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천재 - 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주제의식


천재란 무엇인가? 


이 책을 관류하는 물음입니다. 다만 저자는 그 해답을 제시하는 방법에 있어 피상적이고 원론적인 사유는 지양합니다. 대신, 여러 분야를 아울러 천재라 부르는 데에 무리 없이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인물 몇을 놓고 각각의 행적과 사상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조망과 분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2. 긍정적 천재와 부정적 천재


소개된 천재는 모두 여덟입니다. 루소, 푸코, 비트겐슈타인, 카프카, 소세키, 푸셰, 네차예프, 히틀러. 책의 구성과는 무관한 제 나름의 분류이기는 하나, 당대와 후대의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를 기준 삼아 이들을 이른바 긍정적 천재와 부정적 천재로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다. 


전자에 해당하는 인물은 루소, 비트겐슈타인, 카프카 등으로, 이들에게는 자신의 유례없는 재능을 인류 보편 가치 - 정치사상, 철학, 문학 등 - 의 발전을 위해 쏟아부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물론 후대인으로서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 이들이 처음부터 '난 세상의 발전을 위해 힘쓰겠다!'는 정직한 의도를 갖고 살았다고 단정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후자에 해당하는 인물은 푸셰, 네차예프, 히틀러 등으로, 이들에게는 모든 것 - 정치적 신념, 혁명 정신, 심지어는 타인의 목숨까지도 - 을 오로지 자신의 천재성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고, 도덕적으로 온당하지 못한 행위마저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행하며 폭주하는 삶을 살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물론, 저 같은 범부, 얼뜨기, 천재 호소인 따위를 지면상의 몇몇 일화만으로도 단숨에 압도해버리는 진짜배기 천재들 앞에서 이런 어쭙잖은 구분이 무슨 의미나 있겠느냐 싶지만요.


3. 천재들의 공통된 특성


그래도 이해하려는 시도는 해 봐야겠죠?


이 책을 읽으며 감지된 천재들의 특징 몇 가지가 있습니다 : 분열성, 창조성, 과단성.


(1) 분열성


대표적인 것이 루소와 푸셰의 자기모순입니다. 루소는 아동과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걸작 <에밀>을 저술했음에도, 여러 여인들로부터 낳은 다섯의 아이를 모조리 고아원으로 보내버리는 경악스러운 행동을 했습니다. 푸셰는 프랑스 대혁명 기간 내내 일신의 안위와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라면 손쉽게 정치적 입장을 뒤집으며 자코뱅파(급진 좌익)와 지롱드파(온건 좌익 내지는 우익) 사이를 오가는 쉽지 않은 결정을 여러 차례 내렸습니다. 


제 생각을 조심스레 덧붙이자면, 이는 단순한 변덕이나 비난거리보다는 그들 내부에서 평생 격렬하게 싸움을 벌인 대립적 요소들의 갈등의 소산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적어도 이들처럼 어떤 영역에서 (좋은 쪽으로건, 나쁜 쪽으로건) 특별한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에 대해서라면요.


(2) 창조성


천재들은 대부분 창조적 재능(사상이나 개념, 혹은 조직의 창안, 유례없는 걸작의 집필, 군중을 휘어잡는 연설의 향연 등)을 유감없이 분출시킨 인생의 찬란한 시기를 가졌다는 점 또한 눈에 띕니다. 과연 이러한 성취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요?


니체가 말했죠, 'One must have chaos in oneself to give birth to a dancing star.' 아마도 이 경구 그대로, 위 항목에서처럼 격렬한 내면의 갈등과 모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천재들 안에는 늘 어떤 팽팽하게 긴장된 에너지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필요로 할 때면 언제든 길어올릴 수 있는 영감의 샘을 갖는 대가로 평생을 모순된 고통 속에 살았다고 표현하면 너무 낭만적이려나요.


(3) 과단성


마지막은 치고 들어갈 순간, 인생의 crucial moment를 정확하게 알고 더도덜도 아닌 '바로 그 때'에 필요한 액션을 주저없이 취하는 그들의 타이밍 감각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성공한 사업가였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평생 풍족히 살고도 남을 만한 재산을 일순간에 모두 기부해버렸습니다. '철학이라는 산을 오르는 데에 있어 지나치게 많은 재산은 거추장스러운 짐이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모든 짐을 내려놓는다.'라면서 육체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는 길을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연이은 대입 실패 후, 중졸의 학력으로 삶의 진창을 겨우겨우 비참하게 헤매던 히틀러는 결정적 순간이 오자 정당이라 부르기조차 민망한 맥주 모임에 가까웠던 독일노동자당을 일순간에 장악하는 카리스마를 발휘하였고, 몇 년 만에 수십만의 당원을 가진 집권 정당으로 키워내는데에 성공합니다(히틀러의 경우에는 그 결단의 결과가 너무나 많은 이들에게 해악을 끼쳤지만, 여기서는 논하지 않기로 합니다).


정말이지 놀랍지 않습니까?


또다른 천재, 캐나다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전기 다큐멘터리를 보던 중 그의 친구가 다음과 같이 증언한 내용이 떠오르는군요.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8살 무렵이었다. 그러나 글렌은 이미 그때부터 자신이 무엇을 위해 태어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주는 행동을 자주 했다.'


4. 진정 위대한 사람이란


인생은 대개 권태와 비참의 순간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것에만 머무르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지요. 헤밍웨이의 말마따나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간을 고양시키는 가치, 인간을 진정 신성하고 강력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가치는 다음의 셋입니다 - 자유의 추구, 창조성의 분출, 이타심의 발현.


앞의 두 가지도 물론 중요하지만, 한 인간을 평가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그가 자신이 아닌 남(가족이나 연인 말고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정말 생판 남남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을 위해 얼마나 봉사하고 희생하며 살아갔는가, 인류 전반을 위해 얼마나 숭고하고도 서릿발처럼 세찬 의지를 품고 살아갔는가 하는 물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와 같은 삶의 과업을 치열하게 완수하신, 그래서 제 마음에 영원히 간직한 별과 같은 인물이 사실은 두 분 있습니다.


실존 인물 중에서는 수단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님이고요. 허구 인물 중에서는 개방의 방주, 구지신개 홍칠공이십니다.


두 분 모두 빛나는 재주를 타고났고, 또 그것을 갈고 닦았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요. 당대의 숱한 수재와 천재들 사이에서도 두 분의 이름이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두 분 모두 자신의 재능을 남을 위해 바치는 일에 끈질기게 매진하셨기 때문입니다. 실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이 아닐는지요.


착한 범재보다는 차라리 히틀러가 낫다는 식의 유치하고 못난 어릴 적과는 확연하게 변해가는 스스로의 생각을 느낍니다.


5. 감탄스러운 필력


이 책을 읽으며 푸셰와 히틀러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었고, 푸코와 비트겐슈타인과 루소에 대해서는 대학 시절 겉만 핥고 말았던 주요 저작들을 다시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은 인물이라도 맛깔나게 소개하는 저자의 솜씨가 탁월하기 때문이겠지요. 


오랜 기자생활로 날카롭게 벼린 저자의 필력은 그가 다루는 천재들의 삶 못지않게 번뜩이며 독해에 다채로운 입체감과 공간감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서울대에서 경제학사 학위만을 취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첫 저작부터 현대철학자 후설 등을 다루어온 이력은 실로 독특합니다.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해왔는지 무척 궁금했지만, 구글링만으로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각설, 교양인 출판사 덕에 걸출한 한국인 저술가를 한 명 알게 되어 마음이 실로 든든합니다.


6. 덧붙임


 - 다 읽고 나서 깨달은 점 하나 : 흔히 천재라 하면 떠오르는 아르키메데스, 뉴턴, 가우스, 아인슈타인 등 수학/과학의 천재는 전혀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사상, 정치, 문학 등 주로 인문 분야의 천재들만을 다루었네요.


 - 이 서평은 교양인 출판사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명섭 #광기와천재 #교양인 #출판사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서평 #천재 #광기 #생각 #독후감 #일기 #글 #독서 #책 #독서모임 #단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로잉의 왜곡 - 밑그림 없이 시작하는 드로잉 수업
김효찬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효찬 작가의 <드로잉의 왜곡>을 읽고

1. 예술과 나

저는 청소년기에 정말이지 엄청난 일들을 해냈습니다. 한번 읊어볼까요?

저는 무려 문학작품을 '분석'했습니다. 수리적 능력을 발휘하여 '각종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구요. 어디 그뿐인가요, 영어 구문을 막힘없이 술술 '독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걸국에는 사회학과 자연과학의 초급 이론마저 '이성의 인도 아래 진지하게 탐구'하는 고교시절을 보냈습니다.

예, 뭐. 쉽게 말해 그냥 흔해빠진 인문계 고등학생이었단 소립니다.

그래서일까요, 대학생활에 흥미를 잃어가던 스물한두 살 무렵 처음 피아노란 것을 쳐보며 받았던 충격은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렬했습니다.

'여기, 지금까지의 나는 전혀 알지 못했던 거대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OMR 카드에 정답을 마킹하고, 이성과 연락을 주고받고, 술을 마시고, 당구를 치고, 수학문제를 풀고, 교재를 읽고, 레포트를 써내는 것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무언가가 있다. 왜 몰랐을까. 어째서 이제야 인식했을까. 지금까지는 이런 것 없이 대체 어떻게 살아온걸까.'

음악과 미술을 위시한 인류 영혼의 궤적 -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 것도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겁니다. 초-중-고를 거치며 은근슬쩍 '예체능'이라는 싸잡아 부르기 편한 이름으로 묶였고, 수업의 횟수도, 마음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고교 입학 이후로는 지수함수적으로 급감해버린 바로 그 무엇.

각설, 그날 이후로 예술 전반을 대하는 저의 태도는 예술 자체에 대한 사랑과 동경이 7할, 젊은 예술가들을 향한 시기와 질투가 3할 정도로 유지되어 온 것 같습니다. 쇼팽과 라흐마니노프를 연습하고 연주하는 시간은 행복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리 몰두한다한들 제가 예원학교를 나오고 유수의 음대를 졸업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는 없었으니까요.

서론이 좀 길었군요.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미(美)를 향한 애끓는 동경, 그리고 특정 분야에서의 재능을 확인하거나 다듬어볼 정식의 기회를 갖지 못했던 자 특유의 집요하고 강렬한 시기, 질투, 열등감, 부러움, 부러움, 또 부러움.

2. 예상독자층과 본문의 구성

타겟은 명확합니다. 미술의 여러 기법 중에서도 드로잉에 관심을 가진 사람. 그 중 적어도 풋내기는 벗어난, 중급자에서 상급의 단계로 이행해가기 원하는 예술가들을 위한 실전 레슨서랄까요.

본문은 총 7부로 나뉘어 구성됩니다. 보통의 문외한, 혹은 드로잉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일지라도 간과하기 쉬운 '세상의 실제 모습(또는 정말 그런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인식론적 문제)과 드로잉으로 옮겨지는 모습 간의 괴리'를 집중적으로 논하고, 실제 드로잉 작업시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에 대해 저자 나름의 해법을 충실하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책이 다루는 분야의 특성 상 텍스트의 나열보다는 그림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고, 곳곳에 저자가 의도한 입체선, 시선, 소실점, 인물선 등을 명확히 표시하여 독자들을 안내하는 용도로 수록된 작품들은 더욱 많습니다.

3. 저자가 말하는 왜곡의 철학

이 책은 저자가 오랜 시간을 두고 기획, 완성한 '펜과 종이만으로 드로잉'이라는 3부작의 두 번째 책입니다. 추측컨대 첫 번째 책에서는 드로잉의 기초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있었을 거에요. 그리고 두 번째 고리인 이 책에서는 전작에서 의도한 최소한의 기본기 숙달이 이루어진 독자들을 대상으로 '왜곡'이라는 보다 심화된 주제를 놓고 저자 특유의 기법 및 그를 뒷받침하는 이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대로 저자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의 시야는 생각보다 매우 좁다.
(2) 따라서 소실점이 하나 뿐인 통상적인 그림의 구도는 우리가 보는 세상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3) 실은, 하나의 드로잉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시선이 집중되는 여러 곳이 모두 소실점이다.
(4) 그렇다면 하나의 화면에, 복수의 소실점에 기반한 복수의 구도를 어떻게 구현해낼 것인가?
(5) 실마리는 바로 '왜곡'에 있다.
(6) '드로잉의 왜곡'이란 모든 드로잉 작품에 내재된 입체선, 시선 등의 주요 선을 자유롭게 뒤틀어가며 동시에 조화시키는 기법이다.
(7) 이를 통해 보다 풍성하고 보기에 즐거운 드로잉이 가능해진다.
(8) 두려워 말고 그려나가시라. 물고기와 파리와 우리가 보는 세상이 각각 다르듯, '이렇게 그려야만 한다'고 저 높은 곳에서 명령하는 이상적인 '진짜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4. 나가며 & 덧붙임


- 독서하는 내내 나름 열중하기는 하였으되, 과연 프로 작가인 저자의 의도를 문외한인 제가 얼마나 제대로 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의문스럽고, 많이 부끄럽습니다.


- 이 책으로부터 열심히 배워 제가 그린 근사한 드로잉 습작이라도 함께 업로드했으면 좋으련만, 역량이 부족하여 그렇게 하지 못한 점이 크게 아쉽습니다.


- 이 책은 초록비책공방(@greenrainbooks)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로잉의왜곡 #초록비책공방 #김효찬 #작가 #출판사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독서 #미술 #드로잉 #그림 #서평 #독후감 #일기 #생각 #단상 #독서모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마음이 지옥 같아서
이지선 지음 / 알발리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시의 독법

부끄럽지만 용기내어 고백하자면, 저의 독서 편력은 운문보다는 산문, 그 중에서도 특히 자연과학의 고전과 중단편소설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주로 인과관계가 분명하여 구조의 파악이 쉽다는 것, 그리고 직선적인 서사로 단일한 진리의 전달 혹은 한두 가지의 문학적 효과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출발점과 도착점이 명확한 중/단거리 달리기에 빗댈 수 있겠네요.

그래서일까요, 시를 습작하거나 시집을 읽을 때면 저도 모르게 생각이 많아지고, 행동이 둔화되고, 키보드 위를 노니는 손가락이나 펜을 쥐고 지면을 누비는 손목의 율동이 눈에 띄게 느려짐을 스스로 느낍니다. 시의 작법과 독법, 둘 모두 산문의 그것과는 크게 다른 까닭이겠지요.

시의 언어는 중층적이고 함축적입니다. 툭하면 근처에 있는 것들을 요소 별로 쪼개고 뜯어 이해한 후 다시 조립하려는 근대적 정신과는 영 상성이 좋지 않아요. 오래전 보았던 '은교'라는 영화에서 늙은 시인이 공대생 출신의 문하생에게 '네놈은 처음부터 싹수가 글른 놈이었어!'라며 일갈하던 대목이 떠오르는군요. 저야 문과도, 이과도 아닌 영원한 주변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만요.

각설, 그럼에도 이따금 시집을 찾고, 시인들에게 손내밀어 이야기를 청하는 까닭은 간단합니다. 분석될 수 없는 인간성의 복잡미묘한 무언가, 더 이상은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다움의 실체에 대해 늘 궁금해하고 동경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런 말조차 너무나 시와는 거리가 먼 것이려나요.


2. 작품의 짜임새와 흐름

시집은 크게 세 부분 - 절망, 외로움, 다시 시도 - 으로 구성됩니다(제 자신의 임의적 구분이 아닌, 시인이 스스로 세워 놓은 이정표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각 챕터의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시인은 먼저(제1부) 내면의 심연으로 침잠합니다. 다음(제2부)으로는 철저히 혼자 되어 그 해저를 충분히 헤매고, 마지막(제3부) 조금씩 삶을 긍정하며 수면 위로 올라오려는 본인 영혼의 여정을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3. 시인의 마음 헤아려 보기

'내 마음이 지옥 같아서'라는 강렬한 제목이 암시하듯이, 시인의 마음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있었을 삶의 갖은 시련들로 인해 이미 쑥대밭이 된 상태였을 겁니다. 초토화된 정신으로 한 편 한 편 시를 구상하고, 고르고 고른 시어들로 뼈대에 살집을 붙이고, 시집을 기획하는 일은 분명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거에요.

문학은 자기구원의 발로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것은 고등학교 문학시간이었지만, 그 참뜻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은 거의 서른이 다 되었을 무렵인 것 같습니다. 짓누르는 삶의 무게로부터 울며 도망쳐본 적 있는 사람, 눈물젖은 빵을 먹어본 적 있는 사람, 더 이상은 울 기력도 남아있지 않을 만큼 지쳐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집에서 많은 위안을 얻어가실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다만 2022년에 등단, 첫 시집을 출간하고 작년 말(2023년 11월)에 두 번째 시집을 낸 시인에 대해서 함부로 재단하고 비평하기에는, 아직 시기가 이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진심을 다하여 시인의 왕성한 창작활동을 응원합니다.

3. 덧붙임

- 이 서평은 알발리 출판사(@bookstore_abyss)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책들을 많이 펴내주세요. 알발리 출판사와 서점 마계의 무궁한 번창을 기원합니다.

#이지선 #시 #시집 #내마음이지옥같아서 #알발리 #출판사 #서점 #마계 #서평 #독후감 #일기 #감상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햄스터 에드워드의 일기 1990~1990
미리엄 엘리아.에즈라 엘리아 지음, 박준영 옮김 / 그린비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인간다운 삶이란?

 

근대 일본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을 권함>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취직을 하면 가족의 원조로부터 독립하여 산다. 집과 가구도 장만해 결혼한다. 검약하며, 아이들을 기르고, 예측 못한 지출을 대비해 저축도 한다. 이것으로 어떻게든 평온무사하게 살 수 있다고 스스로 만족한다. 사람들도 이 모습을 보고 마치 훌륭한 일을 완수한 사람처럼 평한다...

 

...그러나 이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단지 개미와 마찬가지의 일을 했을 뿐...확실히 그는 나름대로 땀흘려 일했을 것이다...그러나 그것만으로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서 진짜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유키치는 진정 인간다운 것이란 무엇인가 묻고 있습니다. 동물로서 갖는 본능적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는 당연히 어림도 없을 겁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도시를 짓고, 문명을 이루고, 사회 속에 자리를 잡고 타인과 교류하며 살아가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종교와 철학과 예술이 존재하는지 모르지요. 삶과 죽음에 대해 사색하고, 우주의 기원과 종말에 대해 고민하고, 우리가 행하는 크고 작은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여 정신과 영혼을 고양시키는 작업이야말로 종교지도자들과 예술가들에게 맡겨진 중책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조차도 만약 완전히 무의미한 일로 판명된다면 어떨까요? 우리 삶의 여러 패턴과 종교, 예술 등 어디서도 아무런 가치를 찾을 수 없다면요? 철저한 뉴턴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인생이란 철저한 필연에 따라 처음-중간-끝이 모두 정해진 기계장치 운동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무게를 두고 살피는 모두가 작위적인 연결짓기에 불과하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2. 에드워드의 용두사미

 

저자 남매는 어릴 적 기르다 떠나보낸 한 마리 햄스터로부터 영감을 받아, 에드워드라는 이름을 가진 가상의 햄스터를 한 마리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가 남긴 수 개월 남짓의 일기(!)를 저자가 발견하여, 고민 끝에 햄스터의 복리증진 및 인간과의 공영을 위해 그 내용을 만천하에 공개한다는 설정의 서문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토록 거창한 대의명분을 내건 것치고는, 본문(에드워드의 일기)의 내용이 몹시 성기고 공허하여 당황스럽습니다. 강한 자아와 기성질서에 대한 반발심, 자신을 둘러싼 세계(햄스터 양육용 케이지)에 대한 의문과 성찰을 거듭하며 무언가 해내 보이리라다짐하는 에드워드이지만 그 끝은 늘 지리멸렬하지요. 단식투쟁은 채 15분을 넘기지 못하고, 쳇바퀴에 깔려 죽은 다른 햄스터의 죽음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가 하면, 빤히 열린 케이지의 문을 보고도 알 수 없는 소심함과 두려움에 짓눌려 떨며 다시 자신을 가두는 곳으로 돌아옵니다.

 

결국 에드워드의 삶은 그의 조막만한 체구, 안쓰러운 지능만큼이나 쓸쓸하고 초라한 무의미로 여기저기 잠식되고, 그쯤에서 작품은 별다른 안내도 없이 불친절하게 끝나 버립니다.

 

3. 작가는 무엇을 의도했을까?

 

첫째로, 기존의 삶에 대한 통렬한 반성입니다. 햄스터가 유의미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공간의 규모에 비해 인간의 세계는 훨씬 넓고 깊지만, 결국은 상대적인 차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한참을 고민해 보았지만, 저로서는 아직 에드워드의 삶과 제 삶에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어 답답합니다.

 

둘째로, 우리 모두에게 만연해 있는 인간 중심주의의 탈피를 꾀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삼겹살이나 치킨을 먹을 때마다 , 이거 저승에 갔는데 만약 염라대왕이 돼지나 닭이라면 얼마나 험한 꼴을 당할까생각해보곤 합니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능과 그로부터 유발되는 가치판단의 능력이라는 것이 반드시 영혼의 불멸성이나 범우주적인 절대적 지위의 확보를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무엇보다도, 인간더러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건 오로지 인간 뿐임을 명확히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4. 덧붙임

 

(1) 이 책을 정독하는 데는 에드워드의 금식기간보다 겨우 8분 더 긴, 정확히 23분이 걸렸습니다. 철학 전문 출판사 그린비에서, '선물하기 좋은 철학책'을 모토로 만드셨다고 해요. 의도는 충분히 납득 가능하나, 아무래도 텍스트의 밀도가 다소간 빈약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물론 인간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는 햄스터의 사유와 행동의 폭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로서 이렇게 구성된 것이라면, 감히 평하건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기획입니다.

 

(2) 이 책은 그린비 출판사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햄스터에드워드의일기 #철학 #그림책 #그린비 #출판사 ##독서 #서평 #독후감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독서모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림은 유령이 아니야 찰리의 작은 책꽂이
원유순 지음, 홍기한 그림 / 찰리북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들어가며

 

한국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등 유수의 아동문학상을 수상해온 동화작가 원유순 님의 신작입니다. 얇은 동화책이지만 (1) 난민 문제에 대한 사회 일반의 합의 (2) 문학이 인간의 정신, 특히 유소년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 (3) 작가의 의무와 책임 등 생각할 거리를 풍부하게 던져주는 까닭에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30대의 독자이고, 실제로 이 책을 읽게 될 어린이들과는 인생관, 배경지식, 판단력, 속한

연령대의 평균적인 사고방식 등 여러 면에서 크고작은 차이가 있는 사람입니다. 다만 자녀에게 이 책을 읽힐지 말지 고민하는 부모님들이 계시다면, 저의 의견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용기내어 몇 자 적습니다.

 

2. 간략한 줄거리

 

주인공은 두 명의 초등학교 3학년 남자아이입니다. 청각 장애인 아버지와 함께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가는 한국인 금비와, 고국 예멘에서 일어난 전쟁을 피해 가족들과 대한민국으로 와 난민으로 지내고 있는 아랍인 카림. 금비가 1인칭으로 작중의 모든 상황을 전달하고, 그 초점은 처음에는 낯설고 마음에 들지 않던 카림과 서서히 우정을 키워가는 과정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태권도를 배울 생각도 하지 말라는 동네 학원의 관장님이나, 길고양이 루루가 시끄럽게 울어댄다고 빗자루로 때리려하는 꽥꽥 할머니 정도가 이 작품에서 발견되는 그나마 가장 못된 사람입니다. 반면 금비와 카림을 가엾게 여기고 자신의 사비를 써가면서까지 도와주는 편의점 알바생 난희 누나와 같은 조력자 형의 인물도 등장합니다.

 

3. 주요 인물에 대한 작가의 시선, 그리고 난민 문제

 

카림과 그 가족, 그리고 그들과 비슷한 처지의 다른 난민 가족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약자를 향한 연민, 더 나아가 자연인으로서의 난민과 그들을 수용하는 일에 지금보다 호의적인 태도로 임해달라 요청하고 있지요. ‘대한민국 땅에서는 태권도 승품 심사조차 받기 어려운, 우리는 유령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야라고 씁쓸히 내뱉는 어느 난민 남성을 향해 금비가 난민도 모두 같은 사람이에요! 유령이 아니라구요!’라고 절규하는 마지막 대목이 그 절정입니다. 저도 작가 분의 관점에 동의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동족에게 측은지심을 느끼고, 그들이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모든 인간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난민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내국인에 대한 역차별 여부, 수용된 난민들의 적응을 돕는 일 등이 주된 쟁점입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주류 사회에 매끄럽게 편입되지 못한 난민들이 치안상 혼란을 일으키며 사회의 불안요소로 변할 수도 있다는 점은 매우 심각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지난 세기부터 인도주의에 입각하여 난민을 대거 받아들인 프랑스, 독일, 스웨덴 등이 오늘날 겪고 있는 상황을 그 예시로 들 수 있겠습니다.

 

나아가 이민과 외국인 인력의 수용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이미 신생아수가 급감한 우리나라로서도 피할 수 없게 되었지요. 이미 지방에서는 초등학교부터 서서히, 토종 한국인과는 다른 생김새를 가진 학생들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배경 하에 본작과 같은 책이 출판시장에 서서히 등장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네요.

 

4. 글월의 힘

 

이론과 기술 자체로서는 철저히 가치중립적인 과학/공학과 달리, 모든 글과 책은 반드시 저자의 사상을 반영합니다. 또한,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문제와 엮여들기 쉽다는 속성을 지닙니다. 특히 유소년기에는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장성하여 살아가는 데에 큰 영향을 받게 됩니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다양한 관점 하에 쓰인 여러 책을 읽으면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건강한 판단력을 갖추도록 어른들이 잘 이끌어야겠습니다.

 

5. 덧붙임

 

- 책 표지의 주 색상을 예쁜 연두색으로 선택한 것이 다소간 파격적입니다. 아마도 같은 계열의 출판물들 사이의 색감 상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편집부에서 내리신 결정이라고 생각됩니다.

 

- 이 서평은 찰리북(@charliebook_insta) 출판사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찰리북 #출판사 #카림은유령이아니야 #책스타그램 #원유순작가님 #북스타그램 #홍기한작가님 #독서 #카림도금비도 #서평 #행복한크리스마스 #독후감 #애정독자님어린이애정독자님도 #일기 #미리메리크리스마스 #문학 #동화 ##기록 #소설 #이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