭과의 만남'이 진행되었다고 하는데, 그 때 작가는 이 책을, '여자 주인공이 폭행을 당하고 핸드백을 빼앗기는데, 다음날 책방 주인이 도난당한 핸드백을 얻게 되어 그 안의 빨간 수첩을 보면서 주인을 상상하고,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요약했단다. 가볍고 얇은 책처럼 매우 간결하고 깔끔한 책 요약이다. 책 두께가 두께니만큼 쉽게, 금방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나는 이 책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


얇은 책을 오래 붙잡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딱 하나, 번역 때문이다. 이 책의 번역가 양영란 씨는 꽤 많은 프랑스 소설의 번역을 진행한 분이라 이름이 낯익은 분이었는데, 첫장부터 문장의 번역이 매끄럽지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문장마다 '그녀'라는 3인칭 주어가 들어가고, 책 중간에 등장하는 '깔치'라는, 도대체 어느 시절의 신세대어인지 알 수 없는 단어가 주구장창 반복되며, 한국어에서 잘 쓰이지 않는 수동태가 남발된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두 주인공은 이미 결혼을 결혼한 돌싱남녀이며, 중년이었는데, 남녀주인공이 생각보다 연세가 있다보니 그들이 살던 60년대에는 깔치라는 은어가 많이 쓰였을 수 있겠다, 나는 그 시대 사람이 아니라서 그랬는지 안그랬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최근에 들어본 적이 없는 단어의 선택이 이 프랑스 신세대 소설가의 책을 고전(?) 소설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 분의 가장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기욤 뮈소의 책들을 내가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 번역투가 이런 것인지, 아니면 유달리 이 책의 번역투가 고루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각 챕터가 몇 장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글을 읽는 속도가 전혀 붙지 않아서 좀 고생했다.

책 중반부에 이르러서야 나는 마치 내가 좋아하는 영화 <아멜리에>를 보는 기분을 느끼며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속도를 붙여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핸드백에서 꺼낸 빨간 몰스킨에, 여자주인공 로르의 두서없는 생각들의 조각을 모아 형체 없는 사람을 그려내어 그녀를 쫓아가는 남자주인공 로랑. 로랑을 따라 로르를 쫓던 나는 가방 속 소지품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읽어낸다는 것은 기대한 것만큼 매우 재미있는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My princess diary>도 굉장히 재밌게 읽었는데, 이 책에 조금 더 로르를 느낄 수 있는 메모가 많았더라면, 어쩌면 산만했을 수도 있지만 더 재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령 로르가 어제 저녁 친구와 먹은 저녁 영수증의 내역서라던가, 식사에 늦은 친구를 기다리며 끄적인 글이라던가, 카페에서 들었던 노래 가사를 끄적인 냅킨 같은 게 좀 더 나왔더라면. 그리고 또 내가 만약 프랑스 유명인과 작가들을 더 많이 알고 있었더라면, 최소한 로랭이 좋아하는 작가 모디아노를 알고 있었다면 이 책이 더욱 흥미로웠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인물들, 브랜드, 거리명, 심지어 작가의 이름마저 혼합된, 이 팩션 같은 소설에 좀더 빠질 수 있도록 적절한 미주가 있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로랭이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답했던 두 마디는 꽤 인상적이었다. "나는 소설을 30가지 버전으로 갖고 있다. 디테일을 강조한 버전, 결말을 다르게 변형한 버전, 세부적인 설정을 바꾼 버전 등.”  그래서 나도 생각했다. 소설 속 여자주인공 로르의 직업이 특이한데, 액자에 금박을 입히는 작업이라니! 한국에도 과연 이런 직업이 있을까?, 만약 이 책이 한국에서 영화화된다면, 동네서점 주인이란 한국에도 있는 직업이니 로랑은 독립서점 주인으로 나오면 되겠지만, 그렇다면 로르는 과연 어떤 직업을 얻게 될까?그러고보니 한국 국기도 프랑스 국기와 마찬가지로 세가지 색상, 빨강, 파랑, 흰색만 쓰이는데, 이 책표지를 어떻게 각색하면 한국적인 느낌으로 바뀔까? 만약 로르와 로랭이 조금 더 젊었더라면? 그래서 로르를 찾아갈 주니어 로랭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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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세계사 - 잔혹한 범죄에서 금지된 장난까지, 금기와 금단을 넘나드는 어른들의 역사 이야기 풍경이 있는 역사 4
이주은 지음 / 파피에(딱정벌레)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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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모르게 으스스한 느낌이 도는 이 책은 열아홉살 이상의 성인들만 읽을 수 있는(!) 성과 폭력, 자극적이면서도 엽기적이고, 당혹스러운 이야기가 모인 역사책이다. 메르헨 느낌의 일러스트가 그려진 분홍분홍한 책표지에 걸맞게 한동안 유행했던 잔혹동화 컨셉의, 동화 속에 숨겨진 그 시대상을 폭로하는 내용이 반, 2016년 화두로 떠오른 '페미니즘'과 이어지는 열악한 여성들의 역사가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건부 이벤트 도서가 많지 않은 책콩에서 '2016 성년의 날'을 맞은 올해 스무 살을 위해 준비된 이 책 '은밀한 세계사'를, 마침 올해 대학교에 입학한 사촌동생이 있기에 운 좋게 받아볼 수 있었다. 사촌동생 유림이는 나처럼 스릴러, 추리물을 좋아해서 분명 이 책도 재밌게 읽을 것 같다. 얼마 전에 내게서 추리책 몇 권 빌려가면서 고3 때 책을 너무 안 읽었더니 이제 시간이 생겨서 책 좀 읽어보려고 해도 책이 안 읽힌다고 한숨을 쉬던데, 이 책은 저자가 귀가 솔깃하는 주제에 흥미로운 여러 이야깃거리를 엮어 책을 읽어주듯 구어체로 이야기를 풀어내기 때문에 금방 금방 읽히더라. (나도 빨리 선물해줄 요량으로 받자마자 책을 펼쳤는데, 대략 한시간 만에 이 책을 완독했다.)


저자 이주은님(눈송눈송 밀푀유)의 블로그를 이웃 구독하고 있어, 읽기 쉽고 맛깔스러운 글을 쓰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블로그로 글을 읽을 때와 종이로 읽을 때의 가독성은 같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후자가 훨씬 더 낫다. 야사를 좋아해서 조선 야사 책은 많이 사서 읽었는데(읽는 책 대부분 만족스럽지 않아 중고도서로 처분해버리곤 했다.), 서양 야사는 많이 읽어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속 내용이 이해하기 힘들 만큼 낯선 내용은 없었지만 한 에피소드마다 신선한 내용이 있다는 점이 좋았다. 요즘 유행하는 초커 목걸이에 공포정치 때 단두대에서 목 잘린 희생자의 가족들이 그들을 애도하며 참석한 파티장의 복장이었다는 점이나(물론 초커목걸이의 시작이 그때부터라고 딱 잘라 보기는 힘들고, 다른 시대에서도 있었던 패션이긴 하다.), 이국 출신의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치와 색정광, 동성애 등 온갖 오명을 뒤집어쓰고 시민들의 분노 대상으로 지목되어 비참한 인생을 마무리하게 된 것이며(그녀는 화려한 베르사이유 궁정보다는 상대적으로 소박한(?) 프티 트리아농에 머물렀고, 자연을 사랑해 루이15세로부터 작은 촌락을 선물 받아 그곳을 왕비의 정원이라 부르며 사랑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도 베르사이유의 어떤 정원보다 왕비의 촌락이 가장 인상에 깊게 남아있다.), 안네의 일기 무삭제본에는 사춘기 소녀의 성적 호기심이 가득 담긴, 더 진솔한 모습의 안네를 볼 수가 있다는 것!


나는 개인적으로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때, 읽고 싶은 다른 책이 생기면 그 책은 내게 가치가 있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안네의 일기 무삭제본>과 저자의 또다른 저서인 <스캔들 세계사>를 카트에 담아놓았다. 조만간 그 책들을 내 책장에 빨리 데려와 꽂을 수 있기를. 그리고 지금은 내 손을 떠나 사촌동생의 집으로 이동한 이 책이 새로운 주인에게도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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