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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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다시) 읽는 히가시노 게이고 추리소설 '용의자 X의 헌신'이다. 히가시노 게이고하면 짝꿍처럼 떠오르는 역자 양억관 씨가 자신이 번역했던 <용의자 X의 헌신>을 대폭 손질해 내놓았단다. 마침 내가 유가와 시리즈 일드 <갈릴레오>를 재탕하고 있는 상태(!)였고 또 이 책을 소장하고 있지 않은 상태라 갑자기 <용의자 X의 헌신>이 다시 읽고 싶어져서 이벤트에 응모해 읽게 되었다. 몇년 전에 일본 영화로 본 적 있는데,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아 책을 찾아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번에 책을 받아서 읽다보니 예전에 분명 읽은 책인데도 문장이 매우 낯설고 오히려 영화속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나는 영상은 절대 원작소설을 따라올 수 없다 파인데 말이다. 그래, 이런 장면이 있었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책을 펼친 자리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었다. 머릿속에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중간에 끊을 수가 없었다. 영화 속 이시가미는 그렇게 못생기고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아니었는데, 책 속에서 이사기미 생김새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 영화 속 배우보다는 최근에 내가 듣고 있는 인강 강사분의 얼굴이 떠오른다. 동그란 얼굴에 가느다란 실눈, 그리고 벗겨진듯한 머리…. 이 작품은 한국은 물론 최근에는 중국에서도 리메이크 되었는데, 배우들을 찾아보니 하나같이 머리숱이 풍부하고 얼굴이 날렵하다.


각설하고 책 속 스토리로 돌아가자면, 이혼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매번 찾아와 돈을 갈취하고 폭력을 휘두르던 한 중년 남자가 괴롭힘을 참지 못한 모녀에 의해 살해된다. 우발적인 살인 사건이다보니 모녀는 금방 범행을 들키고 마는데, 마침 범행을 발견한 옆집 수학교사 이시가미는 이전부터 옆집 여자 야스코를 마음속으로 사모해왔던 터라 완전범죄를 만들어 이 둘 모녀를 지켜주려 한다. 물샐틈 없이 완전한 알리바이를 만들고, 경찰 심문에 대응하는 방법까지 일일히 지시하는 이시가미로 인해 누가 봐도 범인이 명확해보였던 사건의 수사가 점점 미궁속으로 빠져버린다. 우리는 이 소설의 범인이 누군지, 살해동기와 방법이 무언지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도대체 왜, 경찰은 모녀의 알리바이에서 의뭉스러운 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걸까? 그리고 이시가미가 이렇게까지 이 두 모녀를 헌신적으로 돕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유가와 교수가 등장하는 갈릴레오 시리즈 세번째 작품인 <용의자 X의 헌신>은 많은 사람들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이라고 꼽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구시나기 형사가 '말이 되지 않는 사건'을 맞닥드리게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물리학자 유가와 교수. 이번 작품에서 등장하는 이시가미는 유가와가 인정하는 그의 단 하나뿐인 호적수다. 그만큼 스토리에 대한 완성도도 높고, 스토리가 가진 반전도 놀랍고, 결말이 주는 여운도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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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똑같은 풍경이야."

이시가미가 말했다.

"요 한 달 사이에 변한 게 아무것도 없어. 이 사람들은 시계처럼 정확하게 살아가고 있지."

"인간이 시계에서 해방되면 오히려 더 그렇게 되는 법이야." (p.140)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것은 수학이라는 세계의 입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입구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겠지. 물론 싫은 사람은 들어가지 않아도 좋다. 내가 여러분에게 시험을 치르도록 하는 것은 입구가 어디 있는가를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야." (p.178)


"사람이 풀기 힘든 문제를 만드는 것과 그 문제를 푸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울까 하는 거야. 단, 해답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치고 말이야. 어때,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흥미로운 문제군."

이시가미는 유가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p.191)


"그가 계획한 거라면 알리바이 공작에 영화관을 이용하지 않았을 거야. 자네들도 의심하고 있다시피 영화관에 갔다는 진술은 별로 설득력이 없잖아. 이시가미가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을 리 없어.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의문이 있어. 이시가미에게는 하나오카 야스코와 협력해 도가시를 살해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 설사 그녀가 도가시 때문에 고통 받고 있었다 해도 그 친구라면 다른 해결책을 모색했을 거야. 살인 같은 방법은 절대로 선택하지 않아."

이시가미가 그 정도로 잔혹한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냐고 구사나기가 묻자 유가와는 냉정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감정의 문제가 아냐. 살인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이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이지. 왜냐하면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또 다른 고통을 끌어안게 될 테니까. 이시가미는 그렇게 어리석은 인간이 아니야. 반대로, 논리적이기만 하다면 그 어떤 잔혹한 일이라도 해낼 수 있는 사내지." (pp.293-294)


"저기 오피스 빌딩 보이지?"

유가와가 앞쪽에 있는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입구에 있는 유리문 보여?"

구사나기는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유리문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보여. 그게 왜?"

"사건 직후 이시가미를 만났을 때 그와 둘이서 저 유리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본 적이 있어. 사실 난 우리가 거기에 비치고 있다는 것도 몰랐어. 이시가미가 말해 줘서 알았지.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가 사건에 관여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그저 오랜만에 호적수와 재회했다는 기쁨에 도취되어 있었을 뿐이지."

"유리문에 비친 모습을 보고 그에 대한 의심이 싹텄다는 거야?"

"그가 나보고 이런 말을 하더군. '자네는 하나도 안 늙었어. 나랑은 완전히 다르군. 머리숱도 많고 말이야.'라고. 그러면서 자신의 머리를 의식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거야. 그게 나는 놀라웠어. 왜냐하면 이시가미라는 인물은 용모 따위에 신경을 쓰는 남자가 아니거든. 인간의 가치는 그런 것으로 평가할 수 없고. 그런 것을 필요로 하는 인생은 선택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한결같은 주장이었지. 그런 그가 겉모습에 신경을 쓰는 거야. 물론 그의 머리가 상당히 벗어진 건 사실이지만 이제와서 어쩔 수 없는 일을 그는 한탄하고 있었어. 그래서 눈치채게 됐지. 이시가미가 용모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엿다는 걸. 즉 사랑에 빠졌다고 말이야. 그런데 그는 왜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느닷없이 그런 말을 했을까?"

유가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구사나기는 깨달았다.

"이제 곧 자신이 반해 버린 여자를 만나니까?" (pp.395-396)


이웃에 이사 왔다며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인사했다. 딸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을 본 순간 무언가가 이시가미의 몸을 관통했다. 모녀가 어쩌면 이렇게 예쁜 눈을 가졌을까. 그떄까지 그는 아름다운 것에 눈길을 빼앗기거나 감동해 본 적이 없었다. 예술의 의미조차 몰랐다. 그러나 그 순간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것은 수학 문제가 풀릴 때 느끼는 아름다움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그녀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의 움직임이나 눈을 깜빡이는 모습 등은 지금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p.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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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의 미술관 (책 + 명화향수 체험 키트)
노인호 지음 / 라고디자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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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이 진화하면 e-book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책. 내가 좋아하는 그림과 향수가 만났다. 이 책은 종이책이 물리적 단점―무겁고 부피가 커서 보관 및 이동(소지)에 제약이 있는―만 가지고 있는게 아니라, 후각과 촉각을 자극할 수 있는 장점이 있음을 깨닫게 만들어 준다.


방안에서 혼자 그림책을 보며 주어진 다섯개의 향―앙리 루소 <꿈>(만다린 오렌지, 레몬, 베티버, 화이트머스크),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에>(일랑일랑, 핑크페퍼, 파출리), 클로드 모네 <수련>(그레이프 프루트, 로터스, 로즈, 로즈마리),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재스민, 뮈게, 바닐라, 머스크),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유자, 리치, 피오니, 머스크)―를 맡아보며 힐링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책에는 총 45점의 대중적이고 한국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은 명화들이 수록되어 있다. 내가 그동안 적지 않은 미술책을 읽으며 그림 속에 숨겨진 이야기와 메세지를 찾는 즐거움을 취했다면, 이 책을 통해서는 감각을 곤두세워 그림을 감상하는 시간을 갖고자 했다. 그림과 어울리는 음악까지 얹어졌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책과 함께 주어진 위 다섯 가지 향수 모두 좋았는데, 개인적으로는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에> 향이 좋았다. 그림이 향기가 되고, 만약 이 향을 담을 병을 다시 디자인한다면 어떤 시각적 변형이 이루어질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향수는 향수병 패키징이 워낙 독특하고 아름다워서 모으는 걸 좋아하는데, 이런 명화 시리즈 향수가 나온다면 굉장히 취향저격 (...) 소장욕구가 물씬물씬 피어오를 것 같다.


[모네, 빛을 그리다], [미켈란젤로展]처럼 컨버전스 아트 전시회가 많이 기획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 '향기의 미술관'이 생긴다면, 그림을 보고 나서 가장 인상깊었던 향수를 전리품으로 가지고 온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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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 속 인문학 - 키케로부터 코코 샤넬까지 세상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한 인문 강의
김홍기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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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아는 만큼 보인다. 첫 직장을 의류 생산쪽에서 시작한 나지만 옷에는 쥐뿔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서 결국 좀 더 내가 관심있고 좋아하는 분야에서 직업을 얻어보겠다고 삼년 만에 일을 관뒀다. 원단과 옷의 생산적 흐름은 대충이나마 알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나한테 맞는 옷이 무엇인지, 어떤 소재가 좋고 어떤 색상이 어떤 느낌을 내는지 디자인적인 부분은 잘 모른다. 옷 고르러 쇼핑하러 가는 일이 세상 어떤 일보다도 귀찮고 힘든 난 이 쪽으론 감각이 영 꽝이구나,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 쉽게 손에서 놓아버린 첫 직장의 업무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의식주는 결코 우리 삶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며 꼭 필요한 기본이다. 단순히 보호의 기능을 넘어 옷을 '잘' 입는다는 건 결국 T.P.O와 본인 스스로에 대해 잘 아는 것으로, 어쩌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이다. 왜 그 때의 나는 이 책의 저자처럼 옷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배워보려는 생각은 하지 못 했을까?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 교유의 전통의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식 의복을 입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나마 명절에는 챙겨입던 한복은 이제 전주나 한옥마을에 가야 테마파크에서 미키 머리띠 쓰듯 남들이 모두 이곳에선 입으니까 이목 신경쓰지 않고 재미로 입을 수 있는 옷이 되었다. 우리나라사람 대부분 트렌치코트하면 영국 버버리가 원조고, 청바지하면 리바이스 진이 원조다 정도의 짤막 상식들은 있을지 몰라도 정확히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이나 옷의 자재, 부자재의 발달 과정이나 사용 목적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는 않다. 사실 몰라도 옷을 입고 사는데 큰 지장은 없기 때문에 굳이 알아야 하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중학교 기술가정 교과서야 뭐야 하면서. 하지만 나는 이런 류의 지식들을 좋아한다. 몰라도 사는데 큰 지장 없지만, 알게 되면 그전까지 무심코 지나갔던 것들에 한 번 더 눈길이 가기 만드는 이야기들.


이 책의 저자는 일단 글을 참 잘 쓴다. 의복과 관련된 명사의 말, 역사, 국내 이슈, 본인의 의견 등을 잘 버무려냈기에 글은 쉽게 읽히고 재미가 있다. 독자에게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바 역시 명확하게 전달된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내 몸에 옷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옷에 몸을 맞추려고 한단다. 하지만 저자의 말에 따르면 패션은 단순히 옷을 잘 입는 기술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기술이다. 컬러는 어떻게 매칭하고, 악세사리는 어떻게 두르고, 어떤 체형에는 어떤 디자인이 어울리고 하는 기술적인 내용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관찰하고 스스로를 분석하여 본인에게 가장 잘 어울리고 편안한 스타일 만드는 것이 우선임을 강조한다. 스스로의 스타일을 찾아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옷을 보고 그 옷 주인의 생각, 삶의 방식,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개성을 잃어버린 보편적인 미의식부터 고령화시대 시니어계층의 패션의 중요성, 모피로 보는 동물 윤리 등 옷으로 저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결코 가볍지 않고 철학적이다. 나처럼 옷에 대해 무지하고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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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옷장에 비유해보자. 그 속에서 우리는 매일 삶이라는 전쟁터에 나가 우리를 보호해줄 영혼의 갑옷을 고른다. 그 갑옷은 그저 한기와 더위를 막아주는 일차원적 기능을 넘어, 우리의 존재감, 정체성, 세상과 대면할 용기, 시대를 읽는 눈, 미적 감각 등 취향을 반영하는 거울이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사회적 인정을 추구하며 의미 있는 일을 하려고 한다. 사회의 평가와 무관한 중립적 목표란 존재할 수 없다. 패션은 우리가 설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안팎으로 우리를 돕는다. (p.32)


1930년대 '패션의 건축가'로 알려진 프랑스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마들렌 비요네는 '"옷이란 그저 몸 위에 걸쳐지는 사물이 아니다. 옷은 인간 신체의 선을 따라가야 한다. 사람이 웃으면 옷도 함께 웃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직물이 인간의 몸을 자연스럽게 감싸면서 내면의 관능미를 발산시키게 하는 바이어스 재단법을 만든 디자이너였다. 서구 패션의 역사에서 인간의 몸은 옷에서 제대로 해방된 적이 없다. 중세 말 재단기술이 발명된 이후로 인간은 옷에다 몸을 맞추어야 하는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 형벌로부터 인간의 몸을 해방시키고 옷과 인간의 표정을 하나로 묶어낸 이가 바로 비요네다. (p.37)


"어떻게 하면 옷을 세련되게 잘 입을 수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관찰하세요!"라고. 다시 말해 타인의 옷차림을 제대로 관찰한 후에 나만의 스타일링을 시도해야 한다는 얘기다. 관찰은 본질적으로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하는 단계다. 따라서 그저 옷 자체의 형태나 색상, 질감만이 아닌, 옷을 입은 후의 모양이나 상태, 즉 얼굴의 표정에서 제스처에 이르는 미세한 행동 한하나까지도 살펴봐야 한다. 관찰에 들인 시간과 그 깊이에 따라서 우리의 옷 입기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디자이너들은 이러한 관찰을 공감이라 부른다. 삶의 순간순간 속에서 사람들의 욕망과 행동을 관찰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준비과정이 된다. 좋은 디자인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궤뚫어보는 관찰력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p.38)


궁정에서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경합하는 이들은, 서로를 향해 "Je ne sais quoi(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멋지다.)"라는 말을 자주 썼다. 이 말은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당신에겐 다른 사람에게 없는 섬세한 차이가 있다.'란 뜻이었다. 궁정이란 한정된 공간에서, 유행하는 의상을 입고 비슷한 메이크업을 한 이들 사이에는 외양상의 변별성이 없었다. 유행하는 패션과 헤어스타일, 메이크업은 궁중의 모든 여성들에게 열려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언어의 정확성, 발걸음의 우아함, 교양의 수준 같이 작은 내적자질들이 인간을 구별하는 지표로서 등장하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이때부터 우아함은 '태도의 과학'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미세한 뉘앙스, 무심하게 차별화를 주는 패션 스타일링 전략은 오늘날의 프렌치 시크를 탄생시킨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pp.45-46)


<궁정인>(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 (…) 카스틸리오네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술을 소개한다. 바로 궁정인이 피해야 할 행동인 '아페타치오네'와 반드시 성취해야 할 행동인 '스프레차투라'이다. 아페타치오네는 자신의 자질과 능력을 타인들에게 보여주려는 과도한 열망, 바로 허세와 과시욕이다. 반면 스프레차투라는 그와는 정반대다. 자신이 타인들에게 보여주는 말과 행동이 노력에 의해서가 아닌 저절로 이뤄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즉 타인에게 자신에 관한 좋은 인상을 심되, 과도한 허세를 피하며 스스로를 드러내는 '중용의 미덕'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 스프레차투라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인이 높이 샀던 미덕이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탈리아 문화의 뿌리다. 원래 스프레차투라란 단어에는 '경멸하다', '거만하게 굴다'란 뜻이 담겨있었는데,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어렵고 힘든 일을 노련하고 쉽게 해내는 방식'을 지칭하게 되었다. 일례로 패션화보 속 모델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도도하고 거만해 보이는 건 스프레차투라의 원래 뜻을 잘 살린 거라고 할 수 있다. '무심한 듯 보이지만 세심하게, 유유자적한 듯하지만 능숙하게'가 바로 스프레차투라가 함축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다. (p.58)


영국의 미학자 리처드 볼하임(…) '미니멀리즘'이란 개념을 대중화시킨 인물로, 오랫동안 미술계의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며 스타일 분석에 생을 바친 철학자다. 그는 그림을 예로 들어 스타일 있는 작품을 남기고자 한다면, "자신의 관심사에 형식과 질서를 부여하라."고 말한다. 그 다음으로 캔버스에 '무엇을 표현할지', '무엇에 관한 내용을 다룰지'를 반드시 숙지하라고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스타일이란 기존의 관례와 지시를 따르기보다 자신이 발견한 아름다움의 방식을 스스로 내면화할 때 만들어진다고 이야기한다. 옷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일도 이와 마찬가지다. (…) 옷 입기란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할지, 그 만남의 상황과 맥락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일이다. 스타일은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지속적으로 삶에 적용하면서 그 속에서 나를 만들어가는 창조적인 작업이다. 그렇다. 스타일은 '짓는' 것이다. 밥을 짓고 집을 짓듯, 스타일 역시 우리 삶을 짓는 기본요소다. (p.86)


"성품은 나무와 같고, 명성이란 그 나무의 그늘과 같은 것이다. 그늘은 그저 우리가 생각하는 바일 뿐, 나무가 진정 본질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p.95)


1923년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기원전 1350년경으로 추정되는 이집트 투트 왕의 무덤을 발굴했을 때, 절대 권력 파라오 옆에는 실물 크기의 나무 인형이 놓여있었다. 왕의 옷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왕의 가슴 옆에 누워있는 이 인형이 바로 세계 최초의 마네킹이다. 또 로마 황제 네로의 아내는 자신의 모습을 본뜬 인형을 만들어 자신이 고른 옷을 입혀 평가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p.127)


사람 대신 옷을 입혀놓은 현대적 의미의 마네킹은 14세기 후반부터 유럽의 재단사들이 패션의 최신 경향을 알리기 위해 작은 인형에 옷을 입힌 후 왕족이나 귀족에게 보냈던 게 시초였다. 프랑스 루이 13세 시절, 파리는 유럽 패션문화의 선도자였다. 오늘날 명품 가게가 즐비해있는 파리의 패션특구 생 토노레 거리는 이때도 최신 유행을 전파하는 출발점이었다. 그곳의 재단사들은 약 90센티미터 정도의 키를 가진 채색 목각인형에 당시 유행하는 헤어스타일, 최신의 복장, 네일 케어, 구두를 비롯한 액세서리에 이르기까지, 최신 유행 품목들을 착장시켜 정기적으로 유럽의 각 궁정에 보냈다. 이 인형을 판도라라고 불렀다. (p.127)


패션이 글쓰기와 맞닿아있다는 것은 디자이너의 작업을 보면 또 알 수 있다. 디자이너들은 매 시즌마다 수십여 벌의 옷을 유기적인 주제로 묶어 발표한다. 이를 라인이라 칭하는데, 시의 한 행을 라인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패션쇼에 등장하는 수십여벌의 옷이 모이면 한 편의 시를 이룬다.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도 "시와 마찬가지로 패션은 어떤 것도 명시하지 않는다. 그저 제안할 뿐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p.169)


나는 내 강의를 듣는 이들에게 숙제를 내준다. 일주일 동안 자신이 입을 옷에 대한 일기를 쓰는 것이다. 브랜드나 색상, 실루엣에 대한 설명보다, 그 옷을 입고 어떤 경험을 할 것인지, 누구를 만날 것인지, 본인이 타인에게 어떤 이미지로 각인되고 싶은지를 기록하게끔 한다. 이 과정을 통해 그들은 옷이라는 사물 자체보다, 옷을 통해 얻게 되는 경험과 느낌에 주목할 것이다. 글쓰기가 옷을 입는 행위를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사실 스타일링이 어려운 것은 우리가 '유행'이란 사회현상에 지속적으로 흔들리기 때문이다. (p.169)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은 <유행의 심리학>에서 "유행이란 사회적인 평준화를 추구하는 경향과 개인적인 독특성을 추구하는 경향 사이에서 타협을 보장하는 삶의 형태이다."라고 주장한다. (…) 스타일은 한 인간이 온 생앵를 다해 지켜내야 할 원칙이자 세계관이라면, 트렌드는 한 인간의 온 생애가 지루해지지 않도록 '새로움'을 주입하는 장치다. (p.170)


티셔츠는 원래 중세시대 군인들이 입던 속옷인 리넨셔츠에서 유래했다. 당시 군인들은 철사를 고리형태로 연결하여 그물처럼 짠 갑옷을 입었는데, 제작기술이 좋지 않아 맨몸에 걸칠 경우 긁히기 쉬웠다. 티셔츠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입던 것으로, 처음엔 언더웨어로 착용되었다. 귀족들 역시 자신의 값비싼 겉옷이 땀과 같은 신체의 분비물로 인해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티셔츠를 속옷처럼 입었다. 이처럼 티셔츠는 결코 바깥에 드러나도록 입는 옷이 아니었다. 이런 흐름은 20세기까지 지속되었다. (p.175)


티셔츠가 일반 대중에게 겉옷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두 차례에 걸쳐 발생한 세계대전의 여파 때문이다. 종전 후 군인들은 일상에 돌아와서도 티셔츠를 즐겨 입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영웅을 상징하는 옷이란 문화적 의미가 더해지면서 티셔츠는 일반 대중에게도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p.176)


디자이너가 특정 패션 품목을 '고급스럽게' 재해석하는 과정은 하위문화와 상위문화가 충돌 없이 만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p.178)


고대 그리스에서 신발은 노예와 자유민을 구별하기 위한 지표였다. 그리스 철학자 플루타르코스는 "맨발은 노예의 비천함의 표시다."라고 말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노예는 신발을 신는 것이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이 당시 노예들은 석고로 발을 싼 상태로 시장에서 매매되었다. 이들을 '백색 석고를 한 인간'이란 뜻의 크레타티라고 부른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내 앞에 놓인 길을 스스로 '걸을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더불어 걸어가는 방향 또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영어에서 '내가 당신의 입장이라면'이란 뜻으로 'If I were in your shoes'란 표현을 쓰는 것도 신발이 한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뜻하게 된 데서 연유한 것이다. (pp.204-205)


노자는 <도덕경>에서 사물을 바라봄의 관점으로 명을 이야기한다. 해만 보는 것도, 달만 보는 것도 아니라 양편을 모두 품을 때 나오는 인식이 바로 통찰이며, 노자는 이것을 '밝을 명'이라고 하였다. 해와 달같이 한 자리에서 함께할 수 없는 대립적인 세계, 즉 이분법적인 두 세계를 우리의 시각이 동시에 포용할 때 마침내 '밝음'의 상태가 된다는 뜻이 아닐까? 안경은 인간의 시각이 갖추어야 할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안경이 두 개의 창으로 구성된 이유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세상을 보라는 의미일 테다. (p.213)


이탈리아의 세계적 좌파 정치학자이자 '지성인들의 지성'으로 꼽히는 안토니오 네그리는 안경을 쓰고 보는 것보다 안경을 벗고 보는 것이 때론 더 잘 보인다고 했다. 세상을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만들어서 씌워놓은 안경을 벗어던지는 일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썼다 벗었다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안경의 묘미 아니겠는가. (p.214)


유물론을 통해 실재를 파악하고 역사를 해석한 칼 마르크스에게도 코트는 중요한 사물이었다. 1849년 영국으로 망명한 그는 런던 빈민가에서 일곱 명의 자식과 함께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아픈 자식들이 죽어가도 손을 못 쓸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당시 그의 주요 수입원은 몇 개의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게 전부였고, 형편없는 원고료로 가계를 꾸려가기에는 너무 버거웠다. 그때마다 그는 전당포에 자신의 프록코트를 저당 잡히고 식료품을 샀다. 하지만 전당포에 코트를 맡기는 날에는 그가 글을 쓰러 자주 갔던 대영도서관 입장이 불가능했다. 당시 대영도서관은 코트를 착용하지 않은 자들의 입장을 불허했다. 코트가 없는 사람은 그만한 품위와 격식이 없는 사람으로 봤기 때문이다. 결국 친구인 엥겔스가 돈을 보내주면 마르크스는 코트를 되찾아 입고 도서관으로 갔다. 그때 도서관에 틀어박혀 집필한 책이 바로 <자본론>이다. 위 일화를 비추어 보건대 복식 연구자들의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한 벌의 코트에서 시작되었다."는 농담은 꽤 그럴듯해 보인다. (pp.23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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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홈즈 Miss 모리어티
헤더 W. 페티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알던 기존 로맨스 소설의 공식을 깨는 개성 넘치는 작품들을 찾아 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 - 추리, 호러, 스릴러, SF, 판타지, 역사, 좀비 등 -에  로맨스를 양념처럼 곁들인 책을 출간하는 블랙 로맨스 클럽에서 추리하면 떠오르는 셜록 홈즈와 그의 숙적, 모리아티가 현대 런던의 고등학생으로 등장해 추리 내기를 빙자하여 썸타는 신간 소설을 냈다. 일단 이 책을 내가 고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표지와 제목의 힘이었다. 그리고 이 책이 믿고 보는 황금가지의 블랙 로맨스 클럽이라는 이유도 한 몫했고. 이 책의 원제는  'Lock & Mori'로, 이는 곧 책 속에서 홈즈 군과 모리어티 양이 서로를 부르는 애칭이다.


일단 주인공들 이름에서 눈치챌 수 있겠지만 이 책은 로맨스물이기 이전에 추리물이다. 아니, 정통 추리물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소년소녀 탐정물 정도로 보는 편이 좋겠다. 릴리 파셀의 대역을 맡아 몸에 맞지 않는 빅토리아풍 옷을 입고 연기하고 있던 모리어티 양은 연극 도중 울린 화재경보음 때문에 그녀와 전혀 접점이 없던 괴짜 홈즈 군을 만나게 된다. 화재경보음을 듣지 못하고 혼자만의 실험에 푹 빠져있던 홈즈(이하 록)는 자신이 숙달하지 못한 주제의 '시대 의상'을 입고 나타난 모리어티(이하 모리)에게 관심을 보이고, 이 날의 접점을 시작으로 둘은 리젠트 공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함께 풀어나가는 콤비가 된다. 원래 무관심한 아버지였지만 어머니의 죽음 이후 돌변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난폭한 아버지 모리어티로부터 세 명의 동생을 안전하게 돌봐야만 하는 모리는 자신에게 있는 유일한 친구 문학소녀 미국인 세이디와 자신에게 강한 호감을 드러내는 록에게 자신이 가진 이 작은 비밀을 터놓고 싶지 않아 여러가지 갈등을 빚게 된다. 리젠트 파크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장검에 찔려 일격에 사망한 남자는 갑자기 연극에서 빠진 릴리 파셀의 아버지였고, 그의 추모식을 참석했던 모리는 추모식에 장식되어 있던 사진에서 자신의 엄마를 찾아낸다. 모리는 곧, 파셀 씨의 죽음은 우발적인 강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진 속에 있던 일곱명이 차례로 죽어가는, 연쇄살인의 일부였음을 눈치채게 된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영국드라마 <스킨스>를 떠올렸다. 아마 이 책의 주인공인 모리어티 양 때문일거다. 책 표지속 모리의 이미지는 왠지 스킨스의 카야 스코델라리오를 떠올리게 하고, 그녀의 말투와 행동에서 반항기와 그녀를 묘사하는 문장에서는 퇴폐미가 물씬 묻어난다. 책의 주인공은 록이 아니라 모리인데, 아마 작가가 여성이기 때문에 모리라는 캐릭터에 자신을 이입해서 이 소설을 그녀의 시점으로 이끌어간듯 하다. 작가는 책 맨 첫장에서 어머니를 위해 이 책을 바친다고 밝혔고, 책 속의 모리 역시 작중 돌아가신 엄마 에밀리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다. 모리는 엄마의 죽음 이후 아버지의 학대를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혼자 끌어안고 있기 때문에 매우 위태로워보이지만, 누군가의 이해보다는 단순한 믿음으로 위안 받는 강한 여자다.


"난 여자잖아. 거기에 따르는 몇 가지 이점이 있지."

"이를테면?"

"이해심과 통찰력, 독특한 세계관, 그리고 끊임없이 과소평가당하는 것에 따르는 힘."

나는 위축되지 않고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마지막 두 단어에 확실하게 밑줄을 쳤다. (p.129)


"그럼 넌 페미니스트야?"

"아니. 페미니스트는 평등을 위해 싸우는데, 그건 불만족스러운 목표거든."

그는 씩 웃었다.

"넌 평등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구나?"

"내가 왜 그래야 해? 남자들은 안 그렇잖아. 전 세대에 걸쳐서 남자들은 통제와 권력을 위해 싸워 왔지. 어째서 여자들은 그저 동등해지는 걸로 만족해야해?"

셜록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권력의 필요를 이해 못하겠어, 정말로. 더 중요한 일들이 있잖아."

"무력함을 느껴 본 적이 없는 자들만이 너 같은 생각을 할 여유가 있지." (pp.129-130)


록과 모리, 둘 어느 쪽도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셜록 홈즈와 모리어티 느낌은 아니다. 물론 셜록은 코난 도일의 소설 속 모습대로 흡연가이고,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지나가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 그 사람의 직업이나 사소한 습관 등을 유추해내는 버릇이 있지만, 이 책에 그려진 그의 말투라던가 모리에게 쉽게 휩쓸리는 모습은 원작에 소시오패스에 가깝게 그려졌던 완벽한 셜록과는 거리감이 있다. 아마 그가 '아직'은 고등학생이기 때문일수도 있겠다. 모리어티는 셜록 홈즈 최고의 숙적으로 묘사될만큼 사악하고 비상한 머리의 악인인데 내 생각에 이 책 속 모리양은 셜록 홈즈에서 등장하는 아이린 애들러에 더 가깝지 않나 싶다. 두 사람의 설정인 천재성이 글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지만, 모리어티의 성별 체인지, 현대 고등학교라는 배경 설정, 원작에 없던 로맨스 첨가 등으로 한없이 가벼운 글일 것이라는 내 예상과 달리 이 책의 분위기는 구름 낀 런던처럼 어두우면서도 19세기 런던처럼 위험한 느낌이 도사리고 있고, 중요한 캐릭터 왓슨이 생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모리와 록, 두 캐릭터가 스토리를 무게감 있게 채우고 있다.


책의 결말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작가 소개글에 있는 홈페이지를 들어가봤더니, 록&모리 2권 격인 마인드게임이 2016년 12월에 출간될 예정인가보다. 1권 결말이 도대체 어떻게 끝난건지 도통 이해가 안가고 아쉽다 싶었는데, 이 모두가 이어질 속편을 위해 준비된 것이었나보다. 리젠트 파크의 살인자가 모리어티가 아니라 모리가 범인이라는 익명의 글들이 그녀의 집으로 날아들고,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서 경찰도 그 익명의 투고를 믿기 시작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모리에게는 록이 있다. 이 두 사람이 진실과 정의를 찾아 움직인다. 작가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한국판과 다른 책 표지와 캐릭터 일러스트도 볼 수 있다. http://www.heatherwpetty.com/


이 책에서 별점을 낮게 준 이유는 번역 탓이다. 문장 하나 하나가 쉽게 읽히지가 않는다. 독자가 범인과 동기, 살인 방법을 추리할 수 있는 류의 책이 아니긴 하지만(그렇지만 이미 추리물을 많이 읽은 분들은 위의 짧은 내용 소개만 읽고도 범인이 누군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동기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무엇에 관련된 것인지는 쉽게 유추 가능하다.) 매끄럽지 않은 번역 탓에 책 속의 범죄사건과 록과 모리의 연애사가 머릿속에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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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지음 / 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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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도 안하는 삼수생이라고 집에서 밥버러지 취급 받는 주인공 강무순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할머니댁을 찾았다가 방심한 사이 홀로 계신 할머니 홍간난 여사를 챙길 적임자로 간택(?)되어 산간 오지 마을에 낙오된다. 어렸을 적에 아픈 남동생 탓에 이미 이곳에서 오래 머무른 전적이 있는 무순은 문명의 혜택이 없는 이곳에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여섯 살의 자신이 그린 보물지도를 얻고, 보물지도를 통해 찾아 간 곳에서 무순이 찾아낸 것은 자신의 유치와 매우 훌륭한 솜씨로 조각된 자전거 소년 목상이었다.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닌 이 보물은 누구의 것인가 고민하는 무순의 앞에 마을 유지 경산 유씨 종갓집의 외아들, 꽃돌이 창희가 나타난다. 무순은 창희를 통해 이 물건이 15년 전 이 마을에서 한날 동시에 사라진 네 명의 여자아이 중에서도 유씨 종갓집의 외딸이던 선희의 보물임을 알게 되고, 사라진 선희를 대신하여 선희가 애지중지하던 자전거 탄 소년이 누군지를 찾아 보물을 전달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자신의 이복누나 유선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창희가 무순의 보물'주인'찾기에 동행하는데, 이 두 사람과 보통을 뛰어넘는 여걸 홍간난 여사의 활약으로 15년 전 경찰과 용한 무당도 포기했던 4명의 소녀 실종 사건의 진상에 다다르게 된다. 도대체 한 마을에서 아무런 연고도 없던 네명의 소녀(종갓집 외동딸 유선희, 빨간 지붕집 불량 고등학생 유미숙, 선희와 같은 반이었던 가난한 집의 효녀 황부영, 그리고 목사집 딸 조예은)은 마을 사람들이 마을 최장수 노인의 백수 잔칫날, 증발한 듯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일까?


만약 해수온천욕을 해수욕장으로 잘못 알아듣지 않았더라면 그날 마을에서 없어진 소녀 중에 무순도 있었을 것이라고 믿은 홍간난 여사는 사건 바로 다음날 무순을 집으로 돌려보냈고, 무순은 자신이 겪은 큰 일을 머릿속에서 새까맣게 지워버리고 무탈하게 잘 지내왔다. 그렇지만 그 사건은 어린 무순만을 빼고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와르르, 무너뜨려 버린거다. 존재감도 사라져버려 마치 닌자처럼 움직이는 부영의 어머니, 세번 유산 끝에 얻은 귀한 딸을 잃은 뒤 대문을 꽁꽁 잠그고 사는 미선의 부모, 예은이가 일기장에 쓴 대로 외계인을 따라 저 멀리 우주 별로 떠났다고 믿는 목사집 사모님, 그리고 사라진 선희를 대신해 양아들을 들이고 선희의 이름이 결코 마을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유씨 종갓집 사람들……. 책 속에서 무순이 풀을 뽑다가 개미집을 망가뜨리며 하던 문장이야말로 이 책을 관통하는 구절이 아닐까 싶다. "지팡이로 쓰기엔 턱도 없지만 풀이라기엔 제법 뻣뻣한 놈을 뽑았더니 개미가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하필 개미집 위에 풀이 자랐나 보다. 아니면 풀뿌리 밑에 개미집을 지었던가. 개미로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다. (중략) 저들은 죽을 때까지 나란 존재를 모르겠다. 자신들의 삶을 일시에 무너뜨린 이 거대한 존재를. 목적도 악의도 없이 나는 개미의 세상을 무너뜨렸다." 도대체 이 마을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린 악마는 누구일까? 사라진 소녀들은 어떤 괴한에 의해 납치되어 모두 죽임 당한 것일까? 무순의 수사 활동과 번갈아가며 등장하는 "주마등" 페이지 속의 '누군가'를 찾기 위해 나는 책을 차마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책디자인에 끌려서 서평단을 신청한 책인데(띠지를 벗기면 반전 표지가 드러난다.), 무더운 이 여름에 책을 손에 붙들고 있게 만드는 힘이 있는 책이라 별 네개를 매긴다. 요즘 기대 이하의 실망스러운 책들이 많은데 이 책은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무순과 할머니의 재치 넘치는 입담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백미로 꼽는다. 그리고 결말이 모두들 아쉽다고 말한다. 명탐정 만화와 소설을 하도 읽어 왠만한 반전은 금새 눈치채는 나는 오랜만에 예상치 못했던 결말을 맞았고, 결국에 마을 사람 모두가 끝끝내 알지 못한 진실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모든 미스터리 소설에서 모든 진실은 밝혀질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몰라야 우리의 삶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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