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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의 왜곡 - 밑그림 없이 시작하는 드로잉 수업
김효찬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4년 1월
평점 :
김효찬 작가의 <드로잉의 왜곡>을 읽고
1. 예술과 나
저는 청소년기에 정말이지 엄청난 일들을 해냈습니다. 한번 읊어볼까요?
저는 무려 문학작품을 '분석'했습니다. 수리적 능력을 발휘하여 '각종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구요. 어디 그뿐인가요, 영어 구문을 막힘없이 술술 '독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걸국에는 사회학과 자연과학의 초급 이론마저 '이성의 인도 아래 진지하게 탐구'하는 고교시절을 보냈습니다.
예, 뭐. 쉽게 말해 그냥 흔해빠진 인문계 고등학생이었단 소립니다.
그래서일까요, 대학생활에 흥미를 잃어가던 스물한두 살 무렵 처음 피아노란 것을 쳐보며 받았던 충격은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렬했습니다.
'여기, 지금까지의 나는 전혀 알지 못했던 거대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OMR 카드에 정답을 마킹하고, 이성과 연락을 주고받고, 술을 마시고, 당구를 치고, 수학문제를 풀고, 교재를 읽고, 레포트를 써내는 것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무언가가 있다. 왜 몰랐을까. 어째서 이제야 인식했을까. 지금까지는 이런 것 없이 대체 어떻게 살아온걸까.'
음악과 미술을 위시한 인류 영혼의 궤적 -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 것도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겁니다. 초-중-고를 거치며 은근슬쩍 '예체능'이라는 싸잡아 부르기 편한 이름으로 묶였고, 수업의 횟수도, 마음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고교 입학 이후로는 지수함수적으로 급감해버린 바로 그 무엇.
각설, 그날 이후로 예술 전반을 대하는 저의 태도는 예술 자체에 대한 사랑과 동경이 7할, 젊은 예술가들을 향한 시기와 질투가 3할 정도로 유지되어 온 것 같습니다. 쇼팽과 라흐마니노프를 연습하고 연주하는 시간은 행복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리 몰두한다한들 제가 예원학교를 나오고 유수의 음대를 졸업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는 없었으니까요.
서론이 좀 길었군요.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미(美)를 향한 애끓는 동경, 그리고 특정 분야에서의 재능을 확인하거나 다듬어볼 정식의 기회를 갖지 못했던 자 특유의 집요하고 강렬한 시기, 질투, 열등감, 부러움, 부러움, 또 부러움.
2. 예상독자층과 본문의 구성
타겟은 명확합니다. 미술의 여러 기법 중에서도 드로잉에 관심을 가진 사람. 그 중 적어도 풋내기는 벗어난, 중급자에서 상급의 단계로 이행해가기 원하는 예술가들을 위한 실전 레슨서랄까요.
본문은 총 7부로 나뉘어 구성됩니다. 보통의 문외한, 혹은 드로잉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일지라도 간과하기 쉬운 '세상의 실제 모습(또는 정말 그런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인식론적 문제)과 드로잉으로 옮겨지는 모습 간의 괴리'를 집중적으로 논하고, 실제 드로잉 작업시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에 대해 저자 나름의 해법을 충실하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책이 다루는 분야의 특성 상 텍스트의 나열보다는 그림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고, 곳곳에 저자가 의도한 입체선, 시선, 소실점, 인물선 등을 명확히 표시하여 독자들을 안내하는 용도로 수록된 작품들은 더욱 많습니다.
3. 저자가 말하는 왜곡의 철학
이 책은 저자가 오랜 시간을 두고 기획, 완성한 '펜과 종이만으로 드로잉'이라는 3부작의 두 번째 책입니다. 추측컨대 첫 번째 책에서는 드로잉의 기초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있었을 거에요. 그리고 두 번째 고리인 이 책에서는 전작에서 의도한 최소한의 기본기 숙달이 이루어진 독자들을 대상으로 '왜곡'이라는 보다 심화된 주제를 놓고 저자 특유의 기법 및 그를 뒷받침하는 이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대로 저자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의 시야는 생각보다 매우 좁다.
(2) 따라서 소실점이 하나 뿐인 통상적인 그림의 구도는 우리가 보는 세상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3) 실은, 하나의 드로잉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시선이 집중되는 여러 곳이 모두 소실점이다.
(4) 그렇다면 하나의 화면에, 복수의 소실점에 기반한 복수의 구도를 어떻게 구현해낼 것인가?
(5) 실마리는 바로 '왜곡'에 있다.
(6) '드로잉의 왜곡'이란 모든 드로잉 작품에 내재된 입체선, 시선 등의 주요 선을 자유롭게 뒤틀어가며 동시에 조화시키는 기법이다.
(7) 이를 통해 보다 풍성하고 보기에 즐거운 드로잉이 가능해진다.
(8) 두려워 말고 그려나가시라. 물고기와 파리와 우리가 보는 세상이 각각 다르듯, '이렇게 그려야만 한다'고 저 높은 곳에서 명령하는 이상적인 '진짜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4. 나가며 & 덧붙임
- 독서하는 내내 나름 열중하기는 하였으되, 과연 프로 작가인 저자의 의도를 문외한인 제가 얼마나 제대로 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의문스럽고, 많이 부끄럽습니다.
- 이 책으로부터 열심히 배워 제가 그린 근사한 드로잉 습작이라도 함께 업로드했으면 좋으련만, 역량이 부족하여 그렇게 하지 못한 점이 크게 아쉽습니다.
- 이 책은 초록비책공방(@greenrainbooks)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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