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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 - 정명공주와 광해군의 정치 기술
박찬영 지음 / 리베르 / 2015년 4월
평점 :
MBC 드라마 [화정]은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의 장녀인 정명공주의 삶을 조명한 퓨전 사극이다. 드라마 줄거리를 살펴보면 광해 즉위 후 정명공주가 적통공주에서 하루 아침에 천민으로 추락하게 되고, 죽을 고비를 겪은 후 왜국의 유황광산에서 일하며 악착같은 짐승으로 성장한다고 되어 있다. 이후 그녀는 에도에 온 조선 통신사 홍주원의 도움으로 조국에 돌아오게 되며, 신분을 숨긴 채 광해 정권의 심장부인 화기도감으로 입성한단다. MBC는 해를 품은 달, 기황후에서 재미를 보더니 '팩션'이라는 이름 하에 역사 왜곡된 드라마를 자꾸 기획하는 것 같아 우려가 크다. 사극 드라마를 좋아하는 나이지만 퓨전 사극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퓨전 사극은 [해를 품은 달]처럼 완전한 가상 왕조가 아닌 이상, 역사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책을 통해 한국의 정식 역사를 배우지 않는 외국인들이 각색된 사극 드라마를 접할 경우, 잘못된 역사를 마치 사실인 양 받아들일 수가 있어서 한류 미명 하에 늘어나고 있는 퓨전 사극의 외국 수출은 그닥 반갑지 않다.
선조와 광해군은 이미 많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조명된 인물들이지만, 정명공주는 내게 낯선 인물이다. 그래서 드라마는 보지 않지만 이 책은 화정은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광해군, 인목대비, 영창대군 등의 그늘에 가려진 인물,
폐서인되어 죽어 있다 다시 숨을 쉰 공주,
당대 최고의 여성 서예가로 평가받는 인물,
역대 여섯 왕과 함께 한 최장수 공주…….
책 속에서 정명공주를 소개하는 여러 수식어 중 '최장수 공주' 타이틀이 가장 흥미롭게 들린다. 임진왜란 직후에 태어난 정명공주는 83세의 나이로 눈 감기까지, 선조부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대에 걸쳐 무려 조선 역사 1/5을 경험했다. 그녀가 꾸준히 일기나 글을 썼다면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서가 탄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선조 서거 후 영창대군이 역모에 휘말리자 서궁에 유폐되어 광해군의 서슬 퍼런 감시 하에 죽은 사람이 되어야 했고, 인조 말년에는 왕의 자격지심과 의심증으로 인해 다시 감시 하에 놓이며 어떤 말미도 주지 않기 위해 17년 동안 붓을 꺽고 일체 글을 쓰지 않았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칭기스칸의 글이 떠올랐다. 광해군과 정명공주에는 똑같은 어려움이 닥쳤다. 선조가 양위 소동을 벌일 때마다 대전에 엎드려 명을 거두어달라고 읍소하던 광해군은 결국, 가슴 속 쌓여온 분노와 굴욕을 터트려 선조 사후 모든 일을 극단적으로 처리, 강력한 왕권을 만들고 휘두르려 해 많은 적을 양산했다. 정명공주 역시 방어 기제를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힘든 사건을 연속해 겪었다. 동생 영창대군이 죽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보아야 했고, 서궁에 유폐되어 항상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았고, 나중에는 조카 인조에게 저주 의혹을 받아 죽음의 문턱을 숱하게 오르내렸다. 하지만 그녀는 어려움 속에서 스스로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했고, 침묵과 자중을 통해 자신의 적을 최소화시켰다.
정명공주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은 탓에 이 책은 정명공주의 삶보다는 임진왜란부터 광해군의 즉위와 치세, 인조반정과 두 차례 호란, 효조의 북벌 정책 및 예송 논쟁 등 그녀가 살아 숨쉬었던 시대의 주요 사건들을 차례차례 설명한다. 그리고 조선을 통틀어 최고의 여성 서예가로 평가받던 정명공주가 남긴 처세훈, '화정'의 의미를 되새기며 선조부터 효종까지 각 왕들과 당대 유명 정치인이 가졌던 한계점을 되짚는다. 조금 과한 if가 들어간 부분도 있었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새로운 가설들은 대부분 즐겁게 읽혔다. 저자의 다른 책 [한국사를 보다] 시리즈도 구입해 읽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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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잃을 뻔했던 게 원균 탓이고, 위정자 탓이고, 선조 탓이라고 단언하기에 앞서 생각할 게 있다. 물론 생명과 구조적 비리와 관련한 '명백한 악'에는 물러섬 없이 강직하게 대처해야 한다. 선이 독야청청할 때도 문제는 있다. 이때 악은 갈 곳을 잃는다. 하지만 우리는 '악'을 경계하듯이 '선'도 경계해야 한다. 서로 선이라고 말할 때 선들은 충돌한다. '선과 악'은 '빛과 그림자'처럼 한 사물의 두 가지 면이다. 선조가 이순신에게 출병을 명령했을 때, 이순신이 출병을 거부했을 때, 선조와 이순신은 모두 자신이 선을 행하고 있다고 믿었다. 사실 세상에서 선과 악의 싸움은 드물다. 선과 선의 싸움이 대부분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자신을 향한 '빛나는 다스림'이다. 그러면 선이 선을 죽이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 (p.67)
화정에 기대어 정인홍을 살펴보자. 정인홍은 자신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 마음이 내 마음과 같을 수는 없다. 화정이 추구하는 조화의 원칙에 따랐다면 정치적 표적이 되지 않고도 세상을 바꿔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반정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인홍의 근본주의적 방식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변을 움직인 정명공주의 방식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p.104)
광해군이 이렇게 탁월한 외교 전문가로 부각되고 있는 것은 1959년 이병도가 [광해군의 대 후금 정책]이란 논문에서 명과 후금의 틈바구니에 낀 광해군이 중립 외교 정책을 편 것을 높게 평가한 데 기인한다. 문제는 이병도의 학설이 일본인 학자 이나바 이와키치의 주장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이나바 이와키치는 [광해군 시대의 만주와 조선의 관계]라는 박사 학위 논문에서 명의 편에서 후금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한 신하들은 현실에 어두운 명분주의자로 깎아내렸고, 현실을 고려해 중립 외교를 편 광해군은 애민 군주로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조선과 만주의 역사를 하나로 보는 만선사관에 입각한 것이다. (…) 더 나아가 이나바는 일본이 명과 조선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덕분에 누르하치가 이끄는 북방의 여진족이 급격히 성장하여 후금이 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일제도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만주국을 도와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일본의 만주 침략과 조선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물론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탁월한 외교적 선택으로 본 일본인의 사관을 무조건 폄하할 필요는 없다. (…) 하지만 당시 조선에 실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평가의 기준이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중립 외교는 결과적으로 만족할만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실리 외교였다고 하지만 조선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후과를 치뤄야 했다. (pp.167-169)
정명의 처세술은 대체로 결정적인 순간에 침묵하는 것이었다. 고난의 시기에도, 부귀영화를 누리는 시기에도 침묵했다. 정명은 침묵으로 주변의 공격이나 질시를 잠재우는 효과를 거두었다. 정명공주는 "남의 장점과 단점을 논하기 좋아하고 정치나 법령을 망령되이 시비하는 것을 가장 미워한다."라고 막내아들에게 충고한 바 있다. 이는 정명의 행실을 잘 보여준다. 정명은 주변의 입방아에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섣불리 대응하다가 오히려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경우에는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거나 해소되었다. 직접 나선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p.193)
정명공주가 소현세자의 입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마도 자신의 속을 감추고 혼자 꿈을 키웠을 것이다. 꿈은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 정명공주는 상대의 치명적인 약점이나 상대가 싫어하는 점을 거론하는 것을 금기로 여겼다. 소현세자가 정명공주의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면 자연스럽게 인조에 이어 왕위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소현세자는 자기 생각을 드러내서 인조를 분노하게 했다. 섣불리 움직이면 표적이 된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고 함께하고 있을 때 움직여야 한다. 그때조차도 자신을 노출하면 안 된다. 언제 동지가 적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p.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