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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조선 편 1 - 태조에서 세종까지 ㅣ 역사저널 그날 조선편 1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 민음사 / 2015년 1월
평점 :
KBS 일요일 오후 10시 반에 진행되는 역사 토크쇼 '그날'이 책으로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방송내용이 어떻게 편집되어 글로 옮겨졌을지 호기심이 일었다. '역사저널 그날'은 시인, 영화감독 및 시나리오 작가, 번역가, 사학 교수 등 여러 분야의 다양한 패널이 등장해서 우리 역사의 커다란 물줄기가 바뀐 '결정적인 하루'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 지식과 상상력을 총동원해 수다를 떠는 유쾌한 형식의 프로그램이다. (ebsi의 최태성 선생님과 이다지 선생님도 그날의 패널로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개그맨 이윤석이 나온 회차들을 재밌게 보았다.) 지난 주 금요일, 민음사 그날 서평단에 당첨되어 바로 다음날 [그날] 한질을 받았다. 1권은 태조에서 세종까지, 2권은 문종에서 연산군까지를 다루고 있다.
책은 방송과는 달리 조선 왕 연대순으로 편집하여 출판했다. 읽기 전에는 '그날이 아직 종영된 프로그램이 아니라서 [역사e] 시리즈처럼 방송 순서대로 담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했는데(그날에서 말하는 역사는 조선으로 한정되어 있지 않다. 대부분의 방송이 조선 위주로 흘러가고 있지만, 최근 방송에서는 김춘추와 태조왕건, 궁예를 조명하기도 했다.), 책을 쭉 읽다보니 사건의 흐름이 이어져서 읽기 편하다는 장점이 있더라. 그리고 각 장마다 해당 왕의 치적 또는 사건의 개요를 정리한 '그날을 만나며'를 도입부로 두어 독자가 토론 본문을 읽기 전 브레인스토밍을 할 수 있게끔 구성한 것도 좋았다.
이 책 1권에서는 정도전이 이성계를 만난 날(방송11회), 이성계가 500년 왕조의 서막을 열던 날(방송12회), 왕자의 난(방송13회), 세자 양녕이 폐위되던 날(방송16회), 조선이 왜구와의 전쟁을 선포한 날(방송19회), 세종이 집현전을 열던 날(방송17회), 1430년, 조선 첫 국민투표가 열린 날(방송18회)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특별기획 창덕궁 가는 날이 수록되었다. 프로그램 취지대로 조선 전기에서 핵심이 될 만 한 역사전 사건들을 잘 꼽은 것 같다. 사실 태조에서 세종까지는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굉장히 익숙한 왕들이라(게다가 나는 정도전과 세종은 몇년 전 드라마 여파로 해당 인물만 집요하게 다룬 책을 여러 권 읽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1권보다는 2권을 훨씬 재미있게 읽었다. (2권도 따로 리뷰할 예정이다.) 낯선 신선한 내용은 그닥 없지마는 토론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적 사건을 접근하는 점이 다른 역사서는 가지지 못한 그날의 장점이라고 느낀다.
책 구성은 다소 아쉬운 면이 있다. 방송 만큼 시각적 자료가 다양하게 삽입되지 못한 것은 둘째치고, 단어 주석이 해당 페이지 아랫부분이 아니라 맨 뒷장에 따로 정리되어 있어서 매번 뒷장에서 찾아읽기 번거롭더라. 무엇보다 독자에게 책의 원조 프로그램과 주요 토론자들을 앞에서 소개하지 않은 것이 편집자의 큰 실수로 느껴진다. 그날 프로그램의 애청자만이 이 책을 구입해서 읽는 것이 아니니, 독자가 책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들이 누구인지는 알고 본문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차라리 [이 책에 도움을 주신 분들] 페이지를 뒷장이 아니라 앞장에 담았더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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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주: 네, 저는 이 조선 건국의 주역은 역시 두 사람이지만 조선이 조선답게 만들어진 것, 그냥 예사 왕조가 아니고 그 후 500년을 버티는 좋은 나라로 설계된 것은 정도전의 생각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런 문장으로 정리해 보고 싶네요. '최초의 조선인.' 즉 정도전은 고려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생각은 고려의 틀을 벗어나 다음 왕조에 가 있었던 거죠. 그래서 가장 먼저 조선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한 사람. 이런 의미에서 '최초의 조선인' 이런 표현을 하고 싶습니다.
그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정몽주는 '최후의 고려인'인 셈이네요. (p.41)
이익주: 저는 조선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날: 충격적인 발언인데요.
이익주: 15세기 세계 다른 지역의 역사와 비교해 볼 때, 지배층이 위민이라는 분명한 목표와 그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점, 또 그걸 실천할 수 있는 여러 제도적인 장치를 잘 만들었다는 점에서, 저는 당시에 조선 말고는 그런 것들을 성취한 나라가 없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군사적으로 강력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정말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 15세기 세계에서 가장 살기 조은 나라였다고 생각합니다. (p.73)
김경수: 가끔 건원릉(태조무덤)에 답사를 가면 사람들이 "능 관리인 나와라. 왜 풀을 안 깎느냐" 이런 얘기들을 하는데요. 사실은 그게 아니고요. 이성계 고향의 억새를 가져다 심어 놓은 모습입니다.
그날: 아, 그렇군요. 그런데 왜 그랬나요?
김경수: 이성계는 자기 고향인 함흥에 묻히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태종 입장에서는 찾아가기가 어렵게 되죠. 그러니까 태조가 유언을 합니다. "그럼 나 죽으면 내 고향의 억새를 좀 캐다 심어다오." (p.93)
그날: 적장자가 왕위를 이은 경우가 일곱 번 밖에 없었대요.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놀랍네요. (p.112)
남경태: (샤를마뉴 · 카를대제)왕이지만 글을 몰랐어요. 그래서 신하들이 결재용 금판을 만들어 줬어요. 그 선대로 그으면 서명이 되게 한 거죠. 그렇지만 지금도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습니다. 왜냐하면 카롤링거 르네상스라는 문예부흥 운동도 일으켰고 초기 대학도 많이 지원했거든요. 그러니까 서양은 군주 자신이 학문이나 교양에 능하지는 않더라도 문화적인 마인드가 있으면 충분히 문예적인 업적을 남길 수도 있는 것 같아요. 반면에 우리는 군주에게 모든 것을 담기 위해 여왕벌을 키우듯이 교육을 하는 시스템이었고요.
신병주: 그래도 학문에 바탕을 두면 항상 수신을 하고 절제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생각하고 이러다 보니까 그만큼 정치의 수준이 올라가는 것만은 분명하죠. (p.118)
그날: 세종대왕 시절 하면 명재상들이 많기로 유명한데요. 많은 분들이 제일 먼저 황희 정승을 떠올리실 거예요. 그런데 황희 정승이 사실은 세종대왕의 반대파였다면서요? 맨 처음엔 고려왕조 편에 섰는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두 번째는 세자 이방석 편에 섰는데 이방원이 왕이 됐죠. 세 번째가 양녕대군 편이었는데, 다들 아시다시피 충녕대군이 세종이 됐어요. 뭐 이건 조선판 펠레의 저주예요. 이렇게 촉이 안 좋을 수가 없어요. 매번 다 틀립니다. (p.185)
그날: 당시 경연 주제가 어떘는지 궁금해지는데요. 제가 알기론 국가 정책에 관한 것도 물론 있지만 굉장히 사소한 것들도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한번 준비해 봤습니다. 경연 주제 중에서 재미있는 걸 세 개 뽑아 봤습니다.
'한식날 3일간 불을 못 피우는 관습이 올바른가?'
'동성同姓끼리 결혼하지 않는 근거는 무엇인가?'
'과연 용은 존재하는가?' (p.188)
김경수: 세종이 '우리 땅과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농사법을 마련해야겠다' 하는 생각을 갖고, 그런 민본주의 사상에서 펴낸 게 바로 [농사직설]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조선의 관리들이 농촌 현장에 찾아가서 농부들의 경험담을 듣고 그걸 옮겨 놓은 게 특징입니다.
그날: 아, 책상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라 농사짓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녔다는 게 감동이네요.
김경수: 심지어 세종은 실제로 경복궁 후원에 논 한 결을 만듭니다. 그리고서 직접 농사를 지어서 조 한 석을 수확하는데, 그게 이전에 보고되던 것보다 더 많았던 거죠. 자신이 직접 시험해본 후 '아, 이 [농사직설]의 방법이 더 효과적이구나' 확인한 후 [농사직설] 보급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그날: 아, 이거야말로 진짜 "내가 해 봐서 아는데" 이거네요. (p.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