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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입은 남자
이상훈 지음 / 박하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루벤스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와 동명의 이 소설은 그림 속 남자가 입고 있는 옷으로부터 시작된 의문, '도대체 그림 속 남자는 누구인가? 이 그림 속 조선인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탈리아에 갔는가?'를 쫓는 미스테리물이다.
(방송 PD 출신인 저자가 자신을 모티브로 만든 것이 분명한 것으로 보이는) 주인공 진석의 직업은 다큐멘터리 PD로, 책 초반부에서 그는 <한복 입은 남자>에서 등장하는 조선인이 임진왜란 때 이탈리아로 건너간 조선인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기존의 다수설을 뒤집는 역사 추적 형식의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있었다. 아이템을 찾기 위해 방문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우연히 자신이 그림 속 인물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엘레나 꼬레아를 만나게 되고, 그녀가 건네 준 비망록을 친구 강배와 함께 해석하는 도중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된다. 비망록의 주인은 조선 최고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이라는 것이다. 조선의 역법을 연구하고 천문대를 설치한 죄로 명 천제의 노여움을 산 영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인연이 있었던 정화의 배를 얻어 타고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영실은 교황 앞에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했는데, 이로 인해 교황의 분노를 사, 교황을 피해 달아난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난다. 이탈리아에서 영실의 발자취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 · 이탈리아 수교 130주년을 맞은 자리에서 엘레나는 자신에게 한국의 피가 섞여 있으며, 비망록을 증거로 자신이 장영실의 후손임을 알리려고 하는데, 그런 그녀를 저지하려는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 이 소설은 진석과 장영실, 두 사람의 시점으로 나뉘어 쓰여지며,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비망록은 작가가 허구로 만들어낸 증거물이며, 작가가 장영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나는 [한복 입은 남자]를 쓰기 위해 찾은 자료들은 다음과 같다:
1. <한복 입은 남자> 그림 속 의복은 철릭과 답호인데, 답호의 길이가 철릭보다 짧은 모습은 조선 초기 의복 형태이다.
2. 임진왜란 때 노예시장을 통해 유럽으로 팔려갔던 안토니오 꼬레아는 어린 소년이다. 노예로 팔려가는 중에 어른의 의복을 소지하고 다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3. 그림 왼쪽 코너에 등장하는 배는 유선형인 서양 배와 달리 바닥이 평평한 동양의 배다.
4.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는 그의 또 다른 그림 <성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에 등장하는 배경인물 중 한 사람을 그리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소설에서는 그림 속 여러 민족을 표현하기 위해 자료를 찾던 루벤스가 다빈치의 그림이나 스케치 속에서 장영실을 모델로 그린 조선인 그림을 발견했다고 상상했다.
5.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바탕으로 KBS 역사스페셜에서 복원한 비차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행기 스케치를 보면 날개 깎인 각도며 지지대의 위치 등 유사한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6.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동시에 다연발로 로켓을 발사한다는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그리기 전 이미 장영실은 조선에서 신기전을 완성했다.
7. 1473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산타 마리아 델라네베의 풍경]은 유럽 최초의 풍경화로 거론된다. 저자는 다빈치가 유럽에서 최초로 산수화를 그리게 된 계기가 동양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추측한다.
8. 장영실의 출생-사망연도는 1390년? ~1450년?으로 추정되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년~1519년이다. 천인 출신이라 출생연도가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가마 사건 이후로 장영실의 기록이 실록에서 발견되지 않으므로 물음표가 붙었다. 작가는 세종이 명나라로 수 차례 유학을 보냈던 인재를(심지어 관직에도 올랐던) 가마를 잘못 만들었다는 이유로 내쫓고, 어디서 언제 죽었는지, 하다못해 어디로 귀양보냈는짖도 기록하지 않은 것이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9. 정화의 출생-사망연도는 1371년~1434년이며, 무슬림 출신의 색목인 환관이었다. 장영실의 명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수십차례 중국을 방문했고, 소설에는 그기간에 조선인 출신 환관을 통해 정화를 만난 것으로 설정했다. 정화는 영락제의 심복으로 일곱 차례 대원정을 떠난 유명인물이었으니 장영실이 그를 잘 알았을 것이며, 그의 항해에 분명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이 책을 토대로 한중 합작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장영실과 다빈치가 만나는 소설인데 왜 중국이 끼어들었을까? 의문이었는데, 책을 읽다보니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장영실이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How'로 등장하는 정화의 원정 때문이었다. 콜롬버스보다 100년은 앞선 세계원정, 게다가 어마어마한 크기의 함대를 자랑할 수 있으니 중국이 보기에도 중국 문화의 우수성과 위인 정화를 홍보를 할 수 있는, 괜찮은 시나리오라고 판단한 것 같다. 정화의 함대는 길이 약 137m, 폭 56m에 이르며, 총승무원이 2만 7천 여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영화 속에서 이 함대가 등장하면 정말 멋질 것 같다.
다만,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고 하다보니 스토리에 박진감이 살지 않은 것이 아쉽다. 영화로 만들 때에는 글에서 많은 부분을 덜어냈으면 좋겠다. 특히 등장하는 인물의 수가 줄었으면. 이 소설에서는 여성 인물들, 엘레나, 미령, 정의공주, 파올라 등이 전부 겉돌고 있다. 한국말을 어설프게 구사하던 엘레나가 발표에서 갑자기 어려운 단어를 술술 구사하는 것이 옥의 티처럼 어색하게 느껴졌고, 이규가 분명 미령을 어떻게 할 것처럼 보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후반부에서 장영실이 정의공주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드러내는 것도 글의 완성도를 다소 떨어뜨린다. 굳이 장영실이 노비였을 때부터 글이 시작될 필요가 있을까? 장영실의 일대기를 전부 훑다보니까 글이 장편인 것에 비해서 기대했던 다빈치와의 만남의 비중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 과학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깊게 관여했던 정의공주와 장영실이 접점이 있었으리라는 작가의 가정은 그럴싸 했지만 작가가 소설에 가정이 너무 많이 집어넣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영화에서는 포커스가 세종, 장영실, 정화, 그리고 다빈치에 좀더 맞춰졌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