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체 : 세 자매 이야기
조카 알하르티 지음, 박산호 옮김 / 서랍의날씨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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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알하르티의 <천체-세 자매 이야기>를 읽고.


1. 읽기의 무게


장편 읽기는 특별한 사건이다. 작가가 걸머지고 살아온 영혼과 육체의 역사가 작품을 매개로 나의 세계와 충돌한다. 두 우주가 이리저리로 뒤섞이고, 여기저기서 공명하는가 하면 때로는 사정없이 파열음을 일으킨다.


지극한 공감과 위로의 순간 뿐 아니라 썩 유쾌하지 않은 기억들이 무의식의 해저에서 자각의 수면 위로 순식간에 끌어올려질 위험 역시 각오해야 한다. 미처 준비할 틈 없이 거칠게 소환된 체험의 조각들은 종종 수압 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인간이 만든 배의 갑판 위에서 일그러져버린 심해어의 시체처럼 당혹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만만치 않은 모험이다. 눈으로 지면을 더듬고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는 내내 긴장의 연속이다. 어떤 질감과 색채의 세계가 눈앞에 드러날지, 어떤 무늬와 음향이 마음 속 공간으로 퍼져나갈지, 몸소 겪어보기 전까지는 도무지 예측불가다. 


장편을 읽을 때는 이 모든 불안정성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용기가 요구된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진실되게 다룬 가치 있는 작품일수록, 독자로부터 더 많은 노력과 집중을 원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아랍 세계의 노련한 여성 작가, 조카 알하르티의 손을 떠나 극동의 내 품으로 날아든 이번의 작품처럼.


2. 구성과 주제의식


작품은 아라비아 반도 끝자락에 자리한 나라 오만, 그곳의 작은 마을 알 아와피(al-Awafi)를 무대로 하고 있다. 주된 시간적 배경은 지난 20세기 중후반. 상대적으로 낯선 문화권의 이야기를 다루었고, 3대 이상에 걸친 여러 가문의 인연이 얽히고설키는 과정을 그렸으며, 역사적 사실과 아득한 전설이 때로는 구분하기 어렵도록 혼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닮았다. 등장인물 군(群)의 방대한 규모와 복잡성을 구상하고 그를 포용하며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어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몇몇 대작을 방불케 한다.


표면적으로는 '아잔'과 '살리마'의 세 딸 '마야', '아스마', '칼라'의 결혼과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사를 진지하게 다룬 여느 장편이 그러하듯이, 독자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들을 포위한 채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오는 삶의 부조리와 가치의 파탄에 대한 문제다. 작품의 중심을 잡아주는 주된 서술자는 아잔의 첫째 사위, 즉 마야의 남편인 '압달라'인데, 압달라의 아버지 '거상 술레이만'의 삶부터가 온갖 악행과 비정함으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 그는 대추야자 사업을 크게 벌여 부(富)를 일군 인물이라 알려져 있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가 술레이만이 거상이라 불리게 된 진정한 원천은 인신매매 및 노예무역에 있음을 알고 있다. 때로는 누나처럼, 때로는 엄마처럼 압달라를 돌봐주던 거구의 여인 '자리파' 역시도 술레이만이 먼 옛날 쌀 한 석에도 못 미치는 삯을 치르고 사온 노예 '앙카부타'의 맏딸이자 그의 정부(情婦)였다.


3. 압달라의 번뇌


냉혹하고 마초적인 아버지 술레이만과 대조적으로, 압달라는 작중 내내 자신을 둘러싼 트라우마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이 독백한다. 어릴 적 아버지의 소총을 훔쳐 까치를 사냥하려다 밧줄에 묶여 우물 속으로 던져진 일, 친모 '파티마'의 석연찮은 죽음 등으로부터 그의 영혼은 많은 상처를 입었다. 아버지의 임종을 마주하고, 장례를 치른 이후까지도 해소되지 않는 가슴 속의 의문, 응어리, 울분이 독자에게 생생히 전달된다.


압달라의 1인칭 서술을 중심으로, 계속하여 주목하는 인물을 바꿔가는 서술구조가 돋보인다. 압달라를 제외한 모든 인물의 이야기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통일되어 있다. 인물A의 묘사 → 압달라의 회상 → 인물B의 결혼식 → 압달라의 독백 → 인물C의 죽음 → 압달라의 자기분열... 이런 구조로 시종 일관한다. 중반부 이후로는 각 인물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간대까지 과거와 현재를 어지러이 오가며 널뛰는데, 일견 혼란스럽지만 적응만 한다면 외려 속도감 있는 몰입을 돕는다. 


난이도가 높은 이러한 작법을 통해 작가가 부각시키려던 것은 무엇일까? 추측컨대 첫째로는 선대가 지은 죄악의 업보 - 그것이 후세에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 둘째로는 뚜렷한 기승전결로 단숨에 이해되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후반부로 갈수록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모두 담으려던 탓인지 서술이 다소간 지리멸렬해지는 점은 아쉬우나, 그조차도 작가가 의도적으로 작품에 부여한 개성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만한 소지가 충분하다.


4. 여우난 곬족?


아랍권 작품 최초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에서 수상(2019년)했는데, 압둘라의 심리 추적 못지않게 여러 조연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아마도 큰 역할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동네의 유쾌한 가난뱅이 '마닌', 고압적이면서도 어딘가 희극적인 데가 있는 압둘라의 '고모' 등에 대한 개성적인 서술이 특히 인상깊다.


자세한 내용을 모두 옮기기는 어려우나, 우리 민족의 것으로 치환하자면 아마도 백석의 명시<여우난 곬족>에 드러나는 혈육과 친지에 대한 애정어린 묘사와 가장 닮아있는 듯하다 :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 얼굴에 별 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모 고모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 /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모 고모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 육십 리라고 해서 파랗게 보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모 고모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5. 사족 몇 가지


① 문학은 한 집단의 문화적 총체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문학은 작가의 모국어에 대한 은혜 갚기이다. 문학은 작가 스스로의 절박한 자기구원의 시도이다.


② 히잡/부르카의 강렬한 이미지로 대표되어 굳어진 이슬람 세계에 대한 편견 - 특히나 여성 인권에 대한 - 을 많이 깼다. 적어도 작중 인물들이 가정을 꾸리고 운영해가는 면에 있어서는 모계 사회에 가까운 모습이 자주 비쳤다. 그 어떤 천쪼가리로도, 자연스레 뻗어나오는 인간의 개성과 정열을 덮을 수는 없다.


③ 아스마의 결혼 준비 중, 온 동네 여인들이 부산스레 찾아와 수다를 떨며 '우리 땐 이랬는데'라던 장면을 읽으며 : 매 시대의 문화는 특수하나, 각자의 시대를 겪은 사람들의 회상은 보편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의 반복은 더더욱, 지극히 보편적이다.


* 이 서평은 서랍의날씨(@_fandombooks_) 출판사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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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한국사 : 고려편 - 격동의 500년이 단숨에 이해되는 스토리텔링 고려사 벌거벗은 한국사
tvN〈벌거벗은 한국사〉제작팀 지음 / 프런트페이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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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3 때, 타인과 스스로를 괴롭히는 버릇이 하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터무니없어 헛웃음이 나지만, 당시엔 진지하게 임했던 일이기에 용기내어 적어본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이룩한 모든 분야에서의 모든 지식을 알고 싶어하는 버릇'이었다. 


교복 앞주머니에 들어가는 작은 수첩에 그때그때 떠오르는 궁금증을 난필로 갈겨두었다가, 쉬는 시간이나 식사 때마다 교무실에 찾아가 다짜고짜 물음을 던졌다. 주로 생물학, 철학, 종교에 대한 질문이 많아서 생물II와 윤리와사상 과목 선생님을 성가시게 했다. 처음에는 이상한 놈이라며 흥미롭게 대해주던 분들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점차 곤란해했고, 나도 불만족이 커져서 수능이 임박할수록 교무실에 찾아가는 빈도는 급감했다. 


내 사고의 수준이 높았다기보다는, 경험과 지식은 없이 어설픈 열정만 가득한 탓에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성경의 권위는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진 천성와 문명의 발달로부터 인도된 과정 중, 종교를 형성하는 것은 보통 어느 쪽의 영향이 더 큽니까?' '세상에는 셋 이상의 종교가 각자의 옳음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적어도 둘 이상의 종교는 반드시 틀린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틀린 종교에 평생 몸담은 사람들은 어떻게 처분된다는 것이 주류의 학설입니까?' 이런 식이었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그 어느 분야에서도 지식의 계통이 제대로 서지 않은 애송이의 두서없고 단편적인 질문에 불과했으리라.


2. 


20대를 거치며 당시와는 생각이 자연스레 달라졌다. 고대 아테네나 중세 유럽 수도원 쯤에 태어났다면 모를까, 나의 지식이 늘어나는 속도로는 극도로 세분화 및 전문화된 현대문명의 지식의 총량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어느 순간 뼈아프게 깨달았다. 


그래서 슬프거나 아쉽냐고?


철학, 음악, 물리학, 반도체 등의 분야에서 너무나 압도적인 전문가들을 몇 번 마주한 뒤로는 오히려 유쾌한 체념이다. 30대의 모토는 '어차피 모두 알 수는 없는 세상, 그냥 인정하자. 미련에 붙들려 심신을 소모하지는 말자. 다만 하루하루 전력을 다해 임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간은 예전 온몸을 잠식했던 그 버릇이 독서활동이라는 보다 작은 숙주로 자리를 옮겨 새로운 형태의 고민이 되었다. 로마사에 관심이 생기면 '그 방대한 <로마제국 쇠망사>를 빨리 완독해야 하는데 어쩌지?', 카잔차키스에 관심이 생기면 '열린책들에서 나온 30권도 넘는 카잔차키스 전집을 빨리 다 떼어야 하는데 어쩌지?'하며 전전긍긍하는 식이다. 어차피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무의식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좋게 말하면 자유로운 독서, 나쁘게 말하면 즉흥적인 난독의 고질적인 약점이 아닐까. 아마 평생 싸우며 조율해가야 할 문제이리라.


이런 상태에서, 본작 <벌거벗은 한국사 - 고려편>을 읽게 되었다. 전문가 집단(최태성 강사와 5명의 역사학 교수진)에 의해 집필 및 감수되었음에도 과감한 생략 및 경쾌한 집중의 미학을 보여준다는 점이 눈에 띈다. 즐겁고도 고된 평생의 독서 편력, 그 중 인연이 되어 닿은 독특한 경유지로 기억에 남을 듯싶다.


3. 


최태성 강사가 주도하고 몇몇 연예인이 밸런스를 맞추는 동명의 토크쇼가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여, 방송의 내용 중 일부를 책으로 펴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예상 독자층도 일반 대중으로 설정되어 있음이 역력하다. 


우선 소재 면에서, 역사학에 깊은 소양이 없는 사람도 무난히 받아들일 법한 것들을 잘 골라냈다. 왕건의 정치적 계산에 입각한 혼맥(婚脈) 형성, 천추태후의 야망과 몰락, 강감찬과 귀주대첩, 서경 천도를 둘러싸고 일어난 잡음과 묘청의 난, 기황후의 파란만장한 일생, 왕조 최후의 개혁군주 공민왕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은 승려 신돈의 개혁에의 도전과 실패,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애틋한 로맨스, 최영 장군과 이성계의 전우애와 악연 등. 보다시피 한국인이라면 중고교시절을 거치며 대부분 학습하게 되는 500년 고려사 중, 여러 의미에서 특기할 만한 장면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둘째로는, 이것들을 이야기로 풀어가는 방식 역시 부담스럽지 않게 친절하다. 도처에 삽입된 그림과 사진이 본문의 흐름을 잘 보조하고 있으며, 장대한 민족사의 일부를 학문적이고 근엄한 필치로 다루어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해방된 전문가의 글쓰기란 얼마나 재미있고 화려한 것인지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4.


오래 전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 이문열 작가와의 인터뷰가 올라와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는데, 서평을 쓰는 동안 무슨 연상작용을 거쳤는지 불현듯 떠올라 옮겨둔다. 


"...이와 같이 이 책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경험들을 많이 읽는데. 그리고 경험이 나중에 정보나 혹은 어떤 지식의 원천으로 활용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전에는 지금 시절 이전에는 그 나름대로 오히려 뭐랄까? 속독 혹은 난독을 기초로 하는 기억 저장법 같은 것 그 나름의 어떤 머릿속의 사서 원리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책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중에서 처음부터 정독을 해서 아주 거의 참 암기하다시피 알아야 될 것이 있고 어떤 것들은 양도 많을 뿐 아니라 개념도 광범위해가지고. 어차피 그걸 정보화해서 짧게 해서 머리에 넣을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이제 몇 단락의 큰 개념화를 하고 그 개념화에 대해서 대강의 기억을 해둡니다. 했다가 이걸 정밀하게 내가 확실히 인용하거나 활용해야 될 때가 오면 그때 가서 그 부분을 떼어내서 정독을 하고 내 것을 만드는. 그전에는 그냥 '아, 그런 종류의 지식은 어디에 있다.'라는 것만 기억해 두었다가 대강 이제 전체를 큰 책을 막 난독을 하고 그래서 큰 개념 혹은 큰 지식의 소재만 기억을 했다가 필요할 때 다시 정독을 해서 활용해 쓰는 방법이 있었는데. 지금 이제 인터넷 시대는 그런 게 별로 필요 없어진 시대라서…"


지난 세기에 전성기를 구가한 분이긴 하지만, 지식을 관리하는 기본적인 솜씨로서 지금도 참고할 가치는 충분하다. 앞서 말한 요즘의 고민, 본작을 읽는 내내 더욱 깊어진 그 번뇌를 돌파해나가는 데 힌트가 되리라 싶다.


5. 


대학 시절, 철학과의 모 교수님에게 차림새가 특이하고 여기저기서 강연 및 방송활동에 열심이던 모 괴짜 교수에 대해 물었다가 '그런 건 인간도 아니다'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글쎄, 주류 학파에 속한 아늑한 강단철학자보다는 여기저기서 다소간 욕을 들어먹더라도 자기 힘으로 어떻게든 세상에 유의미하고 긍정적인 변화를 주려 시도하는 사람이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드는 요즘이다.


물론 특정 분야를 깊이 있게 공부한 사람에게는 한방에 나가떨어져버릴 위험한 발언인 것은 안다. 다만 세상을 바꾸는 것은 언제나 이론가들이 아니라 과감한 행동파, 실천가, 혁명가들이 아니었던가?


마르크스의 유명한 낙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의 마지막 두 문장이 떠오른다. 이 또한 옮겨두며 졸문을 마친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가지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이다."


* 이 서평은 프런트페이지(@frontpage_books)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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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그녀
왕딩궈 지음, 김소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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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나 카레니나>의 도입부를 살짝 비틀어 볼까. '안정되고 단란한 사랑의 모습은 대개 비슷하지만, 실패하여 쓰라린 사랑의 모습은 실로 제각각이다.'라고.


다만 사랑의 경우에는 전자가 후자로 뒤엎어지는 일도 적지 않다. 쇼윈도에 잘 진열된 구슬처럼 흠결 없이 청아한 빛을 뿜어내다가도, 일단 금이 가고 무너져내리기 시작하면 대체 어떤 분열의 무늬가 드러날지는 겪어보기 전까지 당최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당사자에겐 천지개벽에 버금가는 대사건이니까. 숲에서는 숲이 잘 보이지 않는 법 아니겠는가.


실재와 허구의 인물들을 통틀어, 급변하는 그 물살을 제대로 읽지 못해 휩쓸리고 부서져버린 영혼을 나는 몇 명 알고 있다. 물론 그들을 위해 애써 위로의 말을 건네려 머리를 쥐어짜지 않게 된지는 오래다. 주고받는 말 몇 마디에 나아버릴 슬픔은 없으니.


2. 


주인공 량허우는 스팟라이트를 몰고 다니는 프런트맨 타입의 캐릭터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 유형으로서 작가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는 삶이라는 무대의 한 구석에서 숨소리도 내지 않고 웅크려 있다가, 돌연한 공기의 변덕에 커튼이 나부끼는 바람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는 당황한 사람처럼 등장한다. 과장을 보태자면, 1인칭으로 서사를 이끌어갈 여력이나 있을지 염려될 정도의 인물이다. 시종 담담한 어조로 일관하며, 경도되어 있는 철혈의 신념도, 내면에 삼켜둔 폭풍 같은 에너지도 없는, 세속의 시각으로는 그야말로 볼품없는 남자다. 


작품은 그가 아내 쑤에 대한 살해 혐의(물론 누명이다!)로 복역 후 오십 줄을 넘겨 출소하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그는 아들 부부의 눈치를 보고, 가사 도우미 아윈의 눈치를 보고, 처가 식구들의 눈치를 본다. 그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듯한 그의 삶은 어떻게 지탱되는가? 작가가 그의 입을 빌려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메세지는 무엇인가?


3.


인간은 가치의 그물망, 그 가없는 인다라의 망망대해를 평생 헤매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헤맴의 정도와 불확실성을 줄여주는 중요한 완충작용을 해주는 가치라면 역시 타인과 주고받는 사랑이리라. 아무리 빈한한 노동자라도 그를 굳세게 지지하는 가족이 있다면 평생을 순조롭게 살아갈 수 있다. 반면 유명 연예인이나 재벌이라도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가치의 안식처를 제때 발견하지 못한다면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낱 범부의 삶을 지탱하고, 심장이 멎지 않도록 도와주는 여러 여인들로부터의 사랑. 유년기의 기억을 잃지 않게 해주는 한 이정표로서의 어머니와 누나, 청장년기를 함께한 아내 쑤, 인생의 황혼기에 저녁 하늘과 두 뺨을 동시에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새로운 설렘으로 다가오는 대학 후배 종잉 등등.


'여기 성실하지만 다만 그 뿐인 시계수리공이 있었다. 그는 우연히 야쿠자 기질의 난폭한 유력 정치인의 어린 딸과 하룻밤 로맨스를 보냈다. 6년 뒤 여자는 그의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를 탐탁잖아 하면서도 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각고하는 장인의 재력에 힘입어 그는 시계점 사업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아내의 외도와 자살로 어쩌구저쩌구...'라고 건조하게 줄거리를 읊어버리기엔, 행간에 숨겨진 섬세한 의미와 뉘앙스가 무척 풍부하고 입체적인 작품이다. 


간접 경험의 저변 확장과 주요 인문적 가치들의 무의식적인 내재화라는 측면에서, 문학의 효용을 다시 한 번 강렬하게 체험하게 해 준 작품이다. 



4. 


작가 왕딩궈의 이력 또한 독특하다. 대만인인데, 10대 후반에 등단하여 일약 대만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가 서른에 돌연 절필을 선언한다. 그 후 공무원, 샐러리맨, 건설업 등을 거치며 흔치않은 삶을 보내다가 쉰 무렵 문단에 복귀하여 칠순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작품의 뼈대를 구성하는 주된 문학적 장치들은 아마도 작가가 밟아온 이러한 인생행로를 여러 각도로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여성, 죽음, 마지막으로 시계가 특별한데, 작품 후미에서 2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종잉이 량허우에게 건네는 대사가 인상깊어 옮겨둔다.


"...선배한테는 시간이 그렇게 중요한 거죠? 그런데 그 시간이 선배 손에 마냥 멈춰 있는데 왜 그냥 두는 거예요...?"


5.


인류가 입말과 글말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로, 사랑을 소재로 지어진 이야기는 한량없이 많다. 그 중 명실상부한 정전(canon)의 반열에 든 작품들,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인물들만 추려도 결코 적지 않다. 에밀리 브론테의 히스클리프, 김용의 양과와 소용녀, 괴테의 베르테르, 체호프의 불멸의 단편에 얼굴을 비치는 몇몇 여주인공 등등.


그것들을 자꾸만 찾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뻔히 고된 여정일 줄을 알면서도, 그들을 만나 함께 혹독한 사랑의 미로를 헤매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배꼽 아래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뭇 동물의 사랑과는 달리, 인간이란 불필요할 정도로 지나치게 복잡한 존재인 탓은 아닐는지. 세상에 나서 완전한 한 번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완전한대로나마 그렇게라도 다양한 아픔과 눈물을 경험해봐야 하기 때문은 아닐는지. 


사랑의 프리즘을 통해 분광되는 인간의 다채로움과 미숙함은 어찌나 현란한지. 오래 들여다보기엔 너무도 구슬프다.


6.


오늘의 무드는 강렬하고 독특하다. 


글을 쓰는 내내 음악과 비에 취해 있었다. 방 안에는 버드 파웰의 템포가 빠르면서도 애수가 느껴지는 연주와 그의 서글픈 흥얼거림이, 창문 밖으로는 흘겨보듯 머뭇대다가 몇 번이고 세차게 쏟아붓는 장대비가. 


둘 다 작품의 여운처럼 천장을 더듬고, 또 하늘을 덮으며 퍼져나간다. 지금의 정취가 가능한 오래 이어지길 바란다. 아니면 두어 시간, 혹은 삼십 분만이라도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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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알에이치코리아(@rhkorea_books)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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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에디터스 컬렉션 16
조지 오웰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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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고.


1.


영미권의 저명한 작가 오웰의 주저 중 하나다. 다른 저작인 <동물농장>과 <1984>가 우화, 풍자, 디스토피아 등 소설 일반에 기대되는 픽션으로서의 문학적 특징을 띠고 있다면, 이 작품은 완전한 르포다. 양차대전 사이 일어났던 스페인 내전(1936~1939)에 오웰 본인이 의용군으로 자원입대하여 참전(1936년 말~1938년 초)했던 경험을 토대로 집필했다. 


2. 


보고문학의 충실한 전범이지만, 작품 저변에 흐르는 정서는 강렬한 분노와 냉소다. 일견 모순적인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개전 초기의 전황은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파시즘 세력과 그를 저지하기 위해 유럽 도처에서 모여든 이들로 구성된 의용군 및 혁명정부의 대결이었으나, 갈수록 후자 측에 소련을 위시한 크고작은 정치세력이 개입하며 내홍을 겪게 된다. 


특유의 선전선동 전술로 주도권을 장악한 주류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이념적 잣대 및 이해타산에 따라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 몇몇 세력에 대한 집요하고 무자비한 탄압을 벌였다. 평등과 혁명이라는 고고한 이상을 좇아 발기했던 이들 중 상당수가 불법적으로 체포되고, 부조리한 졸속 재판 이후 처형되었다.


3. 


오웰은 반(反)파시즘 세력 중에서도 소수파였던 POUM(스페인 마르크스주의 통일노동자당) 소속의 의용군으로 전쟁을 치렀는데, 전술한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에 가장 크게 희생된 세력 중 하나가 바로 POUM이었다. 그들의 - 이렇게 부르는 것이 가능하다면 - '공식적'인 지위는 불과 반 년 남짓한 기간 사이에 구국의 세력에서 독일/이탈리아의 사주를 받고 잠입한 더러운 트로츠키주의자 겸 파시스트 첩자로 추락하였고, 스페인 국내외에 스스로의 이념적 정체성과 전쟁 중의 행보를 알릴 언론의 교두보를 전혀 확보하지 못한 POUM측의 지도부와 평당원/의용군 상당수가 빠르고 허무하게 숙청당하고 말았다.


당연히 오웰의 신변에도 무시무시한 위협이 가해졌으나, 그와 그의 아내는 때마침 오웰이 전투 중 입은 총상으로 후방의 병원에 옮겨져 치료받고 있던 덕에 아슬아슬하게 탈출할 수 있었다. 며칠만 늦었어도 오웰 역시 다른 POUM 동지들처럼 참혹한 운명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올 일도 없었으리라는 데까지 생각이 닿아 기분이 묘하다.


4. 


작품은 총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12장은 오웰 본인이 스페인에서 몸소 겪은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상세한 진술이다. 


처음 의용군 막사에 합류한 오웰의 눈에 들어온 스페인 의용군의 모습은 신념에 불타 형형한 안광을 내뿜는 혁명투사와는 거리가 멀다. 자기들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기나 한지 궁금할 정도로 시간 개념에 둔하고, 무기가 부족하며, 기초 제식조차 엉망으로 허술하다. 파시스트 진영 적군과의 교전보다도 노후한 총기 및 조작상의 미숙함으로 인한 오발사고로 인해 입는 피해가 크다. 그럼에도 그들은 늘상 온화하고, 이방인인 오웰에 대한 친밀감의 표시로 담배 한 갑을 통째로 안겨 주는 등 -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 '인간적인 품위'를 간직하고 있는, 독특한 매력의 소유자들이다.


중반부를 지나며 양군이 수백 명 단위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는 전투의 살풍경에 대한 묘사는 물론 출중하지만, 그조차도 제대로 훈련받은 정규군 간의 대회전에 비하면 우스꽝스럽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소동에 가까움이 여실히 드러난다. 입대 후 115일 만에 첫 휴가를 나와 겪는 일을 다룬 7장에 이르기까지, 오웰이 스페인 혁명군을 대하는 시선에서는 따스한 애정과 유머가 느껴진다.


8장 이후로는 앞서 썼듯 스페인 전역을 둘러싼 정치공학적 상황이 복잡하게 전개되며 반파시즘 세력의 내분이 점차 부각된다. 바르셀로나 시내에서 여러 정파 간의 총격전이 벌어지고, 혁명의 열기는 사그러들어간다. 여러 가지 요인이 얽혀 있겠지만, 앞서 전선에서 함께한 전우들이 어지러운 정치적 싸움에 속절없이 희생되고, 그들의 순수한 우국충정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바라보아야만 했던 이의 분노와 무력감이 본작의 주된 집필동기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실제 역사에서도, 스페인 내전은 결국 프랑코 군의 승리로 끝나고 만다.)


5. 


최후반부의 두 장은 작가 본인도 인정했듯, 1~12장과는 퍽 이질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에 최종 개정판에서는 부록I/부록II로 이름 붙여져 실렸다. 안전한 고국으로 돌아온 오웰이 뒤로 한 발 물러나 자신의 체험을 다시 한 번 넓은 시야로 조망하며, 1~12장의 상황이 벌어지게 된 원인에 대해 고찰 후 덧붙인 것으로 여겨진다.


부록I은 스페인 내전 전후의 국제 정세, 공산 세력 개입의 구체적인 타임라인 및 일련의 사건들이 갖는 정치적 의미에 대해 논하고 있다. 부록II에서는 당시 공산권의 대표 언론인 <Daily Worker>가 자신들이 숙청 대상으로 낙점한 세력에 대해 퍼부은 온갖 협잡과 거짓말, 그리고 별다른 조사없이 그 논조에 동조한 영국, 프랑스 등지 일부 언론의 보도가 갖는 모순점을 지적하며 조목조목 반박하는 데에 집중한다.


6. 


정확히 같은 장르는 아니지만 이 작품과 유사하게 특별한 울림을 주는 책들이 있다. <타임머신>, <우주전쟁> 등으로 허버트 조지 웰스의 <세계사 산책>이 그렇고, <삼총사>로 유명한 알렉상드르 뒤마의 <프랑스사 산책>이 그러하다. 


본작과의 공통점은 전문 역사가나 기자가 아니라 문호로서 훗날 평가받는 이들이 자기 전공 외의 분야에 대해 상세히 논한 책들이라는 것인데, 압도적인 필력과 통찰의 깊이 덕분인지 오히려 학자들이 저술한 두꺼운 역사책, 언론인이 작성한 일련의 특집 기사보다 더 받아들이기 흥미진진하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 이 서평은 문예출판사에서 제공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선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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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70년 이야기
강인숙 지음 / 열림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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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숙의 『만남 -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70년 이야기』를 읽고

1. 천재 이어령의 발자취

2022년 2월, 이어령 선생이 향년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우리 문단을 비옥하게 일구는 데 선생께서 공헌하신 바 실로 크다. 서울대 국문과 재학중이던 스무 살 무렵, 당시엔 주목하는 이 별로 없던 작가 이상을 독특한 관점에서 조명해낸 '이상론'을 문리대학보에 실으며 첫걸음을 내딛었다. 이듬해 1956년에는 동시대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던 김동리, 조향, 이무영 등을 각종 우상에 빗대어 매섭게 비판하는 평론 '우상의 파괴'를 한국일보 지면을 통해 발표하며 겨우 스물두엇의 나이로 화려하게 데뷔한다.

이지적이면서도 삶을 향한 불타는 정열로 가득한 장부 이어령. 그 뒤로도 평생에 걸쳐 아무나 못할 일들에 도전하고 또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창간호부터 교양에 목마른 독자들의 힘찬 성원에 힘입어 중쇄에 중쇄를 거듭한 문예지 <문학사상>의 창간과 운영. 이 땅의 숱한 문학인들을 발굴하고, 키워내며, 격려하여 자부심을 심어준 이상문학상의 제정. 일본 관부 차원의 지원을 등에 업고 7년 간의 조사와 몰두 끝에 세상에 내놓은 명저 <축소지향의 일본인>. 노태우 정부 시절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남긴 유무형의 문화적 유산, 그 중에서도 백미로 손꼽히는 88올림픽의 개폐회식.

하늘이 내린 재능, 망설임 없는 헌신, 큰 부름과 큰 쓰임. 내 눈에는 연의의 제갈량을 방불케 하는 불세출의 호걸로 다가온다. 사나이 세상에 났으면 큰 뜻을 품어야지, 뜻을 품었으면 성큼성큼 내딛어 원한 바 이루어야지. 하늘은 어찌하여 이어령을 내고 육십여 년 후에 다시 이동녘을 냈단 말인가? 짐작컨대 사사하여 배우고 또 본받으라 하신 뜻이 아닐는지.

타고난 재주도, 정열의 온도도, 성취의 이력도 모두 나를 압도하는 인물들을 만날 때면 늘 가슴 속을 어지럽히는 몇 가지 정념 - 흠모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 든든한 마음, 열등감. 이번에도 어김없었다.

2. 아내가 바라본 이어령

이어령 선생에 대한 얘기를 먼저 실컷 했지만, 이 책은 사실 - 부제 그대로 - 선생과 대학 동기로 만나 70년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온 평론가 강인숙 씨의 남편을 그리는 회고록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사랑해온 이, 더군다나 먼저 떠난 이를 두고 사무치는 심정은 감히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것.

그러나 다할 수 없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다해보려 발버둥치는 것이 곧 문학이고, 영원히 직관할 수 없는 세계와 물자체의 둘레를 하염없이 돌며 나빌레라 온갖 춤사위를 벌이는 것이 곧 시이다.

평생을 손잡고 걸었던, 뛰어난 남편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은근히 묻어나는 91세 노인의 글. 하지만 지나간 모든 것에 대한 돌이킴은 언제나 그리움으로 수렴하는 걸까? 때로는 베인 데서 흐르는 피처럼, 때로는 꽃핀 데서 내뿜는 향기처럼, 곳곳에 배인 님 향한 절절한 부름에 내 마음도 울긋불긋, 노을 내려앉는 바다처럼 물들곤 했다.

3. 사랑과 사람과 삶

많다기엔 어쭙잖고 적다기엔 겸연쩍은 삼십 줄의 나이, 그런 내게도 사랑하는 이 있어 미래를 이따금 함께 그려본다. 강인숙 씨에게 이어령 선생이 다시 없을 동반자였듯, 내게도 그녀는 어느덧 불가결한 존재로서 확고하다.

다만 예기치 못했던 점은 추상적 담론 못지않게 일상의 대화를 나눌 때도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생활인의 숙명이련가?

물론 이조차도 조금 여유를 갖고 길게 본다면, 우리를 감싸안는 운명의 피륙, 낭만의 비단결 언저리께 반짝이며 나부끼는 추억의 선물이리라. 영혼의 서랍 한 켠에 고이 모셔두게 될, 그리하여 언젠가 다시 꺼내보며 그립고 또 그립다 눈물겨울 그런 선물.

생을 감당할 수 있을 동안 꿋꿋이 살아가자. 질주할 수 있을 때 내달리자. 잘되고 못되고는 중요하지 않다. 행복에 있어서도 국궁진췌 사이후이. 몸 굽혀 온 힘 다해 사랑하고, 죽은 뒤에야 그만두자.

* 이 서평은 열림원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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