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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그물을 헤치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8
아이리스 머독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15년 1월
평점 :
아이리스 머독의 <그물을 헤치고>는 관념의 오만에 빠진 지식인의 해체와 성찰을 다룬 철학적 코미디 소설이다. 삼류 번역가이자 작가, 동시에 건달이나 다름없는 주인공 제이크 도너휴는 스스로를 지적인 작가라 믿지만, 실상은 남의 집에 얹혀살며 관념적 유희로 삶을 연명하는 인물이다. 어느 날 머물던 거처에서 쫓겨난 그는 돈과 거처, 그리고 과거의 인연들을 찾아 런던과 파리의 거리를 방황하기 시작한다. 이 여정 속에서 명물 개 납치극, 영화 세트장 난동 등 피카레스크 소설 특유의 기상천외한 소동극들이 유쾌하게 펼쳐진다.
이 희극적 전개의 중심에는 비트겐슈타인적 언어회의론이 깊게 작동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세상을 논리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지언정 윤리, 미학, 타인의 내면 같은 삶의 본질은 포착할 수 없으며, 따라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다. 머독은 이 철학을 소설의 핵심 상징인 '그물'로 확장한다. 그물은 유동적이고 복잡한 실재를 정형화된 언어, 이론, 선입견이라는 틀에 가두려는 인간의 지적 기만과 오만을 의미한다.
제이크는 타인의 심리와 복잡한 인간관계를 자신이 만든 언어적 프레임으로 재단하고 완벽히 이해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현실이 베일을 벗을 때마다 그의 고상한 '뇌피셜'은 완벽한 오해와 헛다리로 판명 난다. 언어로 세상을 모두 쥐어짤 수 있다는 관념적 자만은 실재의 예측 불가능한 역동성 앞에서 산산조각 난다. 결국 소설은 거창한 언어와 추상적 이론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타인의 절대적 개별성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타인을 내 관념의 그물에 가두지 않고 순수하게 관조하는 법을 배운 제이크는 마침내 타성적인 번역가를 벗어나 진정한 창작자로서 자기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 풍자적인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제임스 설터의 단편소설집 <어젯밤> 중 '혜성'에 등장하는 한 구절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누군가를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녁을 함께 먹고 카드를 몇 번 쳤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은 실제로 아무것도 모른다. 언제나 놀라게 된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머독이 비트겐슈타인적 철학을 바탕으로 펼쳐놓은 길고 정교한 서사가 설터의 문장 속에서는 서늘하리만큼 단호하고 깔끔하게 벼려진 절개선처럼 다가온다. 소설 속 제이크 역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식사를 나누고, 수많은 담소를 나누었기에 타인과 세상을 완벽히 '안다'고 자만했다. 하지만 그의 정교한 뇌피셜과 언어의 그물은 현실이라는 타인의 진짜 실재 앞에서 맥없이 찢겨나간다.
관념으로 가두려 해도 결코 포섭되지 않는 타인의 절대적 개별성과 삶의 예측 불가능성을 이토록 담담하고 명징하게 꿰뚫는 문장이 또 있을까. 머독의 번잡하고 유쾌한 소동극이 다다른 마침표와 설터의 명료한 한 줄은 정확히 같은 지점에서 교차한다.
아이리스 머독의 <그물을 헤치고>는 피식 웃어버릴 수밖에 없는 어이없는 유머와 철학적 사유를 결합하여 독자에게 끊임없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동시에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스스로 덮어씌운 선입견과 언어라는 그물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그물을 찢어내고 마주하는 진짜 현실과 타인의 가치가 얼마나 숭고한지를 일깨워준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신은 실제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 서늘한 선언은 오만했던 마음을 내려놓게 만들며 묘한 안도감을 안겨준다. 내 관념으로 세상을 통제하거나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복잡했던 마음은 비로소 진정되고 편안해진다. 모든 것을 움켜쥐려던 손을 풀고 '케세라세라'의 태도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때, 비로소 진짜 현실과의 솔직한 만남이 시작되는지도 모른다.