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햄스터 에드워드의 일기 1990~1990
미리엄 엘리아.에즈라 엘리아 지음, 박준영 옮김 / 그린비 / 2023년 12월
평점 :
1. 인간다운 삶이란?
근대 일본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을 권함>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취직을 하면 가족의 원조로부터 독립하여 산다. 집과 가구도 장만해 결혼한다. 검약하며, 아이들을 기르고, 예측 못한 지출을 대비해 저축도 한다. 이것으로 어떻게든 평온무사하게 살 수 있다고 스스로 만족한다. 사람들도 이 모습을 보고 마치 훌륭한 일을 완수한 사람처럼 평한다...
...그러나 이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단지 개미와 마찬가지의 일을 했을 뿐...확실히 그는 나름대로 땀흘려 일했을 것이다...그러나 그것만으로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서 진짜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유키치는 진정 인간다운 것이란 무엇인가 묻고 있습니다. 동물로서 갖는 본능적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는 당연히 어림도 없을 겁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도시를 짓고, 문명을 이루고, 사회 속에 자리를 잡고 타인과 교류하며 살아가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종교와 철학과 예술이 존재하는지 모르지요. 삶과 죽음에 대해 사색하고, 우주의 기원과 종말에 대해 고민하고, 우리가 행하는 크고 작은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여 정신과 영혼을 고양시키는 작업이야말로 종교지도자들과 예술가들에게 맡겨진 중책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조차도 만약 완전히 무의미한 일로 판명된다면 어떨까요? 우리 삶의 여러 패턴과 종교, 예술 등 어디서도 아무런 가치를 찾을 수 없다면요? 철저한 뉴턴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인생이란 철저한 필연에 따라 처음-중간-끝이 모두 정해진 기계장치 운동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무게를 두고 살피는 모두가 작위적인 연결짓기에 불과하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2. 에드워드의 용두사미
저자 남매는 어릴 적 기르다 떠나보낸 한 마리 햄스터로부터 영감을 받아, 에드워드라는 이름을 가진 가상의 햄스터를 한 마리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가 남긴 수 개월 남짓의 일기(!)를 저자가 발견하여, 고민 끝에 햄스터의 복리증진 및 인간과의 공영을 위해 그 내용을 만천하에 공개한다는 설정의 서문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토록 거창한 대의명분을 내건 것치고는, 본문(에드워드의 일기)의 내용이 몹시 성기고 공허하여 당황스럽습니다. 강한 자아와 기성질서에 대한 반발심, 자신을 둘러싼 세계(햄스터 양육용 케이지)에 대한 의문과 성찰을 거듭하며 ‘무언가 해내 보이리라’ 다짐하는 에드워드이지만 그 끝은 늘 지리멸렬하지요. 단식투쟁은 채 15분을 넘기지 못하고, 쳇바퀴에 깔려 죽은 다른 햄스터의 죽음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가 하면, 빤히 열린 케이지의 문을 보고도 알 수 없는 소심함과 두려움에 짓눌려 떨며 다시 자신을 가두는 곳으로 돌아옵니다.
결국 에드워드의 삶은 그의 조막만한 체구, 안쓰러운 지능만큼이나 쓸쓸하고 초라한 무의미로 여기저기 잠식되고, 그쯤에서 작품은 별다른 안내도 없이 불친절하게 끝나 버립니다.
3. 작가는 무엇을 의도했을까?
첫째로, 기존의 삶에 대한 통렬한 반성입니다. 햄스터가 유의미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공간의 규모에 비해 인간의 세계는 훨씬 넓고 깊지만, 결국은 상대적인 차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한참을 고민해 보았지만, 저로서는 아직 에드워드의 삶과 제 삶에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어 답답합니다.
둘째로, 우리 모두에게 만연해 있는 인간 중심주의의 탈피를 꾀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삼겹살이나 치킨을 먹을 때마다 ‘야, 이거 저승에 갔는데 만약 염라대왕이 돼지나 닭이라면 얼마나 험한 꼴을 당할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능과 그로부터 유발되는 가치판단의 능력이라는 것이 반드시 영혼의 불멸성이나 범우주적인 절대적 지위의 확보를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무엇보다도, 인간더러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건 오로지 인간 뿐임을 명확히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4. 덧붙임
(1) 이 책을 정독하는 데는 에드워드의 금식기간보다 겨우 8분 더 긴, 정확히 23분이 걸렸습니다. 철학 전문 출판사 그린비에서, '선물하기 좋은 철학책'을 모토로 만드셨다고 해요. 의도는 충분히 납득 가능하나, 아무래도 텍스트의 밀도가 다소간 빈약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물론 인간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는 햄스터의 사유와 행동의 폭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로서 이렇게 구성된 것이라면, 감히 평하건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기획입니다.
(2) 이 책은 그린비 출판사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햄스터에드워드의일기 #철학 #그림책 #그린비 #출판사 #책 #독서 #서평 #독후감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독서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