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천재 - 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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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제의식


천재란 무엇인가? 


이 책을 관류하는 물음입니다. 다만 저자는 그 해답을 제시하는 방법에 있어 피상적이고 원론적인 사유는 지양합니다. 대신, 여러 분야를 아울러 천재라 부르는 데에 무리 없이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인물 몇을 놓고 각각의 행적과 사상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조망과 분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2. 긍정적 천재와 부정적 천재


소개된 천재는 모두 여덟입니다. 루소, 푸코, 비트겐슈타인, 카프카, 소세키, 푸셰, 네차예프, 히틀러. 책의 구성과는 무관한 제 나름의 분류이기는 하나, 당대와 후대의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를 기준 삼아 이들을 이른바 긍정적 천재와 부정적 천재로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다. 


전자에 해당하는 인물은 루소, 비트겐슈타인, 카프카 등으로, 이들에게는 자신의 유례없는 재능을 인류 보편 가치 - 정치사상, 철학, 문학 등 - 의 발전을 위해 쏟아부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물론 후대인으로서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 이들이 처음부터 '난 세상의 발전을 위해 힘쓰겠다!'는 정직한 의도를 갖고 살았다고 단정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후자에 해당하는 인물은 푸셰, 네차예프, 히틀러 등으로, 이들에게는 모든 것 - 정치적 신념, 혁명 정신, 심지어는 타인의 목숨까지도 - 을 오로지 자신의 천재성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고, 도덕적으로 온당하지 못한 행위마저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행하며 폭주하는 삶을 살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물론, 저 같은 범부, 얼뜨기, 천재 호소인 따위를 지면상의 몇몇 일화만으로도 단숨에 압도해버리는 진짜배기 천재들 앞에서 이런 어쭙잖은 구분이 무슨 의미나 있겠느냐 싶지만요.


3. 천재들의 공통된 특성


그래도 이해하려는 시도는 해 봐야겠죠?


이 책을 읽으며 감지된 천재들의 특징 몇 가지가 있습니다 : 분열성, 창조성, 과단성.


(1) 분열성


대표적인 것이 루소와 푸셰의 자기모순입니다. 루소는 아동과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걸작 <에밀>을 저술했음에도, 여러 여인들로부터 낳은 다섯의 아이를 모조리 고아원으로 보내버리는 경악스러운 행동을 했습니다. 푸셰는 프랑스 대혁명 기간 내내 일신의 안위와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라면 손쉽게 정치적 입장을 뒤집으며 자코뱅파(급진 좌익)와 지롱드파(온건 좌익 내지는 우익) 사이를 오가는 쉽지 않은 결정을 여러 차례 내렸습니다. 


제 생각을 조심스레 덧붙이자면, 이는 단순한 변덕이나 비난거리보다는 그들 내부에서 평생 격렬하게 싸움을 벌인 대립적 요소들의 갈등의 소산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적어도 이들처럼 어떤 영역에서 (좋은 쪽으로건, 나쁜 쪽으로건) 특별한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에 대해서라면요.


(2) 창조성


천재들은 대부분 창조적 재능(사상이나 개념, 혹은 조직의 창안, 유례없는 걸작의 집필, 군중을 휘어잡는 연설의 향연 등)을 유감없이 분출시킨 인생의 찬란한 시기를 가졌다는 점 또한 눈에 띕니다. 과연 이러한 성취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요?


니체가 말했죠, 'One must have chaos in oneself to give birth to a dancing star.' 아마도 이 경구 그대로, 위 항목에서처럼 격렬한 내면의 갈등과 모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천재들 안에는 늘 어떤 팽팽하게 긴장된 에너지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필요로 할 때면 언제든 길어올릴 수 있는 영감의 샘을 갖는 대가로 평생을 모순된 고통 속에 살았다고 표현하면 너무 낭만적이려나요.


(3) 과단성


마지막은 치고 들어갈 순간, 인생의 crucial moment를 정확하게 알고 더도덜도 아닌 '바로 그 때'에 필요한 액션을 주저없이 취하는 그들의 타이밍 감각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성공한 사업가였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평생 풍족히 살고도 남을 만한 재산을 일순간에 모두 기부해버렸습니다. '철학이라는 산을 오르는 데에 있어 지나치게 많은 재산은 거추장스러운 짐이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모든 짐을 내려놓는다.'라면서 육체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는 길을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연이은 대입 실패 후, 중졸의 학력으로 삶의 진창을 겨우겨우 비참하게 헤매던 히틀러는 결정적 순간이 오자 정당이라 부르기조차 민망한 맥주 모임에 가까웠던 독일노동자당을 일순간에 장악하는 카리스마를 발휘하였고, 몇 년 만에 수십만의 당원을 가진 집권 정당으로 키워내는데에 성공합니다(히틀러의 경우에는 그 결단의 결과가 너무나 많은 이들에게 해악을 끼쳤지만, 여기서는 논하지 않기로 합니다).


정말이지 놀랍지 않습니까?


또다른 천재, 캐나다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전기 다큐멘터리를 보던 중 그의 친구가 다음과 같이 증언한 내용이 떠오르는군요.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8살 무렵이었다. 그러나 글렌은 이미 그때부터 자신이 무엇을 위해 태어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주는 행동을 자주 했다.'


4. 진정 위대한 사람이란


인생은 대개 권태와 비참의 순간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것에만 머무르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지요. 헤밍웨이의 말마따나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간을 고양시키는 가치, 인간을 진정 신성하고 강력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가치는 다음의 셋입니다 - 자유의 추구, 창조성의 분출, 이타심의 발현.


앞의 두 가지도 물론 중요하지만, 한 인간을 평가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그가 자신이 아닌 남(가족이나 연인 말고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정말 생판 남남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을 위해 얼마나 봉사하고 희생하며 살아갔는가, 인류 전반을 위해 얼마나 숭고하고도 서릿발처럼 세찬 의지를 품고 살아갔는가 하는 물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와 같은 삶의 과업을 치열하게 완수하신, 그래서 제 마음에 영원히 간직한 별과 같은 인물이 사실은 두 분 있습니다.


실존 인물 중에서는 수단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님이고요. 허구 인물 중에서는 개방의 방주, 구지신개 홍칠공이십니다.


두 분 모두 빛나는 재주를 타고났고, 또 그것을 갈고 닦았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요. 당대의 숱한 수재와 천재들 사이에서도 두 분의 이름이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두 분 모두 자신의 재능을 남을 위해 바치는 일에 끈질기게 매진하셨기 때문입니다. 실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이 아닐는지요.


착한 범재보다는 차라리 히틀러가 낫다는 식의 유치하고 못난 어릴 적과는 확연하게 변해가는 스스로의 생각을 느낍니다.


5. 감탄스러운 필력


이 책을 읽으며 푸셰와 히틀러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었고, 푸코와 비트겐슈타인과 루소에 대해서는 대학 시절 겉만 핥고 말았던 주요 저작들을 다시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은 인물이라도 맛깔나게 소개하는 저자의 솜씨가 탁월하기 때문이겠지요. 


오랜 기자생활로 날카롭게 벼린 저자의 필력은 그가 다루는 천재들의 삶 못지않게 번뜩이며 독해에 다채로운 입체감과 공간감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서울대에서 경제학사 학위만을 취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첫 저작부터 현대철학자 후설 등을 다루어온 이력은 실로 독특합니다.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해왔는지 무척 궁금했지만, 구글링만으로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각설, 교양인 출판사 덕에 걸출한 한국인 저술가를 한 명 알게 되어 마음이 실로 든든합니다.


6. 덧붙임


 - 다 읽고 나서 깨달은 점 하나 : 흔히 천재라 하면 떠오르는 아르키메데스, 뉴턴, 가우스, 아인슈타인 등 수학/과학의 천재는 전혀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사상, 정치, 문학 등 주로 인문 분야의 천재들만을 다루었네요.


 - 이 서평은 교양인 출판사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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