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까이, 그녀
왕딩궈 지음, 김소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5월
평점 :
1.
<안나 카레니나>의 도입부를 살짝 비틀어 볼까. '안정되고 단란한 사랑의 모습은 대개 비슷하지만, 실패하여 쓰라린 사랑의 모습은 실로 제각각이다.'라고.
다만 사랑의 경우에는 전자가 후자로 뒤엎어지는 일도 적지 않다. 쇼윈도에 잘 진열된 구슬처럼 흠결 없이 청아한 빛을 뿜어내다가도, 일단 금이 가고 무너져내리기 시작하면 대체 어떤 분열의 무늬가 드러날지는 겪어보기 전까지 당최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당사자에겐 천지개벽에 버금가는 대사건이니까. 숲에서는 숲이 잘 보이지 않는 법 아니겠는가.
실재와 허구의 인물들을 통틀어, 급변하는 그 물살을 제대로 읽지 못해 휩쓸리고 부서져버린 영혼을 나는 몇 명 알고 있다. 물론 그들을 위해 애써 위로의 말을 건네려 머리를 쥐어짜지 않게 된지는 오래다. 주고받는 말 몇 마디에 나아버릴 슬픔은 없으니.
2.
주인공 량허우는 스팟라이트를 몰고 다니는 프런트맨 타입의 캐릭터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 유형으로서 작가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는 삶이라는 무대의 한 구석에서 숨소리도 내지 않고 웅크려 있다가, 돌연한 공기의 변덕에 커튼이 나부끼는 바람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는 당황한 사람처럼 등장한다. 과장을 보태자면, 1인칭으로 서사를 이끌어갈 여력이나 있을지 염려될 정도의 인물이다. 시종 담담한 어조로 일관하며, 경도되어 있는 철혈의 신념도, 내면에 삼켜둔 폭풍 같은 에너지도 없는, 세속의 시각으로는 그야말로 볼품없는 남자다.
작품은 그가 아내 쑤에 대한 살해 혐의(물론 누명이다!)로 복역 후 오십 줄을 넘겨 출소하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그는 아들 부부의 눈치를 보고, 가사 도우미 아윈의 눈치를 보고, 처가 식구들의 눈치를 본다. 그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듯한 그의 삶은 어떻게 지탱되는가? 작가가 그의 입을 빌려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메세지는 무엇인가?
3.
인간은 가치의 그물망, 그 가없는 인다라의 망망대해를 평생 헤매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헤맴의 정도와 불확실성을 줄여주는 중요한 완충작용을 해주는 가치라면 역시 타인과 주고받는 사랑이리라. 아무리 빈한한 노동자라도 그를 굳세게 지지하는 가족이 있다면 평생을 순조롭게 살아갈 수 있다. 반면 유명 연예인이나 재벌이라도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가치의 안식처를 제때 발견하지 못한다면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낱 범부의 삶을 지탱하고, 심장이 멎지 않도록 도와주는 여러 여인들로부터의 사랑. 유년기의 기억을 잃지 않게 해주는 한 이정표로서의 어머니와 누나, 청장년기를 함께한 아내 쑤, 인생의 황혼기에 저녁 하늘과 두 뺨을 동시에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새로운 설렘으로 다가오는 대학 후배 종잉 등등.
'여기 성실하지만 다만 그 뿐인 시계수리공이 있었다. 그는 우연히 야쿠자 기질의 난폭한 유력 정치인의 어린 딸과 하룻밤 로맨스를 보냈다. 6년 뒤 여자는 그의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를 탐탁잖아 하면서도 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각고하는 장인의 재력에 힘입어 그는 시계점 사업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아내의 외도와 자살로 어쩌구저쩌구...'라고 건조하게 줄거리를 읊어버리기엔, 행간에 숨겨진 섬세한 의미와 뉘앙스가 무척 풍부하고 입체적인 작품이다.
간접 경험의 저변 확장과 주요 인문적 가치들의 무의식적인 내재화라는 측면에서, 문학의 효용을 다시 한 번 강렬하게 체험하게 해 준 작품이다.
4.
작가 왕딩궈의 이력 또한 독특하다. 대만인인데, 10대 후반에 등단하여 일약 대만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가 서른에 돌연 절필을 선언한다. 그 후 공무원, 샐러리맨, 건설업 등을 거치며 흔치않은 삶을 보내다가 쉰 무렵 문단에 복귀하여 칠순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작품의 뼈대를 구성하는 주된 문학적 장치들은 아마도 작가가 밟아온 이러한 인생행로를 여러 각도로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여성, 죽음, 마지막으로 시계가 특별한데, 작품 후미에서 2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종잉이 량허우에게 건네는 대사가 인상깊어 옮겨둔다.
"...선배한테는 시간이 그렇게 중요한 거죠? 그런데 그 시간이 선배 손에 마냥 멈춰 있는데 왜 그냥 두는 거예요...?"
5.
인류가 입말과 글말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로, 사랑을 소재로 지어진 이야기는 한량없이 많다. 그 중 명실상부한 정전(canon)의 반열에 든 작품들,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인물들만 추려도 결코 적지 않다. 에밀리 브론테의 히스클리프, 김용의 양과와 소용녀, 괴테의 베르테르, 체호프의 불멸의 단편에 얼굴을 비치는 몇몇 여주인공 등등.
그것들을 자꾸만 찾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뻔히 고된 여정일 줄을 알면서도, 그들을 만나 함께 혹독한 사랑의 미로를 헤매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배꼽 아래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뭇 동물의 사랑과는 달리, 인간이란 불필요할 정도로 지나치게 복잡한 존재인 탓은 아닐는지. 세상에 나서 완전한 한 번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완전한대로나마 그렇게라도 다양한 아픔과 눈물을 경험해봐야 하기 때문은 아닐는지.
사랑의 프리즘을 통해 분광되는 인간의 다채로움과 미숙함은 어찌나 현란한지. 오래 들여다보기엔 너무도 구슬프다.
6.
오늘의 무드는 강렬하고 독특하다.
글을 쓰는 내내 음악과 비에 취해 있었다. 방 안에는 버드 파웰의 템포가 빠르면서도 애수가 느껴지는 연주와 그의 서글픈 흥얼거림이, 창문 밖으로는 흘겨보듯 머뭇대다가 몇 번이고 세차게 쏟아붓는 장대비가.
둘 다 작품의 여운처럼 천장을 더듬고, 또 하늘을 덮으며 퍼져나간다. 지금의 정취가 가능한 오래 이어지길 바란다. 아니면 두어 시간, 혹은 삼십 분만이라도 더-.
#가까이그녀 #왕딩궈 #중국소설 #대만소설 #해외소설 #중화소설 #무라카미하루키 #책추천 #도서추천 #북스타그램 #RHK북클럽 #책스타그램 #리뷰 #서평 #독후감 #글 #출판사
* 이 서평은 알에이치코리아(@rhkorea_books)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