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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주노초파람보
노엘라 지음 / 시루 / 2018년 7월
평점 :
출판사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은 이 책<빨주노초파람보>는 책 제목부터 책 구성, 디자인, 소재와 분위기 모두 특이했다. 세로로 달린 띠지에는(여담이지만 세로띠지는 가로띠지와는 달리 굳이 벗기지 않고 책을 펼쳐도 덜렁거리지 않아서 좋더라.) 베스트셀러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 저자의 첫 소설, 소설 출간과 동시에 영화화 확정 화제작! 이라고 적혀있었다. 이름부터 특이한 작가 노엘라는 바이올린 전공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바이올리니스트지만, 동시에 곡을 그림, 문학, 사진, 그리고 색깔과 융합시키는 독특한 시도를 해온 종합 예술가 같은 행보를 보여왔다고……. 이 책은 책 표지에서부터 그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 강한 영감을 받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책 속 등장인물들도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과 그가 남긴 말을 계속해서 언급한다.
르네 마그리트가 누구인가. 그림 속에 그림을 그리고, 사물과 이름의 관계를 깨뜨리고, 일상적인 오브제를 이질적인 공간에 배치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낯섦과 기이함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의 정형화된 사고의 틀을 깨뜨리는데 막대한 공헌을 한 형이사학과 초현실을 대표하는 화가가 아닌가.
<빨주노초파람보>는 야간비행, 빨주노초파람보, 딥퍼플, 이카루스 네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는 단편소설 모음집인줄 알았는데, 등장인물들과 사건이 서로 얽히고 설킨 하나의 장편소설이더라. <야간비행>은 신혼부부로 보이는 은하와 현재의, 과거와 현재, 미래 이야기가 복잡하게 번갈아가면서 전개되는데, 읽는 내내 긴장감과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다. 사랑에 대해 정형화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같은 사람들. 특히, 은하와 현재, 승환의 이야기는 이게 무슨 케이윌의 뮤직드라마 같은 스토리란 말인가 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다. (ㅋㅋ)
계속해서 반전이 일어난다. 글이 꿈같다. 몽환적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이야기 내의)현실인지, 누가 누구고 서로가 어떤 관계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책을 다시 읽는다.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또는 캐릭터들이 강조하는 키워드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늘 #꿈 #비블리스 #쌍둥이남매 #거울 #르네마그리트 #회귀 #딸기 #프리카 #꿈 #비행 #합동결혼식
"이제 우리 함께 하늘을 나는 거야. 그런데 만약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잃으면 잠시 꿈꾸고 있어. 내가 그 꿈속으로 따라가 널 찾을테니까." 현재가 은하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눈을 마주치며 굳은 표정으로 말한다. 진지한 그의 표정에 은하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런 꿈이 있다면, 그 꿈, 영원히 반복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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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문득,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밖'이고, 창밖이 '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세상이 만들어진 이후, 인간은 벽을 세우고 천장을 만들고 '안'이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스스로 '안'에 가두고 '밖'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꿈과 현실, 태어남과 죽음.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춤을 춘다.
나의 몸짓에, 바람에 모든 것을 비운다.
나의 안에서 나를 본다.
그리고, 나는 없다. (p.5)
"현실과 꿈은 같은 책의 페이지들과도 같은 것이다.
순차적으로 읽는 것은 현실이고, 여기저기 펼쳐 보는 일은 꿈과 같다." 쇼펜하우어 (p.9)
"사랑은 나의 안내로 그대가 그대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생텍쥐페리 (p.12)
'내가 왼손을 들면 저 자식은 오른손을 들고, 내가 오른쪽 입꼬리를 올리면 저 자식은 왼쪽 입꼬리를 올린다. 저놈은 나를 똑같이 따라 하지만 늘상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행동한단 말이다. (…) 가끔씩 나는 그를 볼 때 낯선 느낌이 들곤 한다. 하루 종일 그를 보지 않는 날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보고 싶었던 적은 거의 없다. 그는 평상시엔 존재하지 않다가 내가 그의 존재를 의식하는 순간에만 존재한다. 그는 마치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내가 인식할때만 존재하는, 없음의 세계에서 있음의 세계로의 변환가도 같다. 고로 그는 내가 주시하고 인식함으로써 존재하는 그런 존재이다. 그에게 실체가 있을까? 나는 인식하지 못하는, 그만이 인식하고 주시하는 세상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그가 살아 움직인다면? 그에게 생각이 있을까? 나와 같은 모습을 하고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따라 하지만 그만의 의지와 생각, 감정이 그에게 존재한다면? 누군가의 말처럼 어차피 세상은 보이는 것 반, 보이지 않는 것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pp.32-33)
내 기억은 논리에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 기억이 실제였다고 믿는다. 사실과 기억이 다를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늘 체험하며 산다. 과거는 기억만으로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존재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기억이 있다면 존재한 것이라는 역설을 가능하게 한다. 꿈 같은 나의 기억이, 꿈인지, 현실인지, 꿈이라면 내가 그의 꿈을 꾼 것인지, 그가 나의 꿈을 꾼 것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 살아있는 나의 감정, 그리고 은하와 현재를 마주했다는 것만은 사실이니까. (p.170)
지금, 이 편지를 읽는 것을 멈추고 어제 뭘 했는지 잠깐 떠올려볼래? 어때? 모든 게 다 생각나니? 하나도 빠지지 않고 기억해낼 수 있어? 몇 시에 일어나 무얼 먹고 어딜 갔는지, 무슨 옷을 입고 어떤 양말을 신었는지, 가방 안에는 어떤 것들이 들어 있었는지, 길을 걸을 때 오른쪽으로 걸었는지 왼쪽으로 걸었는지, 누구와 무슨 얘길 나눴고 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은 무엇인지, 하나도 빠지지 않고 기억해낼 수 있냐고. 우리는 모든 일을 순차적으로 기억하지 못해. 모든 기억은 조각일 뿐이지. 그렇게 과거는 기억의 조각으로 존재할 뿐이야. 그래서 완전한 과거는 있을 수 없어. (p.176)
직감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어. 그냥,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들. 증거는 그다음에 나타나게 되어 있지. (p.184)
그날, 그 집을 나오면서 모든 걸 잊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나의 꿈처럼 그를 만났지.
나에게 그는 우주 전체와 같았지.
그의 안에서 세상을 보았고, 그의 안에서 꿈을 꾸었어.
그의 안에서 하늘을 보았고, 그 하늘을 날고 싶었지.
그 하늘이 너무도 높아 태양 가까이 갔다는 걸,
녹아내린 날개를 보며 나는 알았어. (…)
사람의 기억이란 참으로 얄궂은 것이어서,
기억하고 싶다고 기억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잊고 싶다고 잊히는 게 아닌 법이지.
잊고 싶은 기억들은 그만큼 더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버리곤 해. (p.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