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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전쟁 세트 - 전5권 ㅣ 7년전쟁
김성한 지음 / 산천재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역사를 알고 있다. 우리는 1592년 임진년 일본이 조선을 침공한 전쟁을 그러고는 나라를 지킬 병력이 없어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한 전쟁을 우리는 임진왜란이라 부른다. 내가 알고 있는 이 '난'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미쳐서, 임진년에 왜군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고맙게도(?) 명나라에선 그들의 군대를 파견해서 조선군과 같이 왜군을 퇴치했다는 것이다. 우리 조정은 어리석어서 율곡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무시하고, 류성룡은 멍청하기 그지 없어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알지 못 했고, 신립은 용맹하지 못해 모든 병력을 잃었다. 원균은 멍청해서 이순신이 힘들게 조련한 수군과 배를 모두 바라에 가라 앉혀 버린 것이고, 그런 다 망가진 수군을 가지고 일본 수군을 쳐 부순 충무 이순신은 신인 것이다. 관군은 허수아비였고, 곳곳에 뜻 있는 의병들로 인해 7년 간의 전쟁 끝에 왜구를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바로 여기가 내 사고가 멈춰진 지점이었지만, 표지에 있는 동북아 삼국의 관점이란 이야기를 보면서 사고가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입장에선 도대체 왜 이 전쟁을 일으킨 것인지, 또 명나라에선 뭐가 좋다고 우리나라에서 병사를 파견해서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준 것이었을까? 거기에 도대체 우리나라의 조정과 관군은 뭘 하고 있었길래 그냥 짓밟고 지나가듯 한 속도로 서울을 내줄 수 밖에 없는 것이었을까에 대한 의문증과 일본과 명나라에선 어떤 관점으로 이 전쟁을 보고 있을까 등. 이 작품은 그런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도 남는 소설이다.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일본의 사료까지 검토하여 이야기를 재구성한 작품인 것이다.
8월의 무더운 여름 휴가기간을 기회로 <7년 전쟁>과의 만남을 시작했고, 읽는 내내 때로는 답답하고 화가 나고, 통쾌함에 신이 나서 책을 넘기기도 하고, 안타까움과 전쟁의 처절함에 치를 떨기도 하는 복잡한 심정이 왔다갔다 하며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 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거대한 산을 넘어 온 기분, 그러고 나서 다시 더 높은 산을 만난 기분이다. 작품을 읽으며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던 내 심정을 글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데, 무언가 거대한 벽이 날 가로 막은 느낌인 것이다. 장문의 글을 썼다 지우는 걸 반복하다 보니, 멋있는 말을 자꾸 만들어 내려 나도 모르게(?) 글에 힘이 들어갔던 게 아닐까 싶다. 다시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시작해 보려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시점, 조선을 쳐들어 간다는 소문이 만연하여 쓰시마(대마도)에서는 전쟁을 막아 보기 위한 사전 작업이 처절한 시점에서 책은 시작한다. 조선에 사신도 보내고, 조선과 히데요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수많은 계책에 갖은 노력을 다 한다. 그렇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전쟁의 암운이라니. 당연히 역사에 의해 전쟁이 진행될 걸 알면서도 어쩐지 일이 잘 되어 안 하고 넘어갈 것 같은 기분과 여지 없이 무너지는 기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직접 와서 쳐 들어 오겠다고 하는데도, 믿지 않는 관료들이었는데,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나라에 필리핀과 같은 동남아에서 한 관료가 와서 우리나라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싶은데,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깡그리 무시했던 게 조금은 이해가 될 것도 같다.
결국 전쟁을 막는 것에 모두 실패하고 안타깝게도 결국엔 1592년 임진년에 전쟁이 시작 됐다. '전쟁'이란 말에서 우리는 장수나 모사와 같은 영웅들을 기억하며 그들이 펼치는 '전술'과 '무예'의 아름다움을 보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이 작품이 묘사하는 참혹한 '전쟁'을 보고 있으면 유비, 관우, 장비가 활약하는 삼국지(삼국연의)에서의 전투는 무협/판타지에 가깝다. 이 작품 속의 전쟁에선 신묘한 계책으로 적의 길목을 들이쳐 5천의 병사가 10만의 군사를 당해내는 일이나, 적장과 100여 합을 싸우고도 부족하여 힘이 넘치는 장수나 날아오는 화살을 장난처럼 가볍게 창으로 쳐내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냥 참혹함과 사실의 묘사 그게 전부다. 얇은 옷을 입고 타국에서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병사가 6개월이 지나면 쌀쌀한 날씨에 고생하는 게 당연하고, 기후에 변화가 생겨 비가 내리면 비를 피해 쉴 곳을 찾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병사들도 당연히 밥을 먹어야 하고, 밥은 단지 쌀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밥을 지어야 한다. 밥을 짓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고, 당연히 솥도 필요하다. 시간이 없으면 당연히 생쌀을 씹어 먹을 수 밖에 없고, 무거운 솥과 조리기구는 누군가는 날라야 하는 것이다.
삼국지에선 아무리 강력한 적이 들어와도 유능한 장수와 성내 병사가 하나 돼서 굳게 지키면 쉽게 무너지지 않던 성들도 이 작품에선 그렇지 않다. 상대방에게 포위를 당하면 보급이 끊기기 때문에 자살행위이고 겹겹이 둘러 싸고 1, 2, 3진이 돌아가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격해 오는 적을 교대 같은 건 생각하지 못하고 무찔러야 하는 병사들은 당연히 피로할 수밖에 없고, 이런 병사들이라면 도망가는 길을 찾는 것이 당연하다. 아무리 병사들의 사기가 높고 뛰어난 지휘관이 붙어 있더라도 상대방의 수적 우세에는 도무지 당할 수가 없다. 거기에 무기도 계속 써서 닳고, 식량까지 줄어든다면 답이 없다. 정말로 목숨을 내 놓고 싸우다가 쓸쓸히 쓰러질 뿐.
의병이란 존재도 뜻이 좋아 의병이지 사실은 동네 청년, 아저씨, 노인들이 무기로는 써 보지도 않은 도구들을 가지고 모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이 쓰는 무기에 통일성이 있을리 만무하고, 체력도 천차만별이다. 거기에 적을 맞아 싸우다 보면 당연히 무기가 고장나고 떨어질텐데, 뒤에서 누군가 보급을 해 준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이러니 이게 도무지 전투가 되는가 싶다. 또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 황폐함이란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전리품으로 모든 걸 쓸어 가고, 툭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죽이고 그들이 가진 작은 것조차 빼앗아 버리는 것이 전쟁이다. 거기에 남아 있는 건물들은 모조리 불을 태워 버리고, 있는 식량들은 쓸어가 버리지 간신히 살아 남은 백성들의 살길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도무지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이라니..
거점도 가지지 못한 상대방이 다른 나라에 와서 전쟁을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도 빨리 제압을 당할 수 있는 것인지 보면서 참 한심스럽기도 하고, 도무지 결단은 내리지 못하고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는 왕을 보면서는 어째 이런 사람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지 부끄럽고, 한숨만 나오는 눈쌀을 찌푸리게 되는 답답한 상황에서 나의 숨통을 트이게 만드는 사건이 등장하는데 이순신과 조선수군 그리고 각지에서 추앙받는 선비들이 의병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허술한 임금과 당파싸움에 눈이 먼 벼슬아치들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오직 조국과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사람들을 보면서는 자꾸만 뭉클함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순신 장군의 순도 100% 옥포해전에선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쾌함에, 함대와 수군을 거의 전부 잃고 적의 대함대와 마주하여 대승을 거두는 명량해전에서 가슴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리.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충성을 다하고 갑작스런 내부의 배신에 뒤통수를 맞거나, 용감히 싸우다 적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람들, 중과부적의 적에게 돌진하여 한 명의 적이라도 더 죽이고 죽겠다는 일념의 멋진 영웅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홍의장군 곽재우를 필두로, 김천일, 정인홍, 김시민, 조헌, 고경명 등. 부디 멋지게 승리하길 바라는 마음에 읽다가도 갑자기 허무하게 쓰러지는 그들의 모습에서 괜히 작가를 원망하게 되는 건 참….
명나라의 등장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는데 화평을 위해 엄청나게 뛰어 다니는 명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있다. 화평을 논의하기 위해 전권을 위임받고 사자로 파송되는 심유경은 모두가 가서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시점에 출세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며 나선 인물이었다. 엄청난 거짓말을 일삼고 이쪽 저쪽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그는 여기저기서 비판도 많이 받게 되는데, 결국 다시 결론이 '믿을 사람은 심유경'이라는 걸 나오는 걸 보면 어쩌면 대안 없는 우리사회의 모습과도 상당히 닮아 있지 않나 싶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알았던 삼국지의 유명 모사들은 정도의 경중만 있을 뿐 대략 이 정도의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융중의 시골에서 글 읽던 제갈량 같은 사람이 어찌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리라는 예측을 귀신처럼 할 수 있었겠는가. 아무튼 출세를 노리는 이런 심유경의 노력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지켜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임진왜란이란 제목보다 '7년 전쟁'이라는 제목을 쓰며 당시 삼국의 실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려 했던 김성한 작가는 인물의 묘사에서도 그들의 업적이나 실수와 같은 단편적 모습을 통해, 위인으로서 혹은 역사의 죄인으로 결론 내지 않고, 이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역사를 통해 어렴풋이 알고 있는 류성룡, 김성일의 절대 전쟁은 없다라는 선언도 전쟁을 막으려 뛰어 다니는 대마도 사람들과 일본 조정의 대신들을 보며 내린 최선의 결론이었고, 전쟁을 위한 노역에 끌려 다니는 국민들을 측은히 생각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는 거의 목숨을 내 놓고 실책을 만회하려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원균이 몰살시킨 칠천량 해전의 경우는 무리한 조정의 요구에 될대로 되라는 식의 반응이 문제였던 것는데, 이전 이순신 장군과 해전에서 같이 공을 세우는 모습을 보면 무관으로서는 나름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유와 배경이 있었다고 그들의 엄청난 오판과 실책이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류성룡-김성일 병신, 원균 XXX'는 없앨 수 있지 않을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고, 얼마나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어야 했으며, 얼마나 많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야 했는지… 작가는 다른 과거의 실수를 했던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역사적 당위성을 부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삼국의 왕들에 대해서는 가장 날카로운 평가의 칼날을 들이민다. 책의 머리에 있는 '무능한 통치자는 만참으로도 부족한 역사의 범죄자다'란 글귀를 보며 무능한 선조를 향한 말로만 생각했지만, 다 읽고 나서는 삼국의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의 피를 보게 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백성을 내팽겨치고 도망가기 바빴던 조선의 선조, 여색에만 관심이 있고 국정과 전쟁에 관심 없어 결국 명나라를 멸망에 이르게한 세 명의 지도자 모두를 향한 말이라는 느낌이었다. (어이가 없는 건 세 왕 모두 다른 말은 안 들어도 애첩의 말에는 쩔쩔맨다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사과를 받겠다는 마음에 전쟁을 일으키는 히데요시와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사과를 못해 재침을 받게 만든 선조를 보면서는 국가를 책임지는 그들도 결국은 그 알량한 명분과 체면으로 살아간다는 생각에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그들에게 국사란 건 백성의 삶이란 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싶다.
역사에는 수많은 복선과 신호, 단서들이 존재하고 임진왜란이 일어 날 당시에도 전쟁을 가리키는 전쟁을 향한 신호, 복선, 단서들이 쌓이고 있었다. 애써 무시하고 상대방를 깔 보며 안심하고 있던 것이 참혹한 결과라는 필연적인 결론으로 귀결이 되었던 것이다. 역사의 이런 모습이 어찌 보면 추리문학과 닮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대부분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로 역사의 결론을 위한 단서들은 쌓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참혹했던 기억하기 싫은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나 또한 그래서 이런 책을 읽으며 그들을 보며 함께 울고 웃었던 것이겠지.
삼국지나 로마인 이야기 같은 책을 무시하고 싶은 맘 추호도 없고, 남의 역사에 관한 책만 읽고 대한민국의 역사에 관한 책은 읽지 않았던 사람들에 유감은 없지만, 만약 그러한 누군가가 왜 우리나라에는 삼국지나 로마인 이야기 같은 재미있는 책이 없느냐는 불평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이 책 '7년 전쟁'을 읽고 나서 하라고 전하고 싶다. 더 많은 사람이 이 작품을 접하고 이 작품의 진가를 알 수 있기를 바라고, 작품을 소개해 준 분께 큰 감사를 드리며, 다시 출판해 준 출판사에 건승이 있기를.
p.s. 역시 해외에 나갈 때는 그 나라 언어의 기본 회화 정도는 익혀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얻게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