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나를 지켜줘 아니면 나를 죽여줘
에릭 포토리노 지음, 하진화 옮김 / 레모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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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포토리노의 <나를 지켜줘 아니면 나를 죽여줘>는 평생 규칙과 이성, 실용주의만을 신봉하며 살아온 외과의사 폴 가셰가 예술이라는 강렬한 세계를 만나 겪는 영혼의 해체와 재구성을 치밀하게 추적한 작품이다. 사람의 신체를 메스로 정밀하게 통제하며 살아온 폴은 어느 날 피렌체 여행 중 세계적인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전시를 마주하게 된다. 불과 얼음, 고독과 침묵, 그리고 관객의 폭력 앞에 자신의 맨몸을 그대로 노출하는 그녀의 극단적인 퍼포먼스는 폴의 견고했던 내면에 거대한 균열을 일으킨다. 이 충격은 곧이어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팬데믹의 고립 및 불안과 맞물리며 그를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변화시킨다. 처음에는 ‘이성적인 의사’와 ‘감성적인 예술가’라는 흔한 이분법적 대립 구도가 너무 납작하지 않나 싶었지만, 이 소설은 두 영역이 지닌 뻔한 클리셰의 함정을 영리하게 피해 간다. 작가는 의사와 예술가를 단순히 반대 극점에 두지 않고, 두 직업이 가진 ‘신체를 극단적으로 다룬다’는 본질적인 공통점에 주목한다. 의사인 폴은 타인의 살점을 째고 피를 보며 생명의 본질을 통제하는 인물이며, 아브라모비치 역시 자신의 살을 베고 고통을 견디며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예술가다. 즉, 폴이 그녀에게 매료된 것은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자신은 타인의 몸을 철저히 통제하는 반면 그녀는 왜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무방비 상태로 내맡기는가에 대한 기묘한 동질감과 부러움 때문이다. 이렇게 신체라는 날것의 매개체를 통해 두 세계의 닮은꼴을 파고듦으로써 평면적일 수 있는 구도에 깊은 입체감을 부여한다. 이러한 인물 간의 대립과 공조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만나 더욱 정교해진다. 만약 평화로운 일상이었다면 폴은 예술을 한낱 기이한 구경거리로 치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가장 이성적이고 통제되어야 할 공간인 병원이 바이러스라는 비이성적인 존재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폴의 세계는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리고, 통제 불능의 재난 속에서 역설적으로 스스로의 통제권을 완전히 내려놓았던 아브라모비치의 예술적 태도는 고독과 공포를 버텨낼 철학적 무기로 재탄생한다. 작가는 예술을 단순한 미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한 인간의 감각과 윤리, 나아가 삶 전체를 뒤흔드는 실존적 사건으로 묘사하며, 예술이 낸 균열을 통해 고립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연대할 수 있는지 묵직하게 질문한다. 소설 속 폴의 변화 역시 결코 낭만적이거나 아름답게 포장되지 않는다. 예술을 조우한 그는 세련된 자아 성찰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 올린 세계가 무너지며 극심한 불안과 고독을 느끼는 자아 붕괴의 고통을 겪는데 작가는 이를 미술 평론 같은 현학적인 해설 대신 인물의 심리와 신체적 반응을 밀도 높은 문체로 증언하듯 현실적이고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합리와 효율의 감옥에 갇힌 현대인들에게 스스로를 온전히 내던지는 내맡김의 가치를 일깨우고 무너진 자아의 틈새로 사랑과 연대의 빛을 채워 넣는 강력하고도 매혹적인 문학적 경험을 선사하는 멋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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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악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1
레이몽 라디게 지음, 원윤수 옮김 / 민음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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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몽 라디게의 소설 <육체의 악마>는 전쟁이라는 비극의 이면에서 피어난 미성숙한 청춘의 파멸적 사랑과 지독한 허무주의를 해부한 소설이다. 16세에 집필하여 20세에 요절한 이 발칙한 작가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사적 대재앙을 그저 꼰대들의 감시가 사라진 개꿀 같은 '방학'으로 규정하며 포문을 연다. 사회적 규율이 셧다운 되자 소년 프랑수아에게 찾아온 것은 애국심이 아니라 목적지 없는 지독한 권태였고, 그는 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전선으로 남편을 보낸 연상의 유부녀 마르트를 간택해 금지된 불장난을 시작한다. 라디게는 이 지저분한 설정을 순애보로 포장하지 않는다. 도리어 사랑이라는 고결한 가면 뒤에 숨은 인간의 치졸한 이기심과 찌질함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집요하게 까발린다. 프랑수아는 마르트와의 연애가 권태의 늪에 빠질 때마다 일부러 질투를 유발하고 의심을 투척하며 관계를 짓밟는다. 이는 사랑의 확인이라기보다 지루함을 이겨내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는 미성숙한 자아의 비틀린 발악이다. 결국 제목이 가리키는 육체의 악마란 기성세대가 구축한 지루한 세상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며, 통제 불가능한 육체적 충동을 통해 권태라는 거대한 늪에서 빠져나가려 했던 청춘의 파괴적인 반항을 의미한다. 이 소설이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련되게 읽히는 비결은 고딩이 썼다고는 믿기지 않는 냉소적이고 시크한 필력에 있는 듯하다. 감정에 취해 울부짖는 대신, 마치 남의 연애 진흙탕 싸움을 구경하는 냉정한 관찰자처럼 차분하고 건조하게 팩트만을 나열한다. 이 고단수적인 절제미 덕분에 읽는 동안엔 불륜과 책임 회피라는 막되먹은 서사 속에서도 기묘한 문학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육체의 악마>는 전쟁중이라는 완벽한 알리바이 속에서, 인간이 권태라는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사랑이라는 환상 아래 감추어진 독점욕과 허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투명하게 증명해 낸다.


PS. 고전 속 소재로 불륜이 심심찮게 보이는 이유는 뭘까 생각해 보쟈ㅋ 고전이 쓰인 옛날(특히 19세기 전후)의 결혼은 남녀가 눈이 맞아 하는 로맨스가 아니라, 가문과 재산, 신분을 결합하는 가장 강력한 사회적 제도였다. 즉, 결혼을 유지한다는 건 그 사회의 법과 도덕, 종교의 시스템을 잘 따르고 있다는 증명이고. 불륜이 발생하는 순간, 그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정절, 명예, 종교적 계율, 가부장제 같은 모든 가치가 한꺼번에 도마 위에 오르고, 그 안에서 허우적대는 인간 군상의 속물근성과 위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 들킬까 봐 땀을 쥐는 공포, 금기를 깰 때의 짜릿함, 소유욕과 질투까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막장급 감정 소용돌이를 단 한 편의 소설로 뽑아내기에 이보다 완벽한 실험실이 또 있었을까ㅋ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에서는 인간의 진짜 본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데, 작가들은 인간의 내면을 극한까지 몰아세우고 싶어 하고, 불륜은 그 자체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극한 상황을 보장하니까. 평화로울 땐 세상 젠틀하던 인간도 이 불장난 속에 던져지면 찌질함과 잔인함의 바닥을 여실히 드러내니까. 결국 고전 속 불륜은 ‘안전하지만 지루한 현실(권태)’과 ‘위험하지만 짜릿한 환상(열정)’ 사이의 밀당을 보여주는 거대한 비유가 아니었을지. 지독한 일상의 지루함을 깨부수려 불 속으로 뛰어들지만, 대문호들은 냉정하게도 그 불타는 열정마저 결국 또 다른 권태나 파멸로 끝난다는 현생 팩폭을 또 날려주니까. 그러니까 고전 속 불륜은 자극적 찌라시가 아니라, 인간의 날것 그대로의 욕망과 나약함을 해부하기 위해 작가들이 날카롭게 벼린 문학적 메스였던 셈 아닐까. 라고 고전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아...애써본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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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5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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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강렬한 심리적 서스펜스를 선사하는 고전이다. 소설은 주인공 라스콜리니콜프가 자신만의 이성적 논리에 취해 극단적인 선택을 내린 후, 그 대가로 찾아오는 처절한 심리적 붕괴와 내면의 지옥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추적한다. 작가는 범죄의 물리적 과정보다, 인간이 스스로 판 함정에 빠져 어떻게 영혼이 파멸해 가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인물의 모순된 내면을 가차 없이 발가벗기는 데 있다. 주인공은 거창한 이념과 초인 사상을 부르짖으며 대단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하지만, 그는 그냥 말하자면 엄마 여동생 등에 빨대 꽂고 살다가 돈 떨어지니 돈 있고 약한 여자 노인 골라 죽인 살인자 그러니까 그냥 지질한 범죄자인데, 거기에 더해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밖에선 인심 좋은 척 퍼주고 다니는 푼수 로쟈..힘쎈 남자 앞에선 혼미해지는 선택적 예민러 로지온..심신미약한 여자를 기가막히게 골라 감정 노예로 부리려는 것까지 비대한 자아만 가진 못난 남자의 현신 그 자체로 이런 라스콜리니콜프의 위선은 160여 년이 지난 지금의 관점으로 보아도 소름 끼칠 정도로 현실적이며 날카롭다. 또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수사관과의 숨 막히는 심리전은 단순한 범죄 추리극을 넘어서는데, 증거가 아닌 인간의 죄책감과 심리적 균열을 이용해 목을 조여오는 압박감은 읽는 이마저 주인공과 함께 땀을 쥐게 만든다. 여기에 주인공의 일그러진 자아를 투영하고 자극하는 개성 강한 주변 인물들이 얽히고 설키며 인간성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이 소설,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라는 띵언의 조상격 사례가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러나 읽을수록 본질은 정반대임을 느낀다. 작가는 아무리 그럴듯한 논리와 이념으로 포장할지라도,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오만은 반드시 인간성 자체의 파멸을 부른다는 엄중한 경고를 던진다. 웅장한 사상으로 시작해 지질한 심리적 바닥까지 추락하는 과정을 통해, 도스토옙스키는 범죄의 매혹이 아닌 범죄자의 처절한 민낯을 고발하는 공공재판을 수행한다. 결국 <죄와 벌>은 인간이 지닌 지성의 오만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을 진정으로 구원하고 치유하는 것은 냉철한 이성이 아니라 고통을 직시하는 용기와 진정한 연대라는 점을 묵직하게 역설하고 있다.

PS. 과연 사람을 죽이고 멋대로 종교에 귀의해 신한테 용서 받는게 진정 용서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쟈ㅋ 이것은 <죄와 벌>을 읽은 수많은 독자뿐만 아니라, 인류가 역사 내내 종교와 사법 체계, 그리고 도덕을 향해 던져온 가장 본질적이고 치명적인 의문일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피해자가 배제된 채 "사람을 죽이고 신(종교)에게만 가서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 추악한 도피이자 또 다른 가해에 불과하다. 영화 <밀양>에서 아이를 유괴해 살해한 범인은 교도소에서 기독교를 믿고 '하나님에게 이미 죄를 용서받아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며 유가족 앞에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정작 용서해 준 적 없는 피해자는 지옥 속에 사는데, 가해자 혼자 신의 이름을 빌려 면죄부를 발행하고 발 뻗고 자는 모습은 종교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기만적인 형태의 폭력이다. 재미있는 점은, 도스토옙스키 본인 역시 <죄와 벌>의 결말(로쟈가 성경을 마주하는 장면)에 스스로 백 퍼센트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만년에 쓴 대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이 질문을 둘째 아들 이반 카라마조프의 절규를 통해 다시 정면으로 다룬다. 도스토옙스키조차도 신이 인간의 모든 죄를 퉁쳐서 용서해 주는 시스템에 대한 도덕적 딜레마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것 아닐까ㅋ 여튼 가해자가 신 뒤에 숨어 "나는 용서받았다"고 정신 승리하는 것은 종교를 이용한 뻔뻔한 위선이다. 진정한 용서와 구원은, 신에게 기도 몇 번 올리는 것으로 획득되는 영수증이 아니다. 피해자의 고통을 감히 헤아리며, 자신이 부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평생토록 현실의 죗값을 치르고 고뇌하는 처절한 과정만이 (비록 완벽할 순 없을지라도) 용서라는 문턱에 겨우 다가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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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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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사교계를 은밀하게 그러나 화려하게 흔든 불륜극, 그리고 콜레라가 창궐하는 중국 오지로의 느닷없는 유배.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은 한마디로 철부지 속물 여주인공의 매운맛 영혼 갱생기이자, 지독한 환멸 끝에 찾아오는 인간 성장 드라마이다. 소설은 시작부터 흡인력이 대단하다. 예쁘장한 외모와 사교계의 허영심이 전부였던 키티는 사랑 없는 결혼을 했다가, 매력적인 유부남 타운센드와 대책 없는 불륜에 빠진다. 하지만 세균학자인 남편 월터에게 이 현장을 딱 걸리고, 여기서 남편이 내린 처벌이 압권. 이혼 소송 대신, 분초 단위로 사람이 죽어 나가는 지옥 같은 콜레라 창궐지 '메이탄푸'로 함께 가자고 협박한 것이다. 배신당한 남편의 살벌한 동반 자살 특공대 작전에 강제로 합류하게 된 키티는 그렇게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서머싯 몸은 이 메이탄푸라는 극한의 공간을 통해 인간이 덮고 있는 가식과 허영의 베일을 인정사정없이 찢어버린다. 키티가 그동안 목숨 걸었던 사교계의 평판, 외모, 물질 같은 것들이 죽음이 만연한 곳에서는 얼마나 부질없는 '채색된 베일'이었는지가 처절하게 증명된다. 재미있는 건 이 소설이 단순한 치정극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키티는 그곳에서 매일같이 죽음을 마주하고, 조건 없이 헌신하는 프랑스 수녀들을 보며 서서히 내면의 변화를 겪는다. 비극적인 사건들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와중에도 철부지였던 키티가 점차 과거의 실수를 자양분 삼아 주체적인 인간으로 우뚝 서는 과정은 이 소설을 바람 피우다 망테크 탄 유부녀의 연애 잔혹사에서 위대한 인간 독립 선언서로 격상시키는 백미라고 할 수 있다.


PS. 하지만 이 강렬한 소설에도 현대적 관점에서 뒷목 잡게 만드는 치명적인 '그 시절' 한계가 도사리고 있다. 바로 '백인 구원자' 콤플렉스와 지독한 오리엔탈리즘이다. 소설 속 1920년대 중국은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공간이 아니다. 백인 주인공들의 갈등을 극대화하고 정신적 각성을 유도하기 위해 세팅된 불결하고 미개한 재난 스튜디오에 불과하다. 현지 중국인들은 주체적인 인물로 단 한 명도 조명받지 못한 채, 그저 떼로 몰려와 무기력하게 죽어 나가거나 백인들이 베푸는 자비와 치료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로 타자화된다. 여기서 숭고함의 끝판왕으로 묘사되는 프랑스 수녀원 에피소드는 서구 제국주의의 시혜적 시선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개한 유색인종을 우월한 백인 종교인들이 구원한다는 식의 식민주의적 정당성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 게다가 가장 얄미운 부분은 이 수많은 현지인의 비극과 고통이, 고작 영국 온실 속 화초였던 키티라는 백인 여성이 "아, 인생이란 이런 거구나!"라며 철들고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서사적 소모품이자 무대로 철저히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여튼 <인생의 베일>은 인간의 위선과 모순을 칼날처럼 해부하고 영혼의 도약 과정을 입체적으로 그려낸 페이지 터너임엔 틀림없다. 서머싯 몸 특유의 찰진 문장과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팩트 폭격 역시 짜릿하다. 다만, 백인의 우월감이라는 또 다른 거대한 '제국주의의 베일'은 끝내 벗겨내지 못한 채 그 속에 갇혀버렸다는 한계 또한 명확히 인지하고 읽어야 할, 매혹적이면서도 씁쓸한 뭐랄지 좀 야비한(ㅋ)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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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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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은 [유령 소설], [유령], [잠겨 있는 방] 세 편의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된 중편을 통해 현대인의 실존적 위기를 다룬 독보적인 분위기의 현대 고전이다. 탐정 소설의 형식을 빌려 고독한 대도시 뉴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작품은, 사건의 명쾌한 해결 대신 ‘인간의 정체성 상실’과 ‘자아의 붕괴’라는 심오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재미는 장르의 법칙을 대놓고 배신하는 밀당에 있다. 보통의 추리 소설이라면 명탐정이 등장해 단서를 모으고 "범인은 바로 너!"를 외쳐야 하겠지만, 이 작품 속 탐정들은 어딘가 나사가 하나씩 빠져 있다. 타인의 뒤를 쫓고 감시하는 일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어느새 자신이 쫓던 대상을 닮아가거나 도리어 내가 감시당하는 기묘한 늪에 빠진다. 추적을 하면 할수록 사건이 해결되는 게 아니라, 탐정의 멘탈과 정체성이 먼저 산산조각 나버리는 주객전도의 코미디 같은 비극이 펼쳐진다. 작가는 여기에 ‘말장난과 기호’라는 지적인 퍼즐을 버무려 놓았다. 주인공들은 탐정 노트에 집요할 정도로 글을 쓰고 텍스트를 분석하지만, 그들이 적어 내려가는 문장들은 진실을 밝히기는커녕 상황을 더 꼬이게 만드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내가 쓰는 글이 진짜 나인지, 아니면 글 속에 갇힌 가짜 나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오스터 특유의 밀도 높은 두뇌 싸움은 독자에게 미로 속에 갇힌 듯한 아찔한 쾌감을 선사한다. 결론적으로 <뉴욕 3부작>은 범인을 잡는 서사의 쾌감을 넘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분열을 탐구한 지적인 텍스트이다.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주체가 아니라 미스터리 그 자체가 되어버린 인간의 삶을 비추며,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서늘한 질문을 남기는 작품. 다만 대도시의 차가운 고독감과 미로 같은 텍스트의 유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인생작이 될 수 있지만, 명확한 결말과 사이다 같은 사건 해결을 원하는 이에게는 불친절하고 모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PS.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도록 하자ㅋ 수많은 '자아 찾기' 소설들이 방황 끝에 "이게 바로 나야!" 하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며 카타르시스를 준다면, <뉴욕 3부작>은 정반대의 궤적을 그린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던 인물이 뉴욕이라는 거대한 미로와 미스터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자신의 자아를 양파 껍질 벗기듯 하나씩 잃어버리는 '자아 상실의 기록'에 가깝다고나 할까. 폴 오스터는 이 소설을 통해 "인간의 자아라는 것이 과연 고정되어 있는 단단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소설 속 인물들은 타인을 너무 깊게 들여다보거나, 텍스트 속으로 너무 깊이 빠져들다가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의 끈을 놓쳐버린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짜릿한 해방감이 아니라, "내가 믿고 있는 '나'라는 존재도 어쩌면 대도시의 소음과 타인의 시선 속에서 언제든 쉽게 지워질 수 있는 유약한 것이 아닐까?" 하는 서늘한 인간적 고독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완벽한 '자아 분실 미스터리'인 셈이다. 사이다 없음, 고구마와 아찔함만 가득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연달에 세 번 빠져서 읽었다. 폴 오스터가 구축한 특유의 몽환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다면 적극적인 추라이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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