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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장선하 옮김 / 책만드는집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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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서둘러 인터넷 창을 켜고 '티뷰론'을 검색했다. 단순히 노인이 잡은 물고기가 정말 상어였는지, 입이 뾰족한 상어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사실 상어일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고 돌고래 종류가 아닐까하는 추측은 하고 있었는데 참 의외였다.

 

 전성기가 지난 노인이 혼자 배를 이끌며 잡으려 했던 것은 단순히 큰 물고기였다. 하지만 노인이 낚은 것은 더 이상 일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물고기를 잡고도 지킬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었다. 노인은 바다를 '여자'처럼 소중히 대했지만, 그 여인은 끝내 노년이 된 한 남자에게 마지막 운을 주지는 않았다. 그는 바다를 여자로 생각함과 동시에, 그 여자를 두려워 하기도 했던 것 같다. 혼자 있으면서도 끝없이 혼잣말을 통해 그 두려움을 이겨내려 했던게 아닐까. 바다 위에 자신의 나약한 운명을 내놓은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고. 그래서인지 힘들 때 마다 늘 곁에서 돕던 소년을 그리워하던 모습은 더욱 안타깝게 보여질 수밖에 없었다. 무력한 노인과 외로운 노인이 하나로 겹쳐 보였기 때문에.

 

 노인은 대략 물고기를 잡는데 2-3일을 바쳤고, 그 물고기를 잃는데 다시 2-3일을 바쳤다. 애써잡은 그 큰 물고기는 잡은 보람도 없이 사라졌는데 사실 진짜 사라진 것은 어부로서의 노인의 자존심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놀라웠던 것은 어찌되었든 그 큰 물고기를 잡아보기는 했고 상어들 또한 많이 죽였다는 것이다. 노인으로서 그 정도의 성과라면 그래도 박수 받을 만한 일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용기와 노련미가 깃든 정신력의 승리였기 때문에.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노인은 분명 상어를 잡았지만, 본인은 그 물고기가 상어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만약 상어라는 것을 알았다면 도중에 그냥 포기하고 배를 돌렸을지도 모른다. 모르는게 약이라는 말이 쌩뚱맞게, 새삼 떠오른다.

 

 개인적으로 노인이 물고기에게 사과하는 장면은 아직도 여운이 남는다. 애써 잡은 물고기가 상어 밥이 되자 노인은 본인의 삶은 탓하지 않고 단지 물고기에게 사과만할 뿐이었다. 연륜만큼 미안함도 많이 느낄줄 아는 노인이었다. 왜 이렇게 이 부분이 가슴에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평소에 책을 많이 읽으려 노력하지만, 정작 이 유명한 작품을 이제껏 읽어보지 못했다는 점은 크게 반성할 일이다.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다면 반드시, 지금당장 노인과 바다를 사서(빌려서) 읽어보길 바란다.

 

#되도록 사서 보기를.. 값이 저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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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다리 포목점 - 오기가미 나오코 소설집
오기가미 나오코 지음, 민경욱 옮김 / 푸른숲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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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다리 포목점

 

 두 편의 짧은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소설집이지만 장편소설만큼이나 긴 여운을 남겼다. 다른 소설집과 달리 '히다리 포목점'은 제목 그대로 '히다리 포목점'이 두 작품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마치 두 단편이 하나의 장편소설로 느껴지게끔.

 

 「모리오」의 男 '모리오', 「에우와 사장」의 男 '에우'는 묘하게 공통된 모습이 있다. '무기력함'과 '여성다움'. 남자로서 기대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먼 단어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지니고 있다한들 우리가 잔소리할 수 는 없다. 개인의 자유의지이며, 엄연한 성격이자 특징일 뿐이다. 본인들이 좋다면 오히려 긍정적으로 봐줘야 하지 않을까. 나는 시종일관 그들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모리오가 치마를 입을 때, 가슴속에서 살짝 불편함을 느꼈다. 같은 남자로서 치마를 입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의 일인데도, 그저 작품 속 허구의 남자의 행동인데도 왠지 모르게 거부반응이 들었다. 보편적으로 내가 지니고 있는 '남자는 치마를 입지 않는다'라는 흔한 편견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편견은 쉽게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에우'가 참 부러웠다. 고양이를 잘 다뤄서? 귀가 비대칭인 아름다운 그녀와 함께 살기 때문에? 아니다, 나는 그저 고양이와의 '소통'능력이 부러웠다. 누군가와 소통한다는 것은 엄청난 행복이자 축복이니까. 소통의 대상이 무엇이든 '소통'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두 존재는 마음을 공유하고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남녀노소, 어느 분야이든 '소통'을 강조하는 이유는 다 같을 것이다. 참 별 것 아닌 것 같은데도 '소통'이라는 말은 항상 듣게 되면 한번 더 머릿속으로 되새기게 된다.

 

 모리오와 에우, 두 인물은 안개 속에 거쳐있던 그들의 고민을 '히다리 포목점'에서 풀어낸다. 그저 운명이 이끄는대로 발을 옮긴 그들은 '히다리 포목점'이라는 인생의 전환점을 무사히 통과한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보이지만, 마음은 좀 더 편안해진다. 뭉쳐있던 실타래가 풀어졌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도 과연 '히다리 포목점'이 나타나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말 간절히 나타나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가끔 너무나 내 자신이 무기력하다는 생각이 들 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큰 행운을 바라거나, 뜻하지 않은 길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무신론자 임에도 절망적인 순간에 '아멘'을 외치는 것처럼.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히다리 포목점'은 정말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열어주었다. 그 절대적인 기회의 기준은 포목점 고양이 '사부로'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이고.

 

 어느날 갑자기, 친절한 '사부로'씨가 딱 한번 쯤 나타나준다면 놓치지 않고 '히다리 포목점'으로 향할 것이다. 그것이 터무니없는 기대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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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의 연인들
김대성 지음 / 문화구창작동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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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의 연인들-김대성

 

"운명은 그들의 행복을 시기했다. 신은 그들의 행복을 용납하지 않았다." (450P)

 순박하던 장우도, 여린 소년이었던 광수에게도, 운명은 그들의 행복을 시기했고 신은 그들의 행복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악마가 되었다. 악이 심장을 점령하고 온몸을 뒤 덮었다. 악귀가 된 것이다.

 

 추리소설도 아니고, 공포소설도 아닌 이 평범한 소설을 내가 허겁지겁 읽어버린 이유는, 단순히 '장우'라는 인물을 죽이고 싶어서였다. 이 글을 읽는 어느 독자이든, 인간의 악함을 증오했을 것이고, 이 이야기에서 '악'을 상징하는 장우가 진심으로 죽기를 바랐을 것이다. 나는 그가 죽기만을 고대하며 글을 읽어나갔다. 못된 짓을 일삼는 악마의 모습이 보기 싫어 책을 덮고 싶었지만, 그가 죽는 모습만큼은 꼭 보고 싶은 오기 때문에 결코 책을 덮지 않았다. 하지만 끝내 내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낙원에서 오래오래 사랑을 나누었으면 좋았을 사람들은 왜 끝내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을까. 착한 사람들이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기 사랑을 지키지 못했다는 무력감, 외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유 때문에 꼭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악인이 되어야 했을까. 나는 그것이 너무 싫었다. 작가는 왜 남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최악의 악인을 만들어낸 것일까.

 

 암컷을 잃은 고래, 광수, 장우는 큰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사랑하는 존재를 잃었다. 얼핏 보면 평등해 보이는 관계인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고래와 광수, 장우의 평등한 삼각관계가 아닌 장우를 축으로 한 일방적인 삼각관계를 이루고 있다. 암컷을 잃은 고래와 광수는 장우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이 셋의 관계에 있어서 모태 악인은 장우인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의 죽음을 간절히 바랐을 것이고.

 

 이 이야기는 악인의 악행을 세세히 묘사한다. 심장이 격하게 뛸 정도로 가슴 아픈 장면들을. 하지만 이야기는 점점 뒤로 갈수록 그들을 이해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이해의 원천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고래, 광수, 장우 이 셋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 그 자체를 누리고, 염원했다. 그 사랑을 지키고자 했다. 정말 애절하다 싶을 만큼. 하지만 그 사랑 때문에 인생 또한 망가지고 말았다. 정말 애석하다 싶을 만큼. 도대체 무슨 사랑이었길래 그들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는지 자세한 이유는 묻지 말았으면 좋겠다. 직접 읽어보시길.

 

 어찌됬든, 운명은 그들을 시기했고, 결코 행복하게 하지 않았다. 이 책의 제목이 '낙원의 연인들'이라 그 내용이 더욱 안타깝게 와 닿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순수한 사랑 그 자체의 소중함'을 더욱 간절히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사랑을 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반대로 '순수한 사랑'을 직접 몸소 느껴보고 싶을 것이다.

 

 이 이야기 속의 사랑은 안타깝고 매우 비극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사랑에 대한 값진 의미를 되새기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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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의 온도 - 조진국 산문집
조진국 지음 / 해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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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움의 온도-조진국
 

 '외로움의 온도'가 실재로 측정이 가능하다면, 내 외로움 온도 지수는 몇이나 될 것인가?

 

 조진국이 말하는 외로움의 온도는, 아마 '사랑'을 통해 측정이 가능할 것이다. 사랑이란 채워도 채워도 항상 아쉽고 부족한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는데 그 채워지는 빈도수가 많든 적든, 결국 누구나 외로움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본래 항상 외로움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받고 있든, 사랑을 주고 있든, 사랑을 하는 사람은 그 시공 속에서 항상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점은 이 저서에서도 충분히 언급되고 있는 점이다. 만약, 정말로 외로움의 온도가 '사랑'을 통해 측정된다면 나의 외로움의 온도는 몇 도일 것인가. 아마도 높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점, 그리고 이로 인해 외로움의 온도를 몸소 느낄 줄 아는 중년청춘이 너무 부러웠다. 무엇보다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라던 '청춘'을 사랑으로서 묘사했던 점은 읽는 이로 하여금 큰 감흥을 얻게 하였다.

 

 나에게 '청춘'은 외롭지는 않지만 무언가 아쉬움을 남게 하는 것이 아닐까싶다. 지금 현재 내 모습은 대부분의 청춘이 그러하듯 어정쩡한 젊음 그 자체이니까.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으며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감동받은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외로움의 온도 지수는 몇이나 나올까? 설마 밑바닥을 치진 않겠지?

 

 저자는 이런 말을 했다. 결국 사랑을 정하는 것은 받는 사람의 몫이라고. 그래서 주는 사람이 더 어려운 것이 사랑이라고. 어미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이, 일편단심 짝사랑이 일반적인 소소한 사랑에 비해 더욱 간절하고 애잔하듯 저자는 사랑에 대한 솔직함을 그만의 필체, 느낌으로 서술하고 있다. 나는 그의 솔직함이 가장 좋았다. 그를 차버린 여자에게 잘 살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자신 다음으로 행복 하라는 그의 말은 쿨하지만 결코 100% 쿨하지는 않는 현대의 수많은 남성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평소에 산문집을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 저서처럼 사랑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구구절절 솔직하게 그 심경을 읊조리는 산문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특히나 시도 아니고 노래를 통해 자신의 심정을 어필하다니. 이 사람은 문학과 음악을 모두 아우르는 현대판 음유시인임에 틀림없다.

 

 이 저서의 느낌을 그냥 단순히 표현하자면, 냉탕온탕이라고 묘사하고 싶다. "뱀이다~"라는 노래가 나올 때는 재미있게 웃다가도, (KFC, KTF 때도 마찬가지였다) 담배피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담배를 끊고' 살아간다는(남자로서 자존심 꾀나 상하는) 부분에서는 괜스레 마음이 짠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볼 때, 청춘들의 영원한 소울메이트 조진국 산문집의 '냉탕'은 날 싫어하는 선배의 눈빛만큼 차갑고, '온탕은' 사랑하는 여자를 바라보는 내 눈빛만큼 뜨거운 것이다.

 

 이처럼 온탕과 냉탕을 적절히 오가는 듯한 느낌을 선사하는 것이 '조진국'표 산문집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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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맷하시겠습니까? - 꿈꿀 수 없는 사회에 대한 여덟 가지 이야기
김미월.김사과.김애란.손아람.손홍규.염승숙.조해진.최진영 지음, 민족문학연구소 기획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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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맷하시겠습니까?

 

 8명의 작가가 단편소설로 합세한 '포맷하시겠습니까?'라는 책은 세련된 겉표지처럼 내용 또한 즐거움과 참신함을 제공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들이 많이 있었고, 특히나 그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신선한 문학의 바람을 몰고 오는, 영향력 있는 젊은 작가들이었다는 것이 무척 좋았다.

 

 이 소설집(포맷하시겠습니까?) 속 김애란 작가의 작품은 그녀의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과는 사뭇 다른 한 여인의 하루 일대기를 담은 소설이었다. 마치 한편의 단편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의 이 소설은 네일아트를 통해 신세대 여성들의 허위의식을 비판하는 듯 했고 부케나 캐리어가방 또한 이를 대변하는 사물로서 활용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김애란 작가의 소설과는 달리 조해진 작가의 소설에서는, 그녀의 이전 작 '로기완을 만났다'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상상 속의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이보나'를 마치 뒤에서 따라가며 묘사하는 듯한 이야기 전개가 '로기완을 만났다'와 비슷한 느낌이 들게 했다.

 김미월 작가의 작품 또한 그녀의 이전 작 '여덟 번째 방'과 비슷하게 방을 옮겨야 하는 인물의 심리가 이야기의 주요 내용이다. '꿈꿀 수 없는 사회'가 젊은 작가들의 필체로 묘사되는 이 소설집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많이들 겪는 주제를 선정한 작품이 이 '질문들'(김미월)이 아닐까 싶다.

 

 일단 이 책은 소설 하나하나가 매우 재미있다. 단순히 표현하자면 그렇다. 특히나 한 작가의 소설집과 달리 다른 작가들의 작품 여러 개가 모여 소설집을 이룬 점은, 한 작가에 편중되는 기존의 소설집과는 다른 이점을 제공한다(한 소설에 지루함을 느끼더라도 다른 작품에서는 얼마든지 흥미를 느낄 수 있게 때문에). 특히나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살짝살짝 접해본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소설을 폭넓게 접한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본 작품이라면 '문학의 새로운 세대'를 꼽을 수 있는데. 한국문학계의 세대교체를 다룬 내용일 것이라 짐작했으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문학계의 두 주류가 기 싸움을 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이 작품을 지루함 없이 읽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중간 중간 각주를 통해 사실여부가 드러나기 때문에 '어? 진짜 이런 일들이 있었나보네'하는 호기심을 일으켰고, 흥미진진한 대결구도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야기가 끝나는 부분에서, '정말 이겼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정의 물음은 아직까지도 여운으로 남아있다(승자도 패자도 없이, 그저 기존에 존재하던, 세대교체의 흐름에 놓여있는 문학인의 자존심을 지키려던 정의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짐).

 

 '포맷하시겠습니까?' 이 제목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포맷을 한다는 것은 '리셋', 처음으로 되돌린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일까. 무엇을 포맷한다는 것일까. 복잡한 개개인의 머릿속을 포맷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이 혼란스러운 현실 자체를 싸그리 다 포맷해야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이 소설집의 단편작들에서 나오는 것처럼 복잡한 현대인의 심리, 꿈꾸기 힘든 현실성 없는 사회, 알 수없는 몽상 같은 일상들이 복합적으로 작용되는 이 이야기들 중에서 본인이 원하는 대로, 포맷을 하든 지지고 볶든 하라는 뜻은 아닐까. 분명한 뜻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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