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엄마 찬양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악을 왕의 망토처럼 차분하게 두르고 다녀야 한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감지하지 못하는 체하는 후광처럼. 대기의 투명한 진흙 속에서도 흐려지지 않는 윤곽은 타락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형식에 관한 최고의 악이다" 세자르 모로, <죽도록 사랑하기>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 <새엄마 찬양>의 초입에 등장하는 인용으로 이는 소설 전체가 지향하는 미학적·철학적 역설을 완벽하게 집약하고 있는 듯하다. 이 문장은 유약하고 성찰 없는 도덕성이 세속의 탁함 속에서 맥없이 형체를 잃어버리는 것과 대조적으로, 자신의 금기와 욕망을 직시하고 넘어선 타락과 완벽하게 다듬어진 예술적 형식이 얼마나 압도적이고 치명적인 존재감을 갖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요사는 이 작품에서 도덕적 선악의 기준을 철저히 탈색시킨 채, 관능의 세계를 서양 미술사의 명화들과 정교하게 엇물려놓으며 하나의 완벽한 미학적 성채를 구축해낸다. 브론치노의 <비너스, 쿠피도, 어리석음과 시간의 알레고리>나 프랑수아 부셰, 프랜시스 베이컨 등의 그림은 단순히 인물들이 감상하는 배경 장식에 그치지 않고 인물들의 욕망을 투영하고 행동을 유발하며, 도덕적으로 단죄받아야 할 금기된 행위들을 완벽한 artistic form으로 변주하는 핵심적인 텍스트로 기능한다. 의붓아들 알폰소와 새엄마 루크레시아 부인, 그리고 아버지 돈 리고베르토 사이에서 벌어지는 유혹과 파국은 표면적으로는 세속적인 불륜과 금기의 파기를 다루는 듯하지만, 서사를 이끄는 동력은 도덕적 죄의식이 아니라 미적 완전성에 대한 탐닉이다. 천사처럼 무구한 얼굴과 은밀한 악마성을 동시에 체현한 어린 알폰소는 브론치노의 그림 속 쿠피도처럼 어른들의 욕망과 관계를 조용히 조종하며, 정교하게 연출된 판 안에서 도덕적 우위를 점하던 성인 인물들은 유혹과 관능 앞에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 그리하여 소설은 관능과 아름다움이야말로 세속의 단단하고 편협한 도덕적 질서를 비웃듯 집어삼키는 '최고의 악'이자 가장 강력한 권력임을 증명하는 탐미주의의 승리로 마침표를 찍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소설의 화려한 미학적 성취 뒤에 숨은 서늘한 질문, 즉 탐미주의적 승리의 대가를 치르는 척결 대상이 왜 오직 여성인 루크레시아여야만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알폰소는 도덕을 초월한 신화적·자연적 악으로서 미학적 완벽함을 얻고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으며, 돈 리고베르토 역시 밤마다 명화를 통해 관능적 환상을 구축하는 남성적 시선의 주체로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지만, 관능을 실현한 루크레시아는 가부장적 질서를 위협한 단 한 명의 죄인으로 낙인찍혀 집안으로부터 철저히 축출당한다. 이러한 결말은 남성의 관능과 에로틱한 상상력은 고결한 예술적 유희나 미학적 탐구로 포장되는 반면, 그 유혹의 프레임 안에서 반응한 여성의 관능은 가정을 파괴하고 윤리를 더럽힌 오물로 취급받아 모든 도덕적 부채와 사회적 형벌을 혼자 뒤집어쓰게 되는 지독한 성별 불균형과 가부장적 이중잣대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이러한 척결의 편향성은 비단 <새엄마 찬양> 한 작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요사의 작품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여성관과 페미니즘적 비판 시각과 깊이 맞닿아 있는 듯하다. 그의 문학은 남미 사회의 폭력성과 독재, 마초주의의 야만성을 파헤친 뛰어난 서사적 기교로 찬사를 받아왔으나, 그 서사를 구성하는 여성 인물의 재현 방식에 있어서는 지속적으로 가부장적 남성 중심 시선의 한계를 드러낸다. 첫째로 요사의 작품에서 여성은 독립적인 내면과 주체성을 지닌 존재라기보다 남성 주인공의 성적 환상과 관능적 욕망을 투영하는 대상이나 미학적 관찰의 객체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여성의 육체는 아름답게 찬미되지만, 그 찬미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프레임을 틀어쥐고 시선의 정치를 행하는 남성들이며, 여성은 그 남성적 환상이 작동하기 위해 배치된 미학적 도구에 가까운 위치를 점한다. 둘째로 요사가 정치적·사회적 폭력을 고발하는 정통 소설들에서도 여성 인물들은 가부장적 권력과 마초적 폭력의 최전선에 노출된 희생자로 그려진다. 이러한 묘사는 독재와 남성 권력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강력한 장치로 작동함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늘 지배당하고 짓밟히며 수동적으로 수난을 겪는 무력한 피해자의 틀 안에 고착시킨다는 페미니즘적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셋째로 요사의 서사는 여성을 조형할 때 가부장제가 오랜 세월 구축해온 이분법적 프레임을 유의미하게 해체하지 못한다. 결국 요사는 19세기 탐미주의 문학이 지녔던 여성을 팜프 파탈이자 관능의 객체로 위치시키던 고전적 한계를 20세기 남미라는 공간으로 가져와 재현하였으며,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관능의 유희는 남성 인물들이 나누고 그로 인한 도덕적 단죄와 파국의 비극은 여성에게 떠넘기는 가부장적 서사 구조를 완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엄마 찬양>이 선사하는 미학적 충격과 서사적 긴장감은 여전히 강력한데, 이는 역설적으로 요사가 구축한 이 화려하고 서늘한 탐미주의적 성채가 도덕의 무기력함을 증명함과 동시에, 그 성채의 가파른 계단이 어떤 여성의 희생과 축출을 딛고 세워졌는가를 눈부시게 비춰주기 때문이다. 도덕을 초월한 완벽한 미적 형태가 주는 매혹에 압도당하는 동시에, 그 완벽함의 뒤편에서 작동하는 가부장적 권력의 서늘한 계산법을 읽어냄으로써 비로소 텍스트의 미학적 성취와 정서적·사회적 한계를 입체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여튼 분량이 적어서 후루룩 넘어가면서도 이래 저래 좀 힘들었던, 이전에 웃겨서 웃느라 웃으며 읽었던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역시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소설이었다. 이 찝찝함을 가부장적 역사 서사를 여성의 시선으로 재구성하는 라틴아메리카 여성 작가들의 작품들로 좀 잠재워야겠...추천 받아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는 라틴아메리카 현대문학이 다다를 수 있는 미학적 완성도, 거친 현실을 아름다움으로 변주하는 독보적인 문장의 힘, 그리고 관료주의를 통쾌하게 꼬집는 블랙코미디의 정수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표면적으로는 읽는 내내 배를 잡게 만드는 코믹함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웃음의 장막 아래에는 권력의 위선과 국가 시스템의 기형성을 정확히 겨냥한 예리한 정치적 함의가 촘촘히 엮여 있다. 서사는 아마존 오지 주둔 페루 군대 내의 통제 불가능한 성적 욕구와 민간인 마찰, 군기 확립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환장 극비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지극히 금욕적이고 철저한 원칙주의자인 판탈레온 판토하 대위가 책임을 맡아 군인들을 위한 이동 창녀 조직, 일명 ‘수국초특(수비대와 국경 및 인근 초소를 위한 특별봉사대)’을 운용하게 된다. 판탈레온은 특유의 꽉 막힌 고지식함으로 여성 대원들의 봉사 횟수, 이용 시간, 수용 인원, 심지어 사정거리와 침대 간 거리까지 수학적·행정적으로 완벽히 데이터화하며 조직을 폭발적인 성공으로 이끈다. 이 ‘수국초특’의 가동 과정은 겉으로는 청교도적 엄숙주의를 부르짖으면서도 속으로는 부패해 가는 페루 군부와 정치 권력에 대한 통렬한 패러디로 완성된다. 이 기형적인 시스템 안에서 군부와 정치계는 거대한 매춘업소로 변모하고, 손 하나 묻히지 않는 장성급과 영관급은 그 업소의 관리인이며, 판탈레온 같은 하급 장교는 비윤리적 실무를 서류로 깔끔하게 세탁해 바치는 뚜쟁이나 기둥서방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사회 최하층으로 취급받던 창녀들이야말로 시스템을 가동하는 실질적 ‘엘리트 집단’이 되는 자극적인 역설을 통해, 소설은 묵직한 정치적 비판과 풍자를 신랄하게 전개한다. 소설 중간중간 삽입되는 군 공식 보고서의 영혼 없는 코믹함, 사적 편지, 라디오 방송 대본, 환각적 독백 등 다양한 텍스트를 촘촘히 직조해 낸 다성악적(Polyphonic) 구성은 가히 이 작품의 백미이자 독서의 재미를 200% 보장하는 요소다. 특히 5장,8장의 정신없이 이어지는 교차 대화가 아주 흥미로운데, 관료주의는 숫자를 위해 성(性)과 인간을 통제하고, 방주교는 구원을 위해 어린아이의 생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제물로 바친다. 요사는 이 두 집단을 교차시키며, 국가 시스템의 차가운 관료주의 역시 사이비 종교의 광기와 다를 바 없이 기형적이고 위험하다는 점을 폭로한다. 권력의 민낯을 신랄하게 밝혀내는 고도의 정치적 풍자, 숭고한 블랙 유머, 그리고 경이로운 문장미가 완벽하게 맞물려 완성된 걸작, 이 책은 현재 내 책장 배 올해의 책 1위로 등극하엿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진짜 미친 사람....도른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빵충 사육 준수 사항 안전가옥 오리지널 48
김혜영 지음 / 안전가옥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혜영 작가의 장편소설 <빵충 사육 준수 사항>은 갓 구운 소금빵의 겉바속촉한 비주얼과 짭조름한 풍미를 완벽하게 복제한 식용 애벌레 '빵충'이라는 미친 설정으로 시작해, 벼랑 끝 청년의 생존 투쟁과 인간의 터져 나가는 탐욕을 기쾌하고 뻔뻔하게 그려낸 신개념 코믹 크리처 서스펜스다. 한때 망할 놈의 음악을 한답시고 트럼펫을 불며 폼 잡다가 밑바닥을 치고 시골로 튕겨 나온 주인공 정한은, 인생 막판 뒤집기로 전 재산을 털어 정부 지원 신산업인 '빵충 사육'에 영끌 투자를 감행한다. 꿈틀거리는 빵충이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대박을 치고 통장에 찍히는 대기업급 숫자를 보며 정한은 마침내 흙수저 인생 역전에 성공했다고 착각하지만, 이 기묘하고 맛있는 애벌레를 안전하게 키우려면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까다로운 '사육 준수 사항'이라는 룰북이 존재한다. 문제는 조금이라도 더 살찌우고 크게 키워 거액을 벌어들이려는 사육자들의 눈먼 탐욕과 "설마 별일 생기겠어?"라는 안일함이었다. 경고를 씹고 하나씩 규칙을 어기기 시작하자, 소설은 씁쓸한 짠내 나는 청년 잔혹극에서 한순간에 약을 사정없이 판 듯한 엽기 크리처 난장판으로 대폭주한다. 귀여운 소금빵 코스프레를 벗어던진 빵충들은 식인 성향을 드러내며 통제 불능의 괴물로 변모하고, 사육장은 단숨에 코믹과 비명이 난무하는 헬게이트로 변한다. 이러한 설정과 서사 구조는 1904년 발표된 H. G. 웰스의 고전 SF 소설 <신들의 양식은 어떻게 세상에 왔나>를 소름 돋을 정도로 강렬하게 연상시킨다. 웰스의 소설에서 성장을 촉진하는 신물질 '허클라 물질'이 연구자들의 부주의와 관리 소홀로 유출되어 쥐와 닭, 곤충들을 공포의 거대 크리처로 탈바꿈시키고 끝내 기존 문명의 질서를 위협했던 것처럼, <빵충 사육 준수 사항> 역시 인간의 오만함과 방심이 초래한 생물학적 파국이라는 거대한 장르적 계보를 잇는다. 웰스가 20세기 초 과학기술의 폭주와 문명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문명론적 풍자를 보여주었다면, 김혜영 작가는 이 영리한 모티브를 가져와 현대 한국 사회의 청년 생존 투쟁, 자본주의의 날것 그대로인 욕망, 그리고 B급 매운맛 감성으로 완벽히 재해석해 냈다. 작가는 황당무계한 세계관을 쓸데없이 고퀄리티인 취재력과 디테일한 묘사로 밀어붙여 독자에게 웃기면서도 가슴 졸이는 고밀도의 도파민 폭탄을 안긴다. 그러고 보면 작품 속 '사육 준수 사항'은 단순한 벌레 키우기 매뉴얼이 아니라, 웰스의 소설 속 통제력을 잃은 인간 사회처럼 자본주의라는 미친 굴레 속에서 인간이 최소한 짐승이나 벌레가 되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할 마지막 양심의 마지노선이었을지도 모른다. 파국이 몰아쳐 사육장이 개판 오분전이 된 와중에도 도망치는 대신 자기가 싼 똥을 치우고 과오의 대가를 치르겠다고 나서는 정한의 무기는 다름 아닌 '음악'이다. 돈이 안 된다며 던져버렸던 그 망할 놈의 예술이, 역설적이게도 지옥 같은 파국 속에서 그를 괴물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남게 만드는 유일한 가오이자 영혼의 방파제가 되어준 셈. 소금빵 탈을 쓴 애벌레가 선사하는 골 때리는 웃음과 서늘한 스릴, 그리고 삭막한 자본의 세계에서 인간의 존엄을 건져 올린 것이 결국 예술이었다는 이 서늘하고도 아름다운 역설ㅋ 깊고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은 한마디로 인스타그램 감성 샷 100장 뒤에 숨겨진 씁쓸한 현실 부부의 종말을 극도로 고급스럽게 그려낸 소설이다. 1960년대 뉴욕 근교, 허드슨 강이 한눈에 보이는 대저택에서 완벽한 비주얼을 자랑하는 비리와 네드라 부부가 등장한다. 남편은 잘나가는 건축가에 아내는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홈파티의 여왕, 여기에 토끼 같은 두 딸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리얼리티 쇼 인생 성공 편 그 자체다. 이들은 매일 밤 분위기 있는 조명 아래 고급 와인을 기울이고 예술을 논하며 완벽한 갓생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필터 빼고 쌩얼로 마주한 이들의 속사정은 참으로 퀴퀴하다. 폭발적인 외도나 막장 드라마급 도자기 파괴 쇼가 터지는 건 아니다. 그저 월요일 아침 출근길처럼 조용하고 무기력하게 권태가 밀려올 뿐이다. "너를 미워하진 않지만, 너랑 있는 내가 너무 지루해"라는 심정으로 각자 몰래 딴짓을 좀 하다가, 결국 "우리 각자 길 가자"라며 아주 우아하고 젠틀하게 갈라선다. 극적인 싸움 하나 없이 물 흐르듯 가정이 파탄 나는 과정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읽다 보면 어? 이렇게 스무스하게 망한다고? 싶은 지경이다. 이혼 후 네드라와 비리는 각기 다른 길을 걸으며 늙어가고, 한때 그토록 눈부시게 빛나던 허드슨 강가의 집과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오직 과거의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게 된다. 제임스 설터의 문체는 매우 시각적이고 시적이어서, 허드슨 강의 빛깔, 계절의 변화,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의 질감과 공기의 온도까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묘사된다. 소설은 삶의 비극성을 과장하여 슬퍼하기보다는, 아무리 아름답고 완벽한 순간이라 할지라도 시간이라는 거대한 불가항력 앞에서는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인생의 무상함을 담담하고 우아한 어조로 말해준다. 삶을 너무 깊이 알고 있는 작가는 세월이 흘러 시들어버린 청춘과 해체된 가정의 쓸쓸함 속에서도, 한때 그들이 나누었던 찬란했던 시간과 빛나던 순간들 그 자체는 결코 부정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는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전달한다. <가벼운 나날>은 스펙터클한 서사 대신 인간의 내면과 관계의 미세한 균열,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의 자취를 치밀하게 기록한 작품으로, 삶의 찬란함과 상실을 동시에 감상하게 만드는 깊은 울림의 소설이며, 한참을 숨 고르며 읽느라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소설. 그렇다. 이 책은 서사를 쫓아가기 위해 책장을 허겁지겁 넘기는 책이 아니라, 문장 하나가 주는 감각에 체해서 한참을 가만히 머물게 만드는 책이다. 빛의 각도나 공기의 결을 묘사한 문장에 턱 막혀서 숨을 고르고,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되는 바로 그 경험이야말로 설터가 주는 '읽는 기쁨'의 정수. 다 같이 느껴보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계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 - LLM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글과 말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마크 코켈버그 외 지음, 신동숙 옮김, 손화철 감수 / 생각이음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 기계가 나보다 글을 더 잘 쓰는데 내 밥줄은 안전한가?라며 밤잠 설치는 이 시대 인간들에게 던지는 매우 지적이고 뼈 있는 럭비공 같은 책이다. 저자들은 AI를 그저 말 잘 듣는 똑똑한 계산기 정도로 폄하하는 쿨한 척하는 거대 언어 모델 통제자파와, 곧 챗GPT가 자의식을 갖고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며 벌벌 떠는 터미네이터 유니버스 파를 동시에 반박한다. 저자들은 페르디낭 드 소쉬르와 자크 데리다, 롤랑 바르트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의 묵직한 이름표를 붙여 와서 AI의 실체를 턴다. AI는 영혼이나 의식이 있어서 감동적인 썰을 푸는 게 아니라, 그저 엄청난 양의 텍스트 데이터 속에서 기호와 기호를 확률적으로 연쇄하며 영혼 있는 척을 하고 있을 뿐이다. 즉, 데리다가 말한 의미의 지연과 차연을 0과 1의 숫자로 무한 굴리기 하는 환각 장인인 셈이다. 이로써 말을 하고 글을 쓰므로 나는 고귀한 인간이다라며 수천 년간 폼 잡던 서구의 로고스 중심주의는 챗GPT의 속사포 텍스트 연타를 맞고 KO 패를 당했다. 롤랑 바르트가 예언했던 저자의 죽음은 이제 출판사가 AI 작가에게 인쇄를 보내는 현실로 성큼 다가왔다. 그렇다고 저자들이 아아, 인간의 시대는 끝났다라며 통곡을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좋아, 인간 혼자 짱 먹던 오만한 언어관을 버리고 기계라는 엉뚱한 대화 상대와 섞여 사는 포스트휴먼 시대의 수다 방식을 만들자라고 윙크를 건넨다. 기계가 뱉어내는 언어는 단순한 구경거리가 아니라 가짜 뉴스나 데이터 편향을 일으키며 우리 현실을 진짜로 뒤흔드는 실전형 언어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이 우리에게 날리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AI가 문장을 기계처럼 퐁퐁 솟아내듯 자동 생산하는 시대일수록,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그 텍스트 뒤에 숨은 헛소리와 권력의 냄새를 귀신같이 맡아내는 비판적 리터러시와 인문학적 현타 감지기를 켜는 것이다. 기계가 언어를 쓰는 시대에 우리가 진짜 경계해야 할 건 AI의 자의식이 아니라, 기계가 짠 영혼 없는 텍스트를 영혼 없이 받아먹으며 스스로 뇌를 비워버리는 인간의 생각 자동화이니 말이다. 아무리 기계가 알잘딱깔센이라 한들,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