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빨간 수첩의 여자
앙투안 로랭 지음, 양영란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열린책들
블로그에서 최근 국내에 번역출간한 소설 <프랑스 대통령의 모자>와 <빨간 수첩의 여자> 소개글을 처음 접했는데, 그
때 프랑스 국기 삼색으로 단순하게 만들어진 책 표지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실물로 받아 보게 된 책은 생각했던 것보다 작고, 또
얇았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앙투안 로랭과의 만남'이 진행되었다고 하는데, 그 때 작가는 이 책을, '여자 주인공이 폭행을 당하고 핸드백을
빼앗기는데, 다음날 책방 주인이 도난당한 핸드백을 얻게 되어 그 안의 빨간 수첩을 보면서 주인을 상상하고,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요약했단다. 가볍고 얇은 책처럼 매우 간결하고 깔끔한 책 요약이다. 책 두께가 두께니만큼 쉽게, 금방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나는 이 책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
얇은
책을 오래 붙잡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딱 하나, 번역 때문이다. 이 책의 번역가 양영란 씨는 꽤 많은 프랑스 소설의 번역을
진행한 분이라 이름이 낯익은 분이었는데, 첫장부터 문장의 번역이 매끄럽지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문장마다 '그녀'라는 3인칭 주어가
들어가고, 책 중간에 등장하는 '깔치'라는, 도대체 어느 시절의 신세대어인지 알 수 없는 단어가 주구장창 반복되며, 한국어에서 잘 쓰이지 않는
수동태가 남발된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두 주인공은 이미 결혼을 결혼한 돌싱남녀이며, 중년이었는데, 남녀주인공이 생각보다 연세가 있다보니
그들이 살던 60년대에는 깔치라는 은어가 많이 쓰였을 수 있겠다, 나는 그 시대 사람이 아니라서 그랬는지 안그랬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최근에 들어본 적이 없는 단어의 선택이 이 프랑스 신세대 소설가의 책을 고전(?) 소설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 분의 가장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기욤 뮈소의 책들을 내가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 번역투가 이런 것인지, 아니면 유달리 이 책의 번역투가 고루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각 챕터가 몇 장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글을 읽는 속도가 전혀 붙지 않아서 좀
고생했다.
책
중반부에 이르러서야 나는 마치 내가 좋아하는 영화 <아멜리에>를 보는 기분을 느끼며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속도를 붙여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핸드백에서 꺼낸 빨간 몰스킨에, 여자주인공 로르의 두서없는 생각들의 조각을 모아 형체 없는 사람을
그려내어 그녀를 쫓아가는 남자주인공 로랑. 로랑을 따라 로르를 쫓던 나는 가방 속 소지품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읽어낸다는 것은 기대한 것만큼
매우 재미있는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My princess diary>도 굉장히 재밌게 읽었는데, 이 책에 조금 더 로르를 느낄
수 있는 메모가 많았더라면, 어쩌면 산만했을 수도 있지만 더 재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령 로르가 어제 저녁 친구와 먹은 저녁
영수증의 내역서라던가, 식사에 늦은 친구를 기다리며 끄적인 글이라던가, 카페에서 들었던 노래 가사를 끄적인 냅킨 같은 게 좀 더 나왔더라면.
그리고 또 내가 만약 프랑스 유명인과 작가들을 더 많이 알고 있었더라면, 최소한 로랭이 좋아하는 작가 모디아노를 알고 있었다면 이 책이 더욱
흥미로웠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인물들, 브랜드, 거리명, 심지어 작가의 이름마저 혼합된, 이 팩션 같은 소설에 좀더 빠질 수 있도록
적절한 미주가 있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로랭이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답했던 두 마디는 꽤 인상적이었다. "나는 소설을 30가지 버전으로 갖고 있다. 디테일을 강조한 버전,
결말을 다르게 변형한 버전, 세부적인 설정을 바꾼 버전 등.” 그래서 나도 생각했다. 소설 속 여자주인공 로르의
직업이 특이한데, 액자에 금박을 입히는 작업이라니! 한국에도 과연 이런
직업이 있을까?, 만약 이 책이 한국에서 영화화된다면, 동네서점
주인이란 한국에도 있는 직업이니 로랑은 독립서점 주인으로 나오면 되겠지만, 그렇다면 로르는 과연 어떤 직업을 얻게
될까?그러고보니 한국 국기도 프랑스 국기와 마찬가지로 세가지 색상, 빨강, 파랑, 흰색만 쓰이는데, 이 책표지를 어떻게 각색하면 한국적인
느낌으로 바뀔까? 만약 로르와 로랭이 조금 더 젊었더라면? 그래서 로르를 찾아갈 주니어 로랭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