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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7년 8월
평점 :
오랜만에 (다시) 읽는 히가시노 게이고 추리소설 '용의자 X의 헌신'이다. 히가시노 게이고하면 짝꿍처럼 떠오르는 역자 양억관 씨가 자신이 번역했던 <용의자 X의 헌신>을 대폭 손질해 내놓았단다. 마침 내가 유가와 시리즈 일드 <갈릴레오>를 재탕하고 있는 상태(!)였고 또 이 책을 소장하고 있지 않은 상태라 갑자기 <용의자 X의 헌신>이 다시 읽고 싶어져서 이벤트에 응모해 읽게 되었다. 몇년 전에 일본 영화로 본 적 있는데,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아 책을 찾아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번에 책을 받아서 읽다보니 예전에 분명 읽은 책인데도 문장이 매우 낯설고 오히려 영화속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나는 영상은 절대 원작소설을 따라올 수 없다 파인데 말이다. 그래, 이런 장면이 있었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책을 펼친 자리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었다. 머릿속에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중간에 끊을 수가 없었다. 영화 속 이시가미는 그렇게 못생기고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아니었는데, 책 속에서 이사기미 생김새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 영화 속 배우보다는 최근에 내가 듣고 있는 인강 강사분의 얼굴이 떠오른다. 동그란 얼굴에 가느다란 실눈, 그리고 벗겨진듯한 머리…. 이 작품은 한국은 물론 최근에는 중국에서도 리메이크 되었는데, 배우들을 찾아보니 하나같이 머리숱이 풍부하고 얼굴이 날렵하다.
각설하고 책 속 스토리로 돌아가자면, 이혼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매번 찾아와 돈을 갈취하고 폭력을 휘두르던 한 중년 남자가 괴롭힘을 참지 못한 모녀에 의해 살해된다. 우발적인 살인 사건이다보니 모녀는 금방 범행을 들키고 마는데, 마침 범행을 발견한 옆집 수학교사 이시가미는 이전부터 옆집 여자 야스코를 마음속으로 사모해왔던 터라 완전범죄를 만들어 이 둘 모녀를 지켜주려 한다. 물샐틈 없이 완전한 알리바이를 만들고, 경찰 심문에 대응하는 방법까지 일일히 지시하는 이시가미로 인해 누가 봐도 범인이 명확해보였던 사건의 수사가 점점 미궁속으로 빠져버린다. 우리는 이 소설의 범인이 누군지, 살해동기와 방법이 무언지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도대체 왜, 경찰은 모녀의 알리바이에서 의뭉스러운 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걸까? 그리고 이시가미가 이렇게까지 이 두 모녀를 헌신적으로 돕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유가와 교수가 등장하는 갈릴레오 시리즈 세번째 작품인 <용의자 X의 헌신>은 많은 사람들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이라고 꼽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구시나기 형사가 '말이 되지 않는 사건'을 맞닥드리게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물리학자 유가와 교수. 이번 작품에서 등장하는 이시가미는 유가와가 인정하는 그의 단 하나뿐인 호적수다. 그만큼 스토리에 대한 완성도도 높고, 스토리가 가진 반전도 놀랍고, 결말이 주는 여운도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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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똑같은 풍경이야."
이시가미가 말했다.
"요 한 달 사이에 변한 게 아무것도 없어. 이 사람들은 시계처럼 정확하게 살아가고 있지."
"인간이 시계에서 해방되면 오히려 더 그렇게 되는 법이야." (p.140)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것은 수학이라는 세계의 입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입구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겠지. 물론 싫은 사람은 들어가지 않아도 좋다. 내가 여러분에게 시험을 치르도록 하는 것은 입구가 어디 있는가를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야." (p.178)
"사람이 풀기 힘든 문제를 만드는 것과 그 문제를 푸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울까 하는 거야. 단, 해답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치고 말이야. 어때,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흥미로운 문제군."
이시가미는 유가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p.191)
"그가 계획한 거라면 알리바이 공작에 영화관을 이용하지 않았을 거야. 자네들도 의심하고 있다시피 영화관에 갔다는 진술은 별로 설득력이 없잖아. 이시가미가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을 리 없어.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의문이 있어. 이시가미에게는 하나오카 야스코와 협력해 도가시를 살해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 설사 그녀가 도가시 때문에 고통 받고 있었다 해도 그 친구라면 다른 해결책을 모색했을 거야. 살인 같은 방법은 절대로 선택하지 않아."
이시가미가 그 정도로 잔혹한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냐고 구사나기가 묻자 유가와는 냉정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감정의 문제가 아냐. 살인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이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이지. 왜냐하면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또 다른 고통을 끌어안게 될 테니까. 이시가미는 그렇게 어리석은 인간이 아니야. 반대로, 논리적이기만 하다면 그 어떤 잔혹한 일이라도 해낼 수 있는 사내지." (pp.293-294)
"저기 오피스 빌딩 보이지?"
유가와가 앞쪽에 있는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입구에 있는 유리문 보여?"
구사나기는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유리문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보여. 그게 왜?"
"사건 직후 이시가미를 만났을 때 그와 둘이서 저 유리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본 적이 있어. 사실 난 우리가 거기에 비치고 있다는 것도 몰랐어. 이시가미가 말해 줘서 알았지.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가 사건에 관여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그저 오랜만에 호적수와 재회했다는 기쁨에 도취되어 있었을 뿐이지."
"유리문에 비친 모습을 보고 그에 대한 의심이 싹텄다는 거야?"
"그가 나보고 이런 말을 하더군. '자네는 하나도 안 늙었어. 나랑은 완전히 다르군. 머리숱도 많고 말이야.'라고. 그러면서 자신의 머리를 의식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거야. 그게 나는 놀라웠어. 왜냐하면 이시가미라는 인물은 용모 따위에 신경을 쓰는 남자가 아니거든. 인간의 가치는 그런 것으로 평가할 수 없고. 그런 것을 필요로 하는 인생은 선택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한결같은 주장이었지. 그런 그가 겉모습에 신경을 쓰는 거야. 물론 그의 머리가 상당히 벗어진 건 사실이지만 이제와서 어쩔 수 없는 일을 그는 한탄하고 있었어. 그래서 눈치채게 됐지. 이시가미가 용모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엿다는 걸. 즉 사랑에 빠졌다고 말이야. 그런데 그는 왜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느닷없이 그런 말을 했을까?"
유가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구사나기는 깨달았다.
"이제 곧 자신이 반해 버린 여자를 만나니까?" (pp.395-396)
이웃에 이사 왔다며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인사했다. 딸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을 본 순간 무언가가 이시가미의 몸을 관통했다. 모녀가 어쩌면 이렇게 예쁜 눈을 가졌을까. 그떄까지 그는 아름다운 것에 눈길을 빼앗기거나 감동해 본 적이 없었다. 예술의 의미조차 몰랐다. 그러나 그 순간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것은 수학 문제가 풀릴 때 느끼는 아름다움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그녀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의 움직임이나 눈을 깜빡이는 모습 등은 지금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p.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