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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체 : 세 자매 이야기
조카 알하르티 지음, 박산호 옮김 / 서랍의날씨 / 2024년 6월
평점 :
조카 알하르티의 <천체-세 자매 이야기>를 읽고.
1. 읽기의 무게
장편 읽기는 특별한 사건이다. 작가가 걸머지고 살아온 영혼과 육체의 역사가 작품을 매개로 나의 세계와 충돌한다. 두 우주가 이리저리로 뒤섞이고, 여기저기서 공명하는가 하면 때로는 사정없이 파열음을 일으킨다.
지극한 공감과 위로의 순간 뿐 아니라 썩 유쾌하지 않은 기억들이 무의식의 해저에서 자각의 수면 위로 순식간에 끌어올려질 위험 역시 각오해야 한다. 미처 준비할 틈 없이 거칠게 소환된 체험의 조각들은 종종 수압 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인간이 만든 배의 갑판 위에서 일그러져버린 심해어의 시체처럼 당혹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만만치 않은 모험이다. 눈으로 지면을 더듬고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는 내내 긴장의 연속이다. 어떤 질감과 색채의 세계가 눈앞에 드러날지, 어떤 무늬와 음향이 마음 속 공간으로 퍼져나갈지, 몸소 겪어보기 전까지는 도무지 예측불가다.
장편을 읽을 때는 이 모든 불안정성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용기가 요구된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진실되게 다룬 가치 있는 작품일수록, 독자로부터 더 많은 노력과 집중을 원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아랍 세계의 노련한 여성 작가, 조카 알하르티의 손을 떠나 극동의 내 품으로 날아든 이번의 작품처럼.
2. 구성과 주제의식
작품은 아라비아 반도 끝자락에 자리한 나라 오만, 그곳의 작은 마을 알 아와피(al-Awafi)를 무대로 하고 있다. 주된 시간적 배경은 지난 20세기 중후반. 상대적으로 낯선 문화권의 이야기를 다루었고, 3대 이상에 걸친 여러 가문의 인연이 얽히고설키는 과정을 그렸으며, 역사적 사실과 아득한 전설이 때로는 구분하기 어렵도록 혼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닮았다. 등장인물 군(群)의 방대한 규모와 복잡성을 구상하고 그를 포용하며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어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몇몇 대작을 방불케 한다.
표면적으로는 '아잔'과 '살리마'의 세 딸 '마야', '아스마', '칼라'의 결혼과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사를 진지하게 다룬 여느 장편이 그러하듯이, 독자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들을 포위한 채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오는 삶의 부조리와 가치의 파탄에 대한 문제다. 작품의 중심을 잡아주는 주된 서술자는 아잔의 첫째 사위, 즉 마야의 남편인 '압달라'인데, 압달라의 아버지 '거상 술레이만'의 삶부터가 온갖 악행과 비정함으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 그는 대추야자 사업을 크게 벌여 부(富)를 일군 인물이라 알려져 있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가 술레이만이 거상이라 불리게 된 진정한 원천은 인신매매 및 노예무역에 있음을 알고 있다. 때로는 누나처럼, 때로는 엄마처럼 압달라를 돌봐주던 거구의 여인 '자리파' 역시도 술레이만이 먼 옛날 쌀 한 석에도 못 미치는 삯을 치르고 사온 노예 '앙카부타'의 맏딸이자 그의 정부(情婦)였다.
3. 압달라의 번뇌
냉혹하고 마초적인 아버지 술레이만과 대조적으로, 압달라는 작중 내내 자신을 둘러싼 트라우마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이 독백한다. 어릴 적 아버지의 소총을 훔쳐 까치를 사냥하려다 밧줄에 묶여 우물 속으로 던져진 일, 친모 '파티마'의 석연찮은 죽음 등으로부터 그의 영혼은 많은 상처를 입었다. 아버지의 임종을 마주하고, 장례를 치른 이후까지도 해소되지 않는 가슴 속의 의문, 응어리, 울분이 독자에게 생생히 전달된다.
압달라의 1인칭 서술을 중심으로, 계속하여 주목하는 인물을 바꿔가는 서술구조가 돋보인다. 압달라를 제외한 모든 인물의 이야기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통일되어 있다. 인물A의 묘사 → 압달라의 회상 → 인물B의 결혼식 → 압달라의 독백 → 인물C의 죽음 → 압달라의 자기분열... 이런 구조로 시종 일관한다. 중반부 이후로는 각 인물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간대까지 과거와 현재를 어지러이 오가며 널뛰는데, 일견 혼란스럽지만 적응만 한다면 외려 속도감 있는 몰입을 돕는다.
난이도가 높은 이러한 작법을 통해 작가가 부각시키려던 것은 무엇일까? 추측컨대 첫째로는 선대가 지은 죄악의 업보 - 그것이 후세에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 둘째로는 뚜렷한 기승전결로 단숨에 이해되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후반부로 갈수록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모두 담으려던 탓인지 서술이 다소간 지리멸렬해지는 점은 아쉬우나, 그조차도 작가가 의도적으로 작품에 부여한 개성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만한 소지가 충분하다.
4. 여우난 곬족?
아랍권 작품 최초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에서 수상(2019년)했는데, 압둘라의 심리 추적 못지않게 여러 조연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아마도 큰 역할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동네의 유쾌한 가난뱅이 '마닌', 고압적이면서도 어딘가 희극적인 데가 있는 압둘라의 '고모' 등에 대한 개성적인 서술이 특히 인상깊다.
자세한 내용을 모두 옮기기는 어려우나, 우리 민족의 것으로 치환하자면 아마도 백석의 명시<여우난 곬족>에 드러나는 혈육과 친지에 대한 애정어린 묘사와 가장 닮아있는 듯하다 :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 얼굴에 별 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모 고모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 /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모 고모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 육십 리라고 해서 파랗게 보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모 고모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5. 사족 몇 가지
① 문학은 한 집단의 문화적 총체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문학은 작가의 모국어에 대한 은혜 갚기이다. 문학은 작가 스스로의 절박한 자기구원의 시도이다.
② 히잡/부르카의 강렬한 이미지로 대표되어 굳어진 이슬람 세계에 대한 편견 - 특히나 여성 인권에 대한 - 을 많이 깼다. 적어도 작중 인물들이 가정을 꾸리고 운영해가는 면에 있어서는 모계 사회에 가까운 모습이 자주 비쳤다. 그 어떤 천쪼가리로도, 자연스레 뻗어나오는 인간의 개성과 정열을 덮을 수는 없다.
③ 아스마의 결혼 준비 중, 온 동네 여인들이 부산스레 찾아와 수다를 떨며 '우리 땐 이랬는데'라던 장면을 읽으며 : 매 시대의 문화는 특수하나, 각자의 시대를 겪은 사람들의 회상은 보편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의 반복은 더더욱, 지극히 보편적이다.
* 이 서평은 서랍의날씨(@_fandombooks_) 출판사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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